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바에서 시를 읽다 ② > 전문가 칼럼

본문 바로가기

팝업레이어 알림

팝업레이어 알림이 없습니다.
사이트 내 전체검색

전문가 칼럼 자바에서 시를 읽다 ②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채인숙의 독서노트
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7,643회 작성일 2017-04-13 00:00

본문

당신은 꽝입니다
 
시. 김연숙
 
 
그 여자 태어났을 때
온 식구 허탈해서 누워버렸죠
꽝 뽑았다고, 딸이었다고
빈 동그라미 안에서
꽝 아기 쌔근쌔근 자고 있었죠
 
다섯 살 무렵부터
온몸으로 태가 흐르더라는
아주 일품이라는 그렇고 그런 얘기들
아홉 살 때 얻어 읽은 폭풍의 언덕
귓가에 먹먹한 그 폭풍에 사로잡혀
속편을 쓰고 또 쓰고
끝내, 그 여자의 연애는 꽝이었다죠
 
전생을 보고
머리 위의 후광도 볼 수 있다던
웬 도인이 말했었대요
당신의 오라는 흰빛이군요
 
생은 당연히 흰빛
지금 그 여자 머리 위를 한번 보세요
 
눈부신 꽝입니다
 
 
***** 지금으로 부터 거의 60여 년 전쯤의 이야기입니다. 여자는 자신이 원하지도 않았는데 여자로 태어났다는 이유로 온 가족에게 자신도 모르는 실망을 안겨줍니다. 가족들에게 그녀의 탄생은 한 마디로 “꽝”입니다. 여자는 무럭무럭 자라나 다섯 살 무렵부터 귀태가 흐른다는 주변의 칭찬을 듣습니다. 아홉 살에 폭풍의 언덕을 읽고 남몰래 소설을 씁니다. 연애는 언제나 꽝이었지만, 그래도 결혼을 하고 아이를 기르고 기품을 잃지 않으려 애쓰며 늙어갑니다. 도를 닦은 것도 아닌데, 하얗게 세어가는 자신의 머리카락을 보며 생은 흰빛의 오라를 만드는 일이란 것도 깨닫습니다. 여자는 환갑이 되도록 시 쓰기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첫 시집을 냅니다. 시집의 제목은 ‘눈부신 꽝’입니다. 시집 속에는 ‘꽝”으로 살아 온 그녀의 온화하지만 치열한 고찰들이 페이지마다 차분히 그려져 있습니다. 여자의 존재는 태어날 때부터 꽝이었으나, 그러나 눈물나도록 아름답고 눈부신 꽝입니다. 
 
채인숙/ 시인. 2015년 <실천문학> 오장환 신인문학상을 받으며 등단했다. 카피라이터, 라디오, 방송 다큐멘터리 작가로 일했다.
추천0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Copyright © PT. Inko Sinar