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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칼럼 자바에서 시를 읽다 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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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인숙의 독서노트
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5,836회 작성일 2018-01-0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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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진주사(將進酒辭)
                               
 
   시, 성선경
 
살구꽃 피면 한 잔 하고
복숭아꽃 피면 한 잔 하고
애잔하기가 첫사랑 옷자락 같은 진달래 피면 한 잔 하고
명자꽃 피면 이사 간 앞집 명자 생각난다고 한 잔 하고
세모시 적삼에 연적 같은 저 젖 봐라
목련이 핀다고 한 잔 하고 진다고 하고
삼백예순날의 기다림 끝에 영랑의 모란이 진다고 한 잔 하고
남도의 뱃사공 입맛에 도다리 맛 들면 한 잔 하고
봄 다 갔다고 한 잔 하고 여름 온다 한 잔 하고
초복 다름 한다고 한 잔 하고 삼복 지난다고 한 잔 하고
국화꽃 피면 한 잔 하고
기울고 스러짐이 제 마음 같다고 한가위 달 보고 한 잔 하고
단풍 보러 간다고 한 잔 하고
개천은 개벽이라 하늘 열린다고 한 잔 하고
입동 소설에 첫눈 온다고 한 잔 하고
아직도 나는 젊다고 한 잔 하고
아랫목에 뒹굴다 옛시를 읽으며 한 잔 하고
신명 대접한다고 한 잔 하고
나이 한 살 더 먹었다고 한 잔 하고 또 한 잔 하고 그런데
그런데 우리 이렇게 상갓집에서나 만나야 쓰겠냐고
선배님께 꾸중 들으며 한 잔 하고
아직도 꽃 보면 반갑고
잔 잡으니 웃음 난다고
반 너머 기울어진 절름발이 하현달.
 
출처: 치인의 숲과 바람의 씨눈 (고려대학교 출판부)
 
NOTE***************************
<장진주사>는 원래 우리 나라 최초의 사설시조로 알려진 정철의 시조 제목이다. ‘한 잔 먹세 그려 또 한 잔 먹세 그려 꽃을 꺾어 술잔 수를 세면서 한없이 먹세 그려…’로 시작되는 정철의 시조에서도 죽으면 무덤 위에 앉아 술 한 잔 먹자고 할 사람이 없을 것이니 꽃 꺾어 술잔 수를 세어가며 무진장 먹자고 한다. 성선경의 시도 못지 않다. 시에는 살구꽃 피는 봄부터 입동 소설에 아랫목을 뒹굴 때까지 날마다 한 잔 마셔야 할 이유가 넘치고 넘친다.
 
시인이 행마다 적어놓은 음주의 정당성을 읽노라니 절로 웃음이 난다. 정철은 인생 무상함을 술로 달래보자고 노래했는데, 성선경 시인의 시에선 마치 술 마시기 위해서 계절이 바뀌고 너나없이 절름발이 인생을 사는 듯 하다. 하지만 이 시는 아마도 스승의 정년퇴임을 맞아 헌사한 시인 듯하니 함께 축복의 잔을 들자는 뜻이 포함돼 있을 것이다. 언젠가 유쾌하고 좋은 술자리가 있으면 이 시를 낭송해 봐야겠다는 생각도 든다. 그나저나 곧 음력 하순이니 하현달이 뜨는 밤이 오겠다. 그 밤에는 옛 시를 읽는 대신 성선경의 시집을 펴놓고 한 잔 해야지.
 
채인숙/ 시인. 2015년 <실천문학> 오장환 신인문학상을 받으며 등단했다. 라디오와 다큐멘터리 작가로 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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