전문가 칼럼 자바에서 시를 읽다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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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인숙의 독서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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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
시. 고은
비록 우리가 몇 가지 가진 것 없어도
바람 한 겹 없이
지는 나무 잎새의 모습 바라볼 일이다.
또한 바람 일어나서
흐득흐득 지는 잎새의 소리 들을 일이다.
우리가 아는 것이 없더라도
물이 왔다가 가는
저 오랜 썰물 때에 남아 있을 일이다.
젊은 아내여
여기서 사는 동안
우리가 무엇을 가지며 무엇을 안다고 하겠는가
다만 잎새가 지고 물도 왔다가 갈 따름이다.
출처: 문의마을에 가서 (1974년판)
NOTE**************
2주 전에 스웨덴 한림원에서 노벨 문학상 수상자를 발표했다. 올해의 수상자는 일본계 영국 작가인 가즈오 이시구로에게 돌아갔다. 그리고 해마다 수상 후보자에 이름을 올리는 우리 나라의 고은 시인에게 언론과 대중의 관심이 또 한번 집중되었다. 원래 승려였던 고은 시인은 환속 후 지독한 허무주의 시를 썼던 시인으로, 후기에 들어서는 현실 참여적 시를 쓰는 투사로, 20여 개 나라의 언어로 시가 번역된 보기 드문 세계적 시인으로, 그리고 유력한 노벨 문학상 후보자로 오늘에 이르렀다.
10월만 되면 한국에서도 노벨 문학상을 배출할 수 있게 될지 모른다는 희망과 가능성을 이야기하며 들썩거리지만, 실상 우리 나라 사람들 중에 과연 그의 시를 읽은 사람이 몇이나 될런지 솔직히 회의적인 생각도 든다. 나 역시도 그의 초창기 시를 좀 더 좋아하는 편이나, 만인보로 대표되는 장편 시와 어느 대형서점 벽에 걸렸던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못 본 그 꽃’이라는 짧은 시를 의무처럼 기억할 뿐이다. 아무튼 10월만 되면 너나없이 시인의 이름을 올리며 왜 우리 나라는 아직도 노벨 문학상을 받지 못하는가를 떠드느니, 그의 시를 한 편이라도 읽는 것으로 응원하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이다. 일년에 책을 한 권이라도 읽는 성인이 10명 중 6.5명에 불과한 나라(2016년 문체부 조사)에서 그런 상을 기대한다는 게 어불성설이 아닌가 싶은 게 솔직한 심정이기도 하다. 내가 좋아하는 그의 초창기 시집 <문의마을에 가서>에 실린 ‘삶’을 이번 주의 시로 선택한 이유이다.
채인숙/ 시인. 2015년 <실천문학> 오장환 신인문학상을 받으며 등단했다. 라디오와 다큐멘터리 작가로 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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