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칼럼 [인도네시아 한인들의 경영 이야기-2] 나눔 경영, 나는 아직 할 일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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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탐문, 경영이 예술이다]
인도네시아 한인들의 경영 이야기(2)-인도네시아 <무궁화 유통> 홍사 김우재 회장(81)의 경영 세계
여기 뚝심 넘치는 팔십 나이 청년이 계시다. 인도네시아 무궁화 유통 홍사 김우재 회장(이하 홍사 회장)이다. 인도네시아
거주 46년, 쌓인 연륜만큼이나 그의 업적은 참 많고 놀랍다. 이 프로젝트 경영탐문 책과 영상으로는 다 담아낼 수 없다. 고민
끝에 결론을 찾았다. 뼈대만 기록하자다. 정보와 지혜가 필요한
분들이라면 이 가이드라인을 키워드 삼아 구글링하면 얻을 정보가 넘칠지니.
▲ 홍사 김우재 회장(왼쪽)과 인재 손인식 작가
“인도네시아 46년, 돌아보면 제일 먼저 생각나는 사건이 있어요. 일촉즉발, 자카르타 일대 상황이 전쟁터를 방불했던 1998년 5월 17일이에요. 정치 문제로 불거진 사건인데 때를 노려 군중심리를 부추기고 약탈과 방화가 난무한 소요사태로 번졌지요. 이때 약탈과 방화의 타깃은 화교였어요. 평소 베풀지 않고 이익만 챙긴 것이 원인이라고 생각합니다.”
“외모가 비슷한 우리 교민들도 피해가 컸어요. 정보를 알았던 미국인들은 미리 철수했고 일본인들은 질서를 갖춰 본국으로 피하는 중이었습니다. 우리 대사관과 한인회 등이 모여 대책을 강구했는데 소요 중에 좋은 해결책 찾기가 어려웠지요. 그때 퍼뜩 저를 깨운 생각이 제가 할 일이었어요. 제 능력 범주 안에서 바로 실행에 옮겼지요.”
흔히 <1998년 자카르타 폭동>으로
이해되는 사건이다. 교민들은 대 다수 아는 일, 홍사 회장께서는
이 사건을 대담의 첫 이슈로 삼으셨다. 자신의 수많은 역경과 산처럼 쌓인 성공보다 이 사건이 가져다준
의미가 더 크고 깊다고 하셨다. 홍사 회장의 진면모가 아니랴. 그의
이타심과 통찰력, 팔십 나이에도 도도히 간직한 뚝심과 위축됨 없는 자신감, ‘고난을 인생의 양념’으로 여기는 삶의 철학이 잘 드러나는 이 사건.
홍사 회장께서는 어떻게 위기 상황에서 무궁화 유통을 지키고 교민들을 도울 수 있었을까? 바로 평소에 다져놓았던 우호 관계가 무기였다. 당시 대통령 군사 자문이던 따룹(Tarub) 장군의 무장 군인 지원이 있었던 것이다. 렌트 버스에 무장 군인이 동승하여 교민들을 안전하게 공항으로 이동시켰고, 대피 중인 한인들을 위해 한인회에 비상식량을 전달했다.
그 사이 무궁화 유통을 안전하게 지켜준 이들이
있었다. 평소 무궁화 유통으로부터 따뜻한 도움을 받았던 지역 현지인들이었다. 현지인을 향한 나눔과 인맥 쌓기가 타국살이 전략이었으리라. 그런데
위급 시 이렇게 자신과 교민들의 큰 보호막으로 쓰일 줄 홍사 회장께서는 예상했었을까?
“인도네시아와 제 인연은 1977년 나이 서른넷 때입니다. 인도네시아 칼리만탄 타라칸 지역에서 원목개발 사업을 시작했어요. 대학 졸업 후 10년 간 근무하던 안정된 직장 대한항공을 훌쩍 벗어나 새로운 꿈에 도전한 것이지요. 그런데 1980년 인니 정부의 원목 수출 금지 조치가 내려졌어요. 예상도 못했던 일로 생명을 담보해야 했던 정글 속 3년 고생이 수포로 돌아가고 더한 고난이 닥쳤지요. 목제 가공업까지 확장할 여력이 없었던지라 큰 빚을 떠안은 상태에서 대안을 찾아야 했어요.”
