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칼럼 자바에서 시를 읽다 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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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인숙의 독서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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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의 가능성
시.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영화를 더 좋아한다.
고양이를 더 좋아한다.
바르타 강가의 떡갈나무를 더 좋아한다.
도스토옙스키보다 디킨스를 더 좋아한다.
인간을 좋아하는 자신보다
인간다움 그 자체를 사랑하는 나 자신을 더 좋아한다.
초록색을 더 좋아한다.
모든 잘못은 이성이나 논리에 있다고
단언하지 않는 편을 더 좋아한다.
예외적인 것들을 더 좋아한다.
집을 일찍 나서는 것을 더 좋아한다.
의사들과 병이 아닌 다른 일에 관해서 이야기 나누는 것을 더 좋아한다.
줄무늬의 오래된 도안을 더 좋아한다.
시를 안 쓰고 웃음거리가 되는 것보다
시를 써서 웃음거리가 되는 편을 더 좋아한다.
명확하지 않은 기념일에 집착하는 것보다
하루하루를 기념일처럼 소중히 챙기는 것을 더 좋아한다.
나에게 아무것도 섣불리 약속하지 않는
도덕군자들을 더 좋아한다.
지나치게 쉽게 믿는 것보다 영리한 선량함을 더 좋아한다.
정복하는 나라보다 정복당한 나라를 더 좋아한다.
만일에 대비하여 뭔가를 비축해 놓는 것을 더 좋아한다.
신문의 제1면보다 그림형제의 동화를 더 좋아한다.
잎이 없는 꽃보다 꽃이 없는 잎을 더 좋아한다.
품종이 우수한 개보다 길들지 않은 똥개를 더 좋아한다.
내 눈이 짙은 색이므로 밝은 색 눈동자를 더 좋아한다.
책상서랍들을 더 좋아한다.
여기에 열거하지 않은 많은 것들을
마찬가지로 여기에 열거하지 않은 다른 많은 것들보다 더 좋아한다.
숫자의 대열에 합류하지 않은
자유로운 제로(0)를 더 좋아한다.
기나긴 별들의 시간보다 하루살이 풀벌레의 시간을 더 좋아한다.
불운을 떨치기 위해 나무를 두드리는 것을 더 좋아한다.
존재, 그 자체가 당위성을 지니고 있다는
일말의 가능성에 주목하는 것을 더 좋아한다.
출처: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시선집 <끝과 시작> / 문학과지성
NOTE *************
언젠가 쉼보르스카가 쓴 글 중에서 '시인 자신을 제외하면 천 명 중에 두 명 정도밖에 시를 좋아하지 않는다' 라는 글을 본 적이 있다. 어쩌면 맞는 말이다. 요즈음은 시를 쓰는 시인들만 시를 읽는다고 푸념을 늘어놓던 시인을 만난 적도 있다. 그러나 정작 쉼보르스카는 오늘날 폴란드 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가장 사랑받는 시인 중의 한 명이다. 일상적이고 이해하기 쉬운 단어들로 누가 읽어도 고개를 절로 끄덕이게 하는 공감의 시를 썼기 때문이다. 나는 그녀가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열거한 이 시가 참으로 사랑스럽다. 왜 그녀가 세계인이 사랑하는 시인이 됐는지 알 것 같다. 나도 그녀를 따라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선택해 써 본다. 날마다 무언가를 선택하면서 살지만, 늘 좋아하는 것들을 떠올리는 것보다 좋아하지 않는 것들을 하지 않는 것에만 애를 썼다. 참 바보같았다. 이제 좋아하는 것들을 더 많이 선택하면서 행복해져야 겠다. 그리고 비밀인데, 내가 좋아하는 것들과 그녀가 좋아하는 것들이 무려 16가지나 일치한다.
채인숙/ 시인. 2015년 <실천문학> 오장환 신인문학상을 받으며 등단했다. 카피라이터, 라디오 작가, 다큐멘터리 작가로 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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