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칼럼 솔루션 장사와 멋진 코치 차이- 질문 먼저 코칭은 다음, 선택은 자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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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루션 장사와 멋진 코치 차이
‘예술이 밥 먹여 주냐?’ 이런 우스갯소리가 엄연히 존재한다. 어쩌면 예술을 갈망하는 이들이 역설적으로 내뱉는 날숨일 수 있겠는데, 암튼 예술이 우리 인생에 어떤 도움을 주는지에 대해 성찰이 부족한 말인 것 만은 분명하다.
예술에 관해 누구에게도 부담을 주지 않을 좋을 정의가 있다. “예술은 공부하기 위한 존재가 아니라 느낌의 대상”이란 말이다. 『나는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의 경비원이었다』라는 책을 쓴 패트릭 브링글리(Patrick Bringley)의 정의다.
그러니까 앞의 ‘예술이 밥 먹여 주냐?’라는 말은 예술을 사치로 여기는 사람들의 정서임을 알 수 있다. 창작을 여가 활동 정도로 치부하는 부류의 편견임이 이해된다. 하긴 죽기 살기로 예술에 빠진 작가들 누가 이해해달라고 그리하는 것 아니다. 떼거리가 없을 정도로 가난한 중에도 예술 일념을 불태운 사람들, 죽음과 맞서면서도 예술을 고집한 작가들의 공과 시간과 에너지, 누가 알아달라고 투자하는 것 아니다.
기본의 아이러니
필자의 youtube 체널에서 논란이 많은 영상 (https://youtu.be/AD91coIYcUE?feature=shared)이
있다.
지난 1년여 간 가장 시청이 많았던 영상으로 「서예는 배우는 것이 아닙니다」란 영상이다. “무조건 따라 쓰지 말자. 배워서 된다면 지금 한국 서단에 명필과 좋은 작품이 즐비해야 할 것 아니냐.” 그러므로 “처음 시작부터 창작을 생각하자. 창작을 생각하며 기본을 배워야 선하나 긋는 중에도 반드시 자기 느낌이 살아난다. 그것이 제대로 된 공부다. 그런 공부라면 좋은 창작이 멀지 않다.”는 등 나름의 코칭이 주된 내용이다. ‘잘 이해했다.’ ‘새롭게 시작하겠다.’는 분들도 있었고 간혹 이해 못하겠다는 분들도 있었다.
암튼 필자는 그 영상에서 기본은 창작을 위해 있는 것이고 훌륭한 창작 속에는 반드시 기본이 살아있다고 강조했다. 기본을 제대로 익혀야하는 이유는 너무도 분명하다. 창작하기 위해 기본을 익힌다. 따라만 쓰려고 흉내 내려고 고전을 배우지 않는다. 그러니까 기본이 창작이고 진정한 창작이란 기본을 잃지 않은 것이란 원칙을 놓지 않는 게 중요하다. 기본을 잘 구사하는 작가가 일부러 형편없는 창작을 할 리 없지 않은가.
누구나 오래 수련하면 능숙할 수는 있다. 다만 능숙한 것은 전통과 정통을 꿰뚫은 것과는 다르다. 품격이 뭔가? 기본을 잘 닦은 후에 닿게 되는, 이른바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세계다. 이치를 바르게 갈고 닦은 데서 드러나는 격조 말이다. 아무리 능숙한 것이나 기발한 것도 기본이 부족하면 능숙한 것이나 기발한 것에 그치고 만다. 품격을 잃으면 가치 또한 잃는다는 말이다.
기본이 부족하여 품격이 낮은 작품은 문외한들에게 감탄의 대상이 될 수 있을지언정 안목 높은 전문가들에겐 인정받지 못한다. 예컨대 다수의 심사위원이 공감해야 뽑히는 공모전에 이런 작품을 출품하면 낙선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품격을 갖춘 작품은 누군가가 반드시 들춘다. 능력과 안목, 그리고 양심을 숨기지 않은 심사위원들이 있을 테니까.
그런데 더러 기본이 부족한 작품이 상에 오르는
경우 있다. 이야말로 사람 사는 사회의 한 단면일까? 아니
공모전의 특성이자 폐해일까? 이런 폐단 어느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는 것 아니다. 그래서 천인지낙낙 불여일사지악악(千人之諾諾 不如一士之諤諤)이다.
전통과 정통
서예 학습에서 매우 중요시하는 전통(傳統)과 정통(正統) 모르는 작가 없을 거다. 이 두 가지를 바로 이해하는 것이 정말 중요한 기본이니. 전통이 뭔가? 글자그대로 역사적 계통이다. 사전은 ‘어떤 계통이 전해 내려오는 사상 · 관습 · 행동 등의 양식’이 전통이라고 밝힌다. '정통(正統)'도 분석해보자. 그야말로 바른 계통이다. 반드시 익혀야 할 기본이라는 거다. 하니 정통적이지 못하면 전통으로 남지 않는다. 전통으로 남은 것은 반드시 정통하다. 전통과 정통은 떼려야 뗄 수 없다. 둘 중 하나라도 부족하면 자연도태하고 만다.
음식점끼리 서로 원조라고 다툼하는 경우 많이 본다. 서로 전통과 정통 두 가지를 다 갖췄다고 서로 주장하는 거다. 작가가 자신의 창작에 관해 확신을 갖지 못한다면, 답은 바로 자기에게 있다. 정통과 전통을 깊게 공부하지 않았다는 증거다.