“백방으로 뛰다가 식품사업으로 전환하게 되었어요. 수제 고추장과 된장을 만들고 떡집을 열어 가래떡을 팔기 시작했지요. 발로 뛰어 김치 수요를 창출한 것이 전환점이었습니다. 본격적인 김치 공급은 칼리만탄 본땅 지역의 가스전이었는데요. 그곳 현장에서 일하는 한국인 기술자 800명을 대상으로 식품 납품권을 따냈기 때문이죠. 이어 대림 건설의 수마트라 두마이 항구 정유공장 건설에 참여하는 1500명 한인들(후에 3천명)을 위한 게스트하우스와 한국식당 운영권을 따낸 후에는 기업운영이나 다름없었지요.”
“고산지 배추를 재배하도록 현지인들을 선도하고 수거하는 일에서부터 주 부식 공급 또한 쉽지가 않았어요. 그러나 이 경험은 식품유통 사업의 탄탄한 기반이 되었지요. 이 때 아내 젬마(박은주 여사)의 역할이 매우 컸어요. 저 이상의 열정을 가진 아내는 지문이 닳아 없어지고 시력저하를 겪으면서도 꿋꿋이 버텨냈습니다.”
대대적인 원목사업 꿈이 식품사업으로 전환이었다. 속 모를 이들은 안 어울린다거나 쉬운 전환으로 여길 수 있으리라. 그래서 2009년 발간된 홍사 회장의 회고록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를 찬찬히 읽어야 한다. 제대로 이해하고 지혜를 얻을 수 있을 테니까. 그러니까 홍사 회장께서 식품의 중요성을 체감하게 된 것은 먹을 것이 귀했던 밀림의 원목 체취 현장이었다는 것이 필자 생각이다. 책 속에서 독자가 해석할 행간을 찾아보자.
책 안에는 된장, 고추장을 빚고, 떡집을 연
사연이 어제 일처럼 살아 있다. 젬마 박은주 여사의 지문과 시력저하 대목도 사실 그대로 잡힐 듯이 쓰여
있다. 가슴 저미게 하는 기록들이다. 필자는 이 책 출간기념식
때 인니한인예총회장 자격으로 축사를 했다. 그때도 읽었는데 이번에 찬찬히 다시 읽었다. 한마디로 독후감을 밝히면 ‘행운의 재발견’이다.
처음 일반 항공사 화물로 수송하던 김치를 F27 비행기를 임대해 좌석을 뜯어내고 수백 개의 김치 통을 실었다는 대목도 그렇다. 홍사 회장다운 기지다. 고 현대 정주영 회장의 향기도 없지 않다. 1차 깔리만탄 발릭빠빤 공항으로 옮긴 김치를 다시 경비행기에 싣고 건설 현장까지 옮겼다니 그야말로 드라마 속 한 장면 아니랴.
더 흥미로운 것은 홍사 회장께서 처음 김치를 납품한 곳이 외국인 회사였다는 점이다. 구매 담당자도 김치를 모르는 외국인이었다. 오직 800명의 김치 문화를 가진 한국인 기술자들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파고들었다. 그리고 그것이 성공가도 열기였다. 그러니까 우리가 누구의 지혜를 배우려면 그의 성공 끝자락 보다 그의 전략과 과정을 더 자세히 들여야 봐야 하리라.
인도네시아에 무궁화 꽃을 피워낸 <무궁화 유통>
현재 무궁화 유통은 자카르타를 중심으로 여러 지역(땅그랑,
반둥, 발리 등)에서 10개의 직영점을 운영하고 있다. 또한 현지 식품유통회사 40곳과 가맹 관계로서 이들 유통회사의 전국 4천여 지점을 통해 한국
상품 1800여 종을 유통하고 있다. 그리고 오늘도 인도네시아
유명 마트(롯데마트, GS, 까르푸, 하이퍼마트, 푸드마트 등) 200여
곳에서 한국식품 위탁 코너가 운영되고 있다.
