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칼럼 [向人尋書 : 사람에게서 서예 찾기 2] 한판 뜨자! 공감과 이해 리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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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向人尋書 : 사람에게서 서예 찾기 2]
한판 뜨자! 공감과 이해 리그로
-(사)세계서예전북비엔날레 조직위원회와 (사)한국서예단체총연합회에 바란다.-
인재 손인식(서예가)
문제제기, 필(筆)어게인
부럽다. 부러우면 지는 거라는데 부럽고 부럽다. 음악
오디션 프로그램 ‘싱어게인’ 시리즈 시청 소감이다. 물론 필자는 외부자, 서예가로서 이 프로그램을 살핀다. 늘 드는 생각 하나, 그들은 그들의 리그를 참 잘 치른다. 그들의 이야기를 멋지게 아름답고 감동적으로 펼친다. 마침내 대중과
하나가 되고.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메이저 방송을 활용하는 힘이 부럽다. 기획하고 연출하며 이끄는
프로듀서의 능력이 함께 할 수 있으니 부럽다. 결과적으로 제작자나 참가자들을 두루 만족시킬 힘, 즉 자본이 모이니 부럽고 부럽다. 모인 힘은 그들의 리그를 더욱
강화시킨다. 마침내 이 프로그램은 무명으로 힘들던 가수들에게 유명 가수로 도약하는 발판이 된다. 인생 역전의 길을 열어 제친다.
필자가 음악 오디션 프로그램 ‘싱어게인’에 푹
빠진 이유는 단순하다. 대중이 참여할 영역 때문이다. 대중
참여, 왜 많은가? 무엇 때문에 대중은 ‘싱어게인’에 열광하는가? 필자의
판단으론 두루 공감할 수 있어서다. 즐겁고 또 위안 받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성공한 오디션 프로그램 안에 공감과 즐길 장치를 매우 영리하게 곳곳에 잘 배치한 때문이다.
결론부터 밝힌다. 한국서단도 실질적 대중 참여의 길을 활짝 열기 바라는 열망으로 이글을 쓴다. 서예 리그를 열자. 서예 리그는 서예가들이 열어야 하니까. 대중성, 이걸 가요와는 태생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모르고 하는 소리 아니다. 있는 소비자부터 관리 잘하자는 의미다. 서단의 존재감부터 키우자는 의미다.
뭔가 시도해보자. 세계서예전북비엔날레 운영위원회나 사)한국서예단체총연합회가 추켜든다면 좋을 것이다. 행동으로 보여줄 용기와 능력이 있다면 서단의 중소 단체인들 어떠리. 기획할 수 있고 진행할 수 있다면 누구라도 상관없다. 대중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들으며 가슴으로 이해할 수 있는 놀이를 펼치자.
이게 서단이 상생할 방법이다. 서예가들을 두루 유명하게 만들 이벤트다. 자칭 실력자들 이 기회에 다 모이자. 모든 서예가가 함께 설 무대를 만들자. 경쟁하되 자기 무대를 펼쳐 나갈 수 있게 하자. 경쟁하되 그 경쟁이 멋진 이벤트가 되게 하자. 공부한 것을 드러내되 다시 공부할 기회를 만들자. 대중의 안목을 높이면서 공감과 다양성을 창출해내자. 지금 필자 제안의 구체적인 내용이 필요하다면 언제라도 나름의 기획 안을 내겠다.
서예리그 주인공들 모두 나와라!
이에 필자는 지금부터 가요 경연 프로그램 ‘싱어게인’을 빗대 한국서단이 펼칠 놀이를 전제로 두고 세 가지를 간추리겠다.
첫째 선수다. 여기서 선수란 대한민국의 모든 서예가다. 다행스럽게도 한국서단엔 자원이 많다. 실력은 출중하나 단지 무명가수라는 자원이 ‘싱어게인’의 바탕이라면, 한국서단에도 나름 한가락 하는 자원 부지기수다. 자기의 절절한 사랑을 작품에 담을 수 있다면 그게 넘치는 참가 자격이다. 누구를 향한 간절한 그리움을 창작하는 작가라면 다 된다. 기쁨과 슬픔을 붓으로 펼칠 수 있다면 다 훌륭한 선수다.
‘싱어게인’ 참가자들은 선수로서 당연한 사실을 아주 은근히 드러낸다. 출중한 음악적 실력이다. 작곡은 밀쳐놓더라도 대다수가 편곡에 능하다. 공부 많이 했다는 증거를 그렇게 자연스럽고 자신만만하게 드러낸다. 경연 곡은 대다수 기존 가수의 노래를 들고 나온다. 그렇다고 해서 흉내 내는 게 아니다. 곡 해석이 다르다. 근데 그게 조금도 어색하지 않다. 마치 자기 옷을 입은 것처럼 자연스럽다. 서예가가 어느 한 고전을 임서했는데, 그 고전의 특징을 잘 살리면서도 자신의 창작성도 충분히 드러낸 것과 같다.
