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칼럼 자바에서 시를 읽다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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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인숙의 독서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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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속의 나그네
시, 헤르만 헤세
밤 자정에 시계 하나 산골에 울립니다
달이 차디차게 헐벗고 하늘을 헤매입니다
길가에, 눈과 달빛 속에
나는 나의 그림자와 홀로 걸어갑니다
얼마나 많은 푸른 봄 길을 걸었던지
얼마나 많은 타오르는 여름 해를 보았던지
발걸음은 피로하고 머리는 희끗해졌습니다
내가 전에 어떠했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피곤하고 갸날픈 나의 그림자가 걸음을 멈춥니다
어느 때 나의 나그네 길도 끝날 것입니다
화려한 세상으로 나를 끌어들인 꿈도
나에게서 사라집니다
꿈이 나를 속인 것을 이제 나는 압니다
(시의 미소 – 민음사 세계시인선 중에서)
NOTE **********
추석이 다가온다니 엉뚱하게도 헤세의 시가 떠올랐다. 낮에 한국에 계신 아버지와 나눈 통화 때문일 것이다. 한 해가 멀다하고 친구들이 저 세상으로 떠난다고, 기력이 남아있는 서넛이 모였어도 소주 한 병을 겨우 비울까 말까 한다고 하셨다. 명절이 한번 지날 때마다 아버지의 발걸음은 피로해지고 머리는 더 희끗하다.
친구들이 모두 떠나고 나면 아버지가 어린 시절에 어떤 악동이었는지 아무도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추석마다 모여서 시끌벅적하게 골목을 뛰어다니던 그 시간들을 아무도 상기시켜 주지 않을 것이다. 아버지는 그 사실이 서러운 걸까…? 화려했던 젊은 날의 꿈은 사라졌고, 그 꿈이 당신을 속였다는 것도 이제는 다 아실테지. 아마 고개를 끄덕이고 계실 것이다.
그래도 올 추석에는 아버지의 호탕한 청년 시절을 기억하는 친구들이 건강하게 다 모이셨으면 좋겠다. 우리의 인생은 그저 나그네의 길일 뿐이라고 시를 썼지만, 또 헤세는 우리에게 영원한 청년 <데미안>을 보여주지 않았던가. 그토록 푸른 봄 길을 함께 걸었고, 타오르는 여름 해를 함께 보았던 아버지의 데미안 시절을 기억해 주는 친구들이 오래 함께 곁에 계시기를 기도해 본다.
채인숙/ 시인. 2015년 <실천문학> 오장환 신인문학상을 받으며 등단했다. 라디오와 다큐멘터리 작가로 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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