이는 강력한 화교 자본의 대형 식품유통회사들과 경쟁으로 쟁취한 결과다. 그리고 이 보이지 않은 전쟁은 현재 진행형이다. 한국식품 차별화 노력이 주효했다 했다. 제품 홍보에 전통과 건강을 강조한 것이 딱 들어맞았다 했다. 끊임없이 크고 작은 단독 프로모션 노력이 한 알 한 알 결실로 맺혔다. 매년 자카르타에서 열리는 <자카르타 프리미엄 소비재전>에 참가한 덕도 있다. aT 농수산물유통공사나 한국의 지방 자치 단체와 함께 진행하는 이벤트도 그침이 없다.
이런 노력은 단순한 무궁화 유통이란 기업 성장만이 아니다. 한류 심고 가꾸기, 그리고 한류 촉진의 현장이며 갈수록 발전하고 있다. 인도네시아 식품유통 기업들의 인식이 바뀔 수밖에. 현지 유통 매장들의 한국식품 부스 설치와 입점 요구를 다 수용하지 못하는 현실이 이 아니 기쁠까.
“무궁화 유통에는 좀 특별한 부서에 10명의 직원이 있어요. 수입할 한국식품을 인도네시아 식약청에 등록 관리하는 업무를 전담하는 직원들이지요. 한국식품을 인도네시아에 수입하려면 반드시 거쳐야 할 절차가 있습니다. 인도네시아 식약청 식품 수입허가 ML(Makanan Luar)이죠.”
“무궁화유통은 식품이 중심이에요. 그러나 단순히 식품에만 머물지 않았어요. 가정용품, 의류, 화장품, 완구 등 한국 소비제로 차츰 폭을 넓혔지요. 아울러 무역회사 코인부미와 부미관광, 건설회사 프리마무다, 부동산개발업체 부미인다 등을 연이어 설립했습니다.”
무궁화 유통의 활약이 한류의 힘이 된 때문일까? 정부와 사회, 방송과 신문 등 미디어에서도 화답하듯 응원이 이어졌다. 케이푸드어워드
수상을 비롯해서, 인도네시아 후생복지훈장(2008), 월간
중앙의 자랑스러운 해외 경영인상(2008), 한국일보의 고객감동 그랑프리 대상(2009)년, 대한민국 국민훈장 동백장(2013)으로 격려해줬다.
방송 출연도 이어졌다. 60분 방영의 KBS TV 글로벌 성공시대에 출연했고, MBC TV 햇빛통신에 부부가 나란히 앉았으며, TBS 해외사업 정착 관련과 경제 프로그램도 홍사 회장의 스토리로 연속 3회를 꾸렸다.
아무리 많아도 기록할 것은 해야 한다. 우선 <세계한인무역협회(World-OKTA)>를
기반으로 한 홍사 회장의 놀라운 성과다. 월드옥타는 2007년
2월 홍사 회장의 주도적인 역할로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 설립되었다.
그해 각 분야 전문가들을 초청 차세대를 위한
1차 무역스쿨을 운영한 이후 연이어 이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인도네시아에서만
600여 명의 경제 엘리트를 배출하는 등 차세대 한인 무역인 육성에 힘썼다. 해외 현장에서 닦고 쌓은 기성세대의 경험과 지식을 신세대에게 전수하고자 염원하던 홍사 김우재 회장의 꿈이 현실화되는
현장이었다.
