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니오 크뢰거– 토마스 만 (민음사) > 전문가 칼럼

본문 바로가기

팝업레이어 알림

팝업레이어 알림이 없습니다.
사이트 내 전체검색

전문가 칼럼 토니오 크뢰거– 토마스 만 (민음사)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채인숙의 독서노트
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9,750회 작성일 2017-03-17 00:00

본문

나는 두 세계 사이에 서 있습니다. 그래서 어느 세계에도 안주할 수 없습니다. 그 결과 약간 견디기가 어렵지요. 당신들 예술가들은 저를 시민이라 부르고, 또 시민들은 나를 체포하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됩니다. 이 둘 중 어느 쪽이 더 나의 마음에 쓰라린 모욕감을 주는지 모르겠습니다. 시민들은 어리석습니다. 그러나 나를 가리켜 냉정하다거나 동경이 없다고 말하는 당신들 미의 숭배자들이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이 세상에는 애초부터, 운명적으로 타고난 모종의 예술가 기질도 존재한다는 사실입니다. 그 어떤 동경보다도 일상성의 환희에 대한 동경을 가장 달콤하고 가장 느낄 만한 동경으로 여기는 그런 심각한 예술가 기질 말입니다.
 
 
NOTE
 
존경하는 선배가 말했다. “고전을 읽는 것은 초월을 경험하는 것이다.” 백프로 동감한다. 단언컨대 지금껏 나를 키워 주고 밥 먹여 준 힘의 팔 할은 고전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 무한하고 유장한 고전의 세계 속에서 나는 언제나 황홀하고 행복했다. 책을 펼칠 때마다 영혼이 흔들리고 심장이 달콤하게 달아올랐다.
 
사춘기 아들과의 갈등을 끝내준 것도 고전이었다. 아들과 나는 알베르 까뮈와 헤르만 헤세를 같이 읽었고 에밀 시오랑을 함께 좋아한다는 사실을 발견하면서, 갈등하는 부모와 자식이 아니라  고전과 철학을 함께 읽는 동지가 되었다. 아들의 책상에는 까뮈의 모든 소설과 에세이가 학교 교재보다 더 가까운 곳에 널부러져 있다. 나는 그 풍경이 낯익고 유쾌하다. 옛날 내 책상의 풍경을 다시 보는 듯한 묘한 흐뭇함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아무튼 세월이 물같이 흘러서 중년의 모습을 한 그 선배와 나는 서점에서 다시 만났다. 선배는 학교 다닐 적에도 김수영 시집이나 일본시선집 같은 책들을 느닷없이 사 안겨주곤 했었는데, 이번에도 책 한 권을 골라서 선물해 주었다. 토마스 만의 소설집 <토니오 크뢰거>였다. 오래 전에 이미 읽은 책이었지만 나는 아무 말 않고 그 책을 선뜻 받았다. 다시 읽고 싶었기 때문이다.
 
독일의 소설가 토마스 만의 '토니오 크뢰거(Tonio Kröger)'는 성장 소설이라고 볼 수 있다. 책에 등장하는 토니오는 토마스 만의 자화상이다. 엄격하고 근엄한 독일인 영사(領事) 아버지와 남유럽 출신의 정열적이고 음악을 사랑하는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토니오 크뢰거는 아주 어려서부터 두 가지의 상반된 삶의 모습을 두고 갈등을 겪는다. 그는 금발의 동급생 한스 한젠을 좋아하는데 한스는 명랑하고 건강하고 밝고 씩씩하며 공부도 잘하는 친구다. 그리고 또 한 사람, 아름다운 금발의 잉에보르크 홀름이 있다.
 
평범한 시민의 아들이면서 동시에 예술가로서의 숙명을 안고 태어난 토니오는 끊임없이 예술가로서의 자기 존재에 대해 고민하고 갈등하며 회의한다. 문학을 사랑하지 않는다해도 그저 올바르고 순박하며 규칙적으로 살아가는 선한 사람들, 바로 한스와 같은 건강한 시민의 삶을 꿈꾸지만, 그는 천성적으로 예술가의 숙명을 안고 태어난 사람이었다. “문학은 천직이 아니라 저주”라고 읊조리면서 글을 쓴다.  
 
토니오가 동경한 한스는 드러난 자기의 모습과 삶이 일치하는 사람이다. 어떤 깊은 고민과 의식이 없이도 건강한 삶을 산다. 그러나 토니오는 천성적으로 분열된 세계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이다. 책 말미에 토니오가 소설가로 성공하고 고향에 돌아왔을 때, 무도회에서 춤추고 있는 한스와 잉게보르크를 만나는 장면이 나온다. 여전히 아름다운 금발을 하고 당당하게 춤울 추는 그들을 숨어서 보며 ‘잉에보르크 홀름 너를 아내로 삼고, 한스 한젠 너와 같은 아들을 두고 싶구나’ 라고 생각하는 토니오를 보며 짠한 공감과 함께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것도 그런 까닭이다.
 
그러나 평범한 일상을 사는 소시민이건 예술가이건 인간은 모두가 혼란스럽고 불완전한 존재가 아니던가. 예술가 흉내를 내며 살 것인가, 시민으로 살 것인가를 고민하던 시간이 나에게도 있었다. 세상을 주시하면서 삶을 관찰하는 작가가 될 운명을 감지하고 "내가 사랑하는 저 사람들은 건너편 해안에서 인생을 즐기면서 사는구나. 그러나 나는 저 세계에 갈 수 없어"라고 생각했던 토마스 만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할 만한 갈등의 시간을 지나왔다. 나는 토니오의 세계에 속한 사람이라고 스스로를 분류했던 것이다.
 
시민의 세계와 예술가의 세계. 두 세계 어디에도 안주하지 못했던 토마스 만은 그 사이에서 불안하게 서성거리며 토니오 크뢰거를 썼다. 그러나 나는 그 지점의 긴장과 불안과 갈등이 그의 문학을 위대하게 만들었으리라 믿는다. 토니오의 말처럼, 그저 한 문사를 진정한 시인으로 만들 수 있는 그 무엇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인간적인 것, 생동하는 것, 일상적인 것에 대한 시민적 사랑 때문이 아니던가. 눈을 감고 아직 태어나지 않은, 그림자처럼 어른거리는 한 세계를 들여다 보고 그 세계에 질서와 형상을 부여해 내는 것. 그것이 예술가의 숙명이다. 토니오 크뢰거는 스스로가 비인간적이라고 여겼던 예술가가 되어 그 시민적 일상의 인간적 위대함을 마침내 써내려 간 것이다.
 
 
글쓴이: 채인숙 / 2015년, <실천문학> 오장환 신인문학상을 받으며 등단했다. 카피라이터, 라디오작가, 방송 다큐멘터리 작가로 일했다.
추천0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Copyright © PT. Inko Sinar Media.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