서예가들이야말로 붓을 잘 다루는 최고 능력자들임을
보여줄 기회를 만들어야 한다. 서예가의 붓놀림이란 현란한 것이 아니라 작가 의식을 선과 구성 표현으로
깊고 넓게 드러내는 것임을 실감나게 보여주어야 한다. 기술이 순수함을 꽃피우는 무기가 되고 정통성과
전통성을 아우른 개성으로 드러나는 차원을 펼치자. 작가마다 고유한 진정성을 형상으로 드러내는 거다.
시각예술은 시각에 비친다. 작가 의식과 노력, 쌓은 인문학 능력을 뽐내자. 어눌함이 뭉클함으로 사람들 가슴속으로 파고들게 하자. 그 난해함이 서예가들에게는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닌 것처럼 느긋하게 펼치자. 서예가들 몫이고 또 할 수 있다.
남들에게 멋져 보이려고, 시쳇말로 뭔가 좀 있어 보이려고 붓 잡은 사람 없지 않을 게다. 그러다가 진짜 좋아진 사람 많다. 암튼 내가 만족할 수 있으면 최고다. 다른 사람들의 공감을 이끌어내면 더할 나위 없다. 그 기회 누가 만들어주지 않는다. 만들어 줄 수도 없다. 하니 서단이 나서자. 참가자도 심사자도 그냥 서예가인 리그에 대중과 공감이 목적인 이벤트를 펼치자.
대중의 공감과 이해를 넓힐 절대 폭탄, 논평
두 번째 심사위원단의 논평이다. 싱어게인에 공감과 이해를 넓히는 가장 도드라지는
지대가 있다면 심사위원단이다. 논평을 위한 것도 가수를 위한 것도 아니다. 바로 대중이 음악을 공감하고 이해할 장치다. 음표처럼 생동하는 시공이
넓은 논평.
평론의 정수가 뭔가? 대중이 모르는 것을 평론가가 밝히는 것이 다가 아니다. 대중이 이해하는 것을 정리해주는 단순함도 아니다. 대중이 모르거나 미처 깨닫지 못한 차원을 두루 공감하고 이해할 수 있도록 매개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것이 특정 장르가 대중으로 지평을 넓히는 매우 중요한 계기라는 것은 주지의 사실.
심사위원이나 평가단이 있는 음악 프로그램은 가수의 노래만 듣고 그 진수를 잘 이해하지 못하는 필자 같은 대중에게 최적이다. 전문가들의 안목과 더불어 다시 들으면 그 가수의 역량이 더 분명하게 이해되니까. 그러니까 다소 모자란 이해력을 심사위원이나 평가단의 해석으로 감상의 폭을 넓히는 것, 이건 아주 평범한(?) 신의 한 수 아니랴.
서예, 눈으로 감상하는 시각예술이다. 공감과 이해를 넓히면, 귀로 듣고 감성을 기르는 음악보다 못할 것이 없다. 거기에 감춰진 뜻과 다양한 예술적 요소, 작가의 창작 세계를 스토리텔링 해주는 현장 논평이 필요하다. 누군가를 평가하는 일은 어렵다. 특히 작품의 잘함과 못함, 좋고 나쁨의 기준이란 것이 주관성에서 오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러 사람이 동일한 현장에서 각기 다르게 펼치는 쉬운 현장 논평이 필요하다. 납득이 될 만한 근거와 전문 지식으로 요목조목 심사평하는 것을 대중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배우고 싶도록 하자.
심사위원단은 다양할수록 좋다. 비 서예가도 있어야 한다.
아주 기초적이고 원초적인 질문으로 대중의 가려운 곳을 긁어준다면 그게 바로 히트 요소일 수 있다. 심사위원들
해석력이 넓을수록 참가자에게 도움이 되리라. 참가자들 다음 작품 창작에 도움이 될 금쪽같은 언사라면
얼마나 환호할 일인가. 공감하면 흡수력은 자동이다. 앞 무대의
평을 듣고 일취월장 다음 무대를 펼치는 싱어게인 가수들처럼, 단계마다 심사위원들과 참가자 또 대중을
감탄하게 할 작품 창작, 이 얼마나 꿈같은 일인가.
싱어게인 심사평을 듣고 있자면 존중이 느껴진다. 참가자들을 가르치려는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동업자 의식으로 대한다. 보기
좋다. 자신의 말이 정답이 아님을, 다를 수 있음을 인정한다. 때로 모호한 판정도 있다. 그도 나름 쉬어갈 구색이다. 세상은 흑과 백, 좋고 나쁨 같은 이분법으로 구분될 수 없으니. 지금은 별로여도 나중에 좋은 것이 있고 그 반대일 수도 있다. 하니
심사의 잣대가 시대적이고 개인적인 흐름임을 잘 활용하자.