“<세계한인무역협회(World-OKTA)>는 세계 곳곳에 포진한 한국인 경제인들이 모여 1981년 설립한 단체에요. 2020년 통계인데요. 68개국 7.000여 명의 정회원과 2만 1,000명의 차세대 회원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명실상부한 해외동포 중심의 경제단체라 할 수 있어요. 활동하다보니 중앙무대로 진출해야 할 필요성이 느껴지더군요. 2010년 경선을 통해 월드옥타 이사장으로 선출되었어요. 2012년에는 세계의 쟁쟁한 경쟁자들과 경쟁, 우여곡절 끝에 월드옥타 17대 회장으로 선출되었지요.”
“선거와 임기 중에 세계 여러 곳을 참 많이 오갔는데요. 지구촌 곳곳에서 치른 수차의 경제인 대회들이 제 눈에 선합니다. 특히 회장 재임 시 주관한 2013년 발리의 제18차 세계한인경제인대회는 제게 특별한 기억으로 남았습니다. 67개국 700여 명 회원들의 참가했는데요. 대 성황을 이뤄준 분들에게 다시 감사드립니다.”
“저는 민간의 이런 활동이 한·인니 협력관계 증진에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하는데요. 일본이 동남아에서 펼치는 재패니제이션(Japanization)이 좋은 자극이었어요. 코리아나이즈(Koreanaze) 작업이 없다면 자존심 상할 일 아닌가요? 한국 중소기업 해외 진출의 밑거름이 될 차세대를 위한 무역스쿨,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큰 역할로 드러날 것을 믿습니다.”
▲세계해외한인무역협회 창립 30주년 기념식에 참석한 홍사 김우재 회장(아래 맨 왼쪽)
홍사 회장의 경영과 활동 가치가 높게 평가 되는 것은 단순히 자신의 사업 영역과 경영에만 머무르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가 사단법인 인도네시아 무궁화재단 이사장이란 직함을 통해 활발한 사회활동을 전개한 것은 그렇다 치자. 한마디로 그의 활동은 폭이 매우 넓다.
인도네시아 한인상공회의소 유통협의회 회장, 인도네시아 한국국제학교 재단이사를 역임했고 충청남도 수출홍보대사도 맡고 있다. 제12차~14차 세계한상대회 공동대회장을 역임했는가 하면, 그는 자격이 엄격한 한상 리딩CEO 멤버다. 리딩CEO는 자본금 300만 달러 이상, 연매출 3천만 달러 이상 사업체를 운영해야 한상 네트워크 일원이 될 수 있다. ESG(환경·책임·투명경영)활동을 덤으로 쳐야 할 정도다.
인도네시아 정관계 인사들과 교류의 폭도 상상 이상이다. 홍사 회장께서는 메가와띠 전 대통령의 남편인 또픽 끼에마스 국민협의회(MPR) 전 의장과 막역한 사이로 한 때 개인 고문을 맡기도 했다. 전 교통부 장관이자 현재 통합군 재향군인회장(퇴역대장)과는 45년 우정을 나누고 있는데, 최근(3월 6일)에도 성김 주 인도네시아 미국대사와 3인이 회동하여 개인 간 우정과 국가 간 협력을 다짐하기도 했다.
▲주인도네시아 미국 대사 성 김(왼쪽), 45년지기 아굼 구멜라 재향군인회장(가운데)과 함께
▲ (왼쪽부터)수실로 밤방 인도네시아 전 대통령, 자스리 마린 전 헌병감, 홍사 회장
홍사 회장께서는 서슴없이 제2의 고향으로 인도네시아를 꼽는다. 그리고 인도네시아의 성장 잠재력을 자랑스럽게 여긴다. 2022년 매일경제에서 선정한 글로벌 리더스 20명 중 1인으로 조명된 것은 그의 성과와 정서를 포괄했다고 할 수 있다.
하니 요모조모 밝힘을 자랑으로 외면하는 혹자가 없기를 바란다. 한
발짝만 나아가면 인도네시아 한인사회가 보유한 역량이요 귀한 자산이니까. 한국과 인도네시아 교민의 위상에
도움이 되면 됐지 해가 될 일이 아니니까. 이런 기록, 이
프로젝트의 한 축이라는 것 괜찮은 일 아닌가.