정통과 전통의 실체가 바로 고전이다. 세월이 흘러도 인정받는 역사이고 핵심인 고전들. 좋은 고전은 바른 필법과 구성법을 갖췄고 거기에 독특한 개성까지 갖췄다, 그런
고전에는 시대성과 그 작자의 깨우침이 살아 있다. 예술의 본질을 잘 갖췄으니 두루 인정받을 수밖에. 유일한 존재이니 세월이 흘러도 인정받는 영원한 현대일 수밖에.
흥미로운 것은 이 특수한 최고봉의 고전을 우리는 처음부터 공부의 기본으로 삼는다는 점이다. 영원한 현대들을 처음 학습시기부터 익힐 수 있음은 그야말로 역사가 주는 특혜다. 그래서 알아야 한다. 진정으로 특별하기 때문에 모두가 배워야 할 보편이 된다는 것을. 특별한 것이 보편으로 변환하는 과정을 잘 이해해야 한다. 이야말로 창작의 첩경이니.
임서(臨書)란 두 글자
서예에서 뼈대는 정통과 전통이다. 이름 붙여 기본이다. 공부의
대상인 전통 고전들은 그 고전이 탄생한 시대나 그것을 쓴 개인의 신경과 근육, 그리고 살을 잘 갖춤으로써
뼈대가 된 것들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자기 창작이란 뭘까? 정통과 전통이란 뼈대에 자기의 정신에 근육과 살을 붙인 것이다. 특별한 것이 보편이 된 그 뼈대에 자기의식을 심는 것이다.
일방적으로 따라 쓰는 것은 임서의 몰이해다. 그래서 필자는 처음 한 획부터 자기의식이 살아있어야 한다는 강조했다. 자기 창작을 해내기까지 오랜 시간을 허비하지 않는 것, 정작 자기 창작 문턱에도 못 가는 안타까움을 전한 것이 앞에 소개한 영상이었는데, 시비조의 댓글이나 무식한 사람 취급하는 댓글도 있었다. 물론 영상을 끝까지 시청했다면 그런 댓글은 달리지 않았을 것이라 확신한다.
악플, 이해한다. 컨설팅과 코칭을 이해하지 못한 데서 생겨난 오해니까. 마치 선생에게서 방법, 즉 솔루션을 사려는 사람들의 잘못된 판단이니까. 진정한 공부는 코칭을 받기 위해 질문을 하는 것이다. 자기가 나아가는 길에서 생기는 의문을 소통으로서 풀어내는 것이다. 선생의 역할은 앞서간 사람으로서 상대방이 나아가는 길의 응원자다. 솔루션을 파는 사람이 아니라 상대방의 기질에 알맞은 최선의 코칭을 하는 거다. 그래서 솔루션(방법)과 코칭(안내자의 의견제시) 사이의 이해가 서로에게 중요하다. 물론 최종 선택은 자유다.
코칭에는 반드시 질문이 필요하다. 질문이 뭔가? 원하는 방향, 나아가는 방향에 관한 공부다. 공부해야 제대로 된 질문을 할 수 있으니 질문이야말로 최고의 공부다. 그러므로 자기 진단이야말로 참다운 공부다.
지금 자신이 기본을 옳게 공부하고 있는지 늘 스스로 진단해야 한다. 기초 획 하나 썼더라도 스스로 살펴보는 거다. 닮게 썼느냐가 아니라 원하는 느낌, 자기가 표현하려고 했던 느낌이 살아났는가를 살펴야 한다. 어떤 고전의 형식을 빌리더라도 그 고전을 통해 자기가 추구한 느낌, 또는 그 고전을 통해 얻은 미감을 자기 식으로 잘 구현했는가를 살핀다면 정말 성공적인 창작이 될 것이다. 서두의 페트릭 브링글리의 ‘예술은 느낌’이란 말 상기하면서.
마치는 말
자기느낌을 잘 살려 냈다면 그건 창작이다. 고전이나 선생의 체본을 참고했더라도 상관없다. 자기의식이 살아있는데 그것이 창작이 아니면 무엇이 창작이란 말인가? 수십 년을 공부했는데 제대로 된 창작을 못하는 것은 분명 폐단이다. 그래서 기본과 창작이 하나라는 것과 임서의 개념을 잘 이해해야 한다. 결과가 달라질 것이다. 기본과 창작이 다르다는 생각, 임서를 형임이 전부인 것처럼 생각하는 것이 바른 공부의 가장 큰 저해요소다.
최근 한 학자의 ‘감정코칭’이란 심리 이론에
관심을 가졌었다. 예컨대 누군가 어떤 문제적 행동을 하면 그 행동만을 보지 말고 그 행동을 일으킨 감정을
살피라는 이론이다. 매우 공감했다. 필자의 창작 이론과 찰싹
맞닿았기 때문이다. 감상과도 직결이다. 감상도 창작이라지
않은가. 곱게 다듬어진 선이나 균형 갖춰진 구성 정도만 관심을 두는 것은 참다운 감상이 아니다. 작품에서 작가의 감정을 파악해 내야 한다. 감상 자체가 정서를 깨우는
창작이 되도록. 창작은 한 작가가 했지만 감성 공유와 교류는 다수의 대중과 이루어지도록. 우리의 삶은 날마다 창작이다.
※ 본고는 한국의 월간지 《서예 문인화》 8월호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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