어느 장르건 강호엔 숨은 실력자들 많다. 참가자가 심사자보다 나은 부분이 있을 수 있고 개성이 다르다는 의미다. 그러므로 심사, 참가자, 대중 모두에게 공감을 얻으면 이게 최고의 생명력 아닐까? 소년이 서예 명작을 창작할 수 없는 이유 다양할 수 있다. 서예가 깨달음이 필요한 예술이기 때문일까? 환경 탓이 크다. ‘묻지 말고 쓰라’던가 ‘쓰다보면 절로 알아진다’고 하는 구시대적 문화 탓도 있다. 그러니까 필기도구가 붓이었던 시절이 그 얼마인데 ‘시절인연’도 없다는 것이 좀 안타깝지 않은가. 열린 리그가 쌓이면 소년 명필 탄생도 기대할 수 있다는 것이 필자의 확신이다.
뜻이 있으면 거기에 솟는 방법론
자 어떤 모습의 이벤트여야 할지 그림이 암시되었다. 대중과 소통하며 공감을 얻기 위한 이벤트를
원한다면, 단순한 공모전이나 전시 등 이전의 방식으론 한계다. 대중과
함께하는 현장에서 창작이 이루어져야 한다. 대중이 함께 숨 쉬는 현장이어야 공감의 폭이 넓어진다. 싱어게인 진행 방식을 모델 삼아 서예 이벤트에 알맞게 구성한다면 좋을 것이다.
대중을 향해 공감과 이해를 넓히는데 선봉에 설 능력자들 많은데 왜 움츠리는가? 오늘 내일이라도 당장에 만들어야 한다. ‘서예가 대중성과는 거리가 먼 예술’이라는 서예인들 생각 이참에 몰아내자. 이 시대에 맞는 대중을 위한 리그다운 리그를 제대로 치러 보고 나서 말하자. 한 두 번은 아니 몇 번이고 뜻대로 안 될 수도 있다. 그건 실패가 아니다. 그 때문에 쌓일 자산이 얼마일지 기대가 크지 않은가. 서예, 한 때는 기록의 주체였고 역사와 문학의 중심이었으니. 동양 시각 예술의 뿌리요 줄기라는 태생적 유전자를 어느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니.
소요비용 핑계 앞세우지 말자. 대중이 공감하고 즐길 수 있으면 제정으로부터 외면당할 걱정 접어둬도 된다. 대중은 곧 소비자다. 대중의 소비는 전문 영역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그러니까 어떤 순수예술 장르도 나름의 효용성이 있고 그게 바로 대중성이니 이를 살려내면 된다. 분명한 것은 자본이 스스로 찾아올 수 있도록 펼치면 된다. 어찌 비용뿐이랴. 이글을 읽는 동도들 의문사항 수두룩할 것이다. 세부기획까지 써내자면 책 한권으로도 부족하다. 대의면 통천임을 믿자. 늘어놓고 밝히며 시시콜콜 따질 시기는 따로 있다는 의미다.
중요한 것이 이벤트를 다듬어낼 채널이겠다. 매우 다행스럽게도 채널이 다양화된 시대다. 만들어내기에 달렸고 만들어 낼 수 있다. 이미 서예 YouTube 채널 다수다, 도약할 기회 아니랴. 리그 당사자들 모두 주인의식으로 모두 마케터가 된다면 승부는 간단하다.
오직 서예가들의 리그를 대중이 함께 즐기고 소비하는 리그를 만들겠다는 의지만
있으면 된다. 필자 또한 가능한 역할 즐겁게 하겠다. 대중의
감성에 잘 부합하면 영리한 대중이 더 공감하고 마침내 즐겁게 활용하리라. 대중이 활용하는 단계에 들어서면
승부는 끝난 거 아닐까?
끝으로 바라는 것은 필자의 제안을 한방에 뭉개도 좋을 아이디어 속출이다. 비평과 함께 현실성을
살린 대안이 들끓기를 기대한다.
※ 이 글은 한국의 월간 <서예 문인화> 2월에 실린 원고입니다.
위 영상은 2021년 2월 필자 유튜브 체널에 업로드한 <서예 심사, 싱어게인에서 배워야>의 영상이다. 당시는 ‘싱어게인’인 시즌 1이 진행 중이었고, 지금은 시즌3가 진행 중이다. 그런데 시청 느낌이 그때나 지금이나 같은 것에 필자 스스로도 놀라 다시 이 제언의 글을 쓴다. 글과 영상을 통해 공감할 동도들이 많기를 바란다. 또 함께 할 마당이 펼쳐질 것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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