그러므로 80 나이에도 뚝심 좋은 청년으로 사는 그를 응원하자. 보통 사람은 접근조차 할 수 없는 일을 어찌 다 풀어내실까 헤아려보자. 비용은
기업의 사회 환원 차원으로 치자. 활동에 소요되는 그 시간은 또 어찌 감당하시는가? 골프는 정기 부정기를 가리지 않으시며 색소폰으로 망리투한(忘裏偸閒), 바쁨 가운데 한가함을 훔치는 멋을 즐기신다. 2009년에는 회고록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를 펴내 주변을 깜짝 놀라게 하더니 2021년에는 시집 『무궁화 꽃 피고』를
상재하셨다.
▲색소폰으로 여유를 즐기는 홍사 회장
산다는 것은 실천이다. 실천은 곧 자기 인생 창작이다. 필자가
홍사 김우재 회장과 교류한지 어언 20년, 무궁화 유통이
벌이는 K-푸드 이벤트의 신선함과 의미는 필자로 하여금 자연스럽게 기고문을 쓰게 했다. 자카르타 한인성당의 교우였고, 크고 작은 교민 행사에서도 마주한
것이 비일비재다. 홍사 회장께서는 필자가 개최하는 문화이벤트 때마다 기꺼이 후원을 자처하셨다. 한때는 서예에 입문하시어 일주일에 한 번은 만나 필묵을 논했으며 전시도 함께 치렀다. 이런 인연이 있어 필자는 아호 홍사(洪史) 두 자를 작호하게 되었다.
여기서 잠시 洪史라는 아호의 작호 배경을
밝히겠다. 홍사 두 자는 태어난 곳을 배경으로 삼아 지은 소처이호(所處以號)다. 필자는 작호하기 전 그가 홍성 출신이니 마땅히 홍성의 지리와
역사, 그리고 문화와 인물을 찾아보게 되었다. 놀라운 것은
홍성 출신 역사 속 인물들이었다. 고려의 명장 최영, 사육신
성삼문, 고승이자 불멸의 시인으로 조국을 위해 헌신한 만해 한용운, 청산리
전투를 승리로 이끈 독립운동가 김좌진 장군, 근대 한국을 대표하는 화가 이응노 선생 등 그야말로 화려했다.
어찌 洪을 차용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문자적 해석의 홍은 우리가 두루 아는 宇宙洪荒(우주홍황)의 넓다, 크다는 의미다. 사(史) 또한 주지하는 바와 같다. 사기와 역사요. 사관을 의미하며 문인을 지칭하기도 한다. 쉽게 말해 홍성의 새로운 역사가 되시라는 의미의 작호였다. 이미 역사가 되고 계시기에.
“김 회장과 교류한 지 30년이에요. 근데 나는 그가 화내거나 급하게 서두르는 것을 본 적이 없어요. 한마디로 외유내강 형이죠. 누구도 폄하하고 차별하지 않는 것도 특징입니다. 다른 사람의 말을 경청하기 좋아하는데 말을 할 때나 들을 때나 옆에서 보면 그가 늘 주인공이란 생각이 들지요. 그가 가진 기운이 아닐까 하는데 흥미롭고 부러운 부분이죠.”
20 수년 경제인 친목 모임 ‘백두회’를 함께 한 인도네시아 한인 원로 한 분의 말씀이다. 홍사 회장께서 외유내강에 실천력이 남다른 분임을 주변에서 두루 인정한다. 자료를 소중히 하고 일기 쓰듯 글과 영상으로 남기는 것은 지금까지도 습관에 가깝다는 것이 이번 프로젝트 진행으로도 잘 드러났다. 덕분에 필자의 이 정리는 풍성한 자료와의 놀이였다. 누구라도 그에게 묻기를 즐겼으면 좋겠다. 얻을 것이 많으리니.
나눔의 대가 홍사 김우재 회장
“독실한 천주교 신자인 그는 사회공헌활동(CSR)에도 적극적이다.”
홍사 회장을 인터뷰한 한 미디어의 평가다. 홍사 회장께서도 인도네시아 46년을 돌아보며 <자카르타 한인성당>과 관련된 일들을 두 번째로 꼽았다.
“아내 젬마가 신앙인으로서 하고자 하는 일을 돕다보니 저도 세례 교인(세례 1985년)이 되었지요. 제 신앙이 독실하다고 할 순 없어요. 다만 제 좌우명이 ”自利利他(자리리타)로 남들 돕는 것이 나를 돕는 것“으로서 제 나눔의 시작과 활발한 전개가 천주교 신앙의 기반 위에서 이뤄졌다는 것은 확실합니다.”
이 대목에서 다시 등장할 수밖에 없는 책이 홍사 회장의 회고록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다.
바로 거기에 봉사, 그러니까 그가 얼마나 다양하고 지속적인 나눔을 펼치는지 비교적 상세히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특히 이슬람 대국 인도네시아 수도 자카르타에 한인성당이 위용을 갖추기까지 태동부터
지금까지, 그와 젬마 여사의 가톨릭을 위한 봉사가 세세히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실질적 도움을 주신 수도자들과 교민 교우들의 활약이 드라마처럼 전개되어 있는 책이므로.
한 예로 앞에서 들춘 폭동 사태 때다. 갖은 노력과 공을 들여 부임하신 김성규 안드레아
신부님이 이슬람 대국의 민중 소동으로 어려움에 직면했다. 그는 신부님 신변에 위험이 닥치지 않도록 또
활동에 지장이 없도록 신속한 조치를 취했다. 평소 가꿔온 네트워크가 그 순간에 역시 빛을 발한 것이다.
▲김수환 추기경의 친필이 담긴 성탄 카드
지난 일들은 지나고 보면 모두 작은 일들 같다. 하지만 당시는 결코 작지 않았던 일들이다. 그 모든 지난 일들은 바로 오늘의 바탕이다. 정부의 손길이 미치지 못하는 일을 현지 민간인이 해결하기도 하다. 필자가 앞의 책을 들추는 것은 모든 것을 책 속의 기록보다 잘 전달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가 복으로 여기는 훌륭한 신부님들과 수녀님, 교우들과 조화로 일궈낸 성과들을 책처럼 감동적으로 전달할 수 없기 때문이다.
홍사 회장께서는 한국과 인도네시아 한센인촌을 방문하여 그들의 손을 잡아주고 도움을 주었다. 정기적으로 양로원을 찾아가고, 무궁화심장병재단을 통해 계속해서 심장병 어린이 수술을 지원하며, 아내의 모교를 포함 여기저기 장학금 지원을 지속하고 있다. 그리고 그 보람을 책 속에 남겼다. 오른 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기보다 나눔을 양지로 드러내서 사람들의 마음속에 나눔이 심어지도록 애쓴 것이다. 心不在焉 視而不見(심불재언 시이불견), 마음이 없으면 보아도 보이지 않는 것이 세상사 이치이니.
그가 70을
바라보며 쓰고 출간한 그의 시집 『무궁화 꽃 피고』의 시들을 음미해 보셨는가? 참 따뜻해서 좋다. 삶의 호흡들이 생생해서 아름답다. 효가 있고 아내와 슬하를 향한
사랑이 넘친다. 그의 나눔의 본령 신앙이 산같이 우뚝하고, 사회공헌이
산소처럼 노닌다. 여행지 곳곳, 하물며 골프장에서 우는 새의
이름도 불러내 생명력을 불어 넣는다.
대담 끝자락에서 홍사 회장께 경영철학을 여쭸다. 첫째도 둘째도 “휴머니즘이 바탕”이라
했다. 사람만이 희망이라는 의미겠다. 그리고는 ‘스스로 다스림’을 강조했다. 아울러
미국의 사업가 겸 시인 사무엘 울만이 쓴 시 <청춘〉 예찬하셨다.
“청춘이란 인생의 어떤 한 시기가 아니라/ 마음가짐을 뜻하나니…중략/ 청춘이란 두려움을 물리치는 용기,/ 안이함을 뿌리치는 모험심,/ 그 탁월한 정신력을 뜻하나니/ 때로는 스무 살 청년보다 예순 살
노인이 더 청춘일 수 있네.…중략/ 머리를 높이 들고 희망의
물결을 붙잡는 한,/ 그대는 여든 살이어도 늘 푸른 청춘이네.”
2017년 전시 때 홍사 회장께서 출품한 작품 중에 自强不息(자강불식)이 있다. “스스로 힘쓰고 쉬지 않는다.”는 뜻이다. 자신의 목표를 향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것을 의미하는 이 말, 그렇다 홍사 회장께서는 자신을 강하게 하기 위해 한시도 쉬지 않으셨던 것이다.
필자는 이 대담을 기념하기 위해 “自勝者强 敬天愛人(자승자강 경천애인)/ 자신을
이기고 강한 바탕을 갖춘 사람만이 진실로 하늘을 공경하고 다른 사람을 사랑하나니.”를 휘호했다. 놀라운 것은 각기 다른 두 사자성어의 조화다. 조합하고 보니 뜻이
너무 멋지고 깊다. 그리고 홍사 회장의 경영철학과 삶을 대변하는 말로 그야말로 맞춤이지 싶다.
▲“自勝者强 敬天愛人(자승자강 경천애인)
자신을 이기고 강한 바탕을 갖춘 사람만이 진실로 하늘을 공경하고 다른 사람을 사랑하나니.” 爲 洪史 金優載 法家 時 二千二十三 癸卯年 季春 山羅樓 北窓下 孫印齋
(홍사 김우재 법가를 위하여 이천이십삼 계묘년 3월 산나루 북창 아래서 손인재)
홍사 회장의 다복은 슬하의 가족관계로도 잘
드러난다. 1남 2녀가 모두 출중한 능력을 가졌고 훌륭한
짝을 만났다. 사돈댁도 사회적으로 누구하면 알만한 집안들이다. 게다가
7곱 명의 손자 손녀를 안겼으니 어찌 부러움의 대상이 아니랴. 홍사
회장께서는 이 뿌듯함 또한 책 속에 요모조모 잘 기록하셨는데, 부친과 할아버지의 정 넘치는 마음 표현
이 또한 특별한 교육 아니랴.
홍사 회장께서는 참 일군 것이 크고 많고
자취가 넓다. 기록까지 분명하다. 그의 지혜를 활용하는 것이야말로
금결이리라. 그리고 그것은 그의 몫이 아니라 바로 우리들의 몫이다. 다시
밝히거니와 이 대담과 자료 정리는 필자에게 큰 선물이었다. 홍사 회장의 뚝심과 청춘이 변함없을 것을
믿으며 기록을 마친다.
▲ 홍사 김우재 회장 부부와 아들 아들 김종헌 부부
※ 무궁화유통은 현재 아들인 김종헌(51) 대표에 의해 새로운 물결에 맞춰 새롭게 도약하고 있다. 김종헌 무궁화 유통 대표는 재인도네시아 한인회 수석부회장, 월드옥타 자카르타 지회장을 맡고 있으며 젊은 한상들의 모임인 영비즈니스리더네트워크(YBLN) 회원으로 눈부시게 활약하며 부친 홍사 회장의 뒤를 잇고 있다.
※ 이 글은 <인니 한인 성공 경영 기록하기> 두 번째입니다. 이 프로젝트는 재인니한인회가 주최하고, 재인니 한인상공회 KOCHAM이 주관하며 자카르타경제신문이 후원합니다. 예술가의 시각으로 탐문하고 기록하는 경영 현장과 경영인들의 창의력과 실천 능력, 다음 편을 기대해주시기 바랍니다.
이 경영탐문 내용은 You Tube 채널 <손작가
TV> 경영탐문 섹션에 업로드 됩니다. 많은 시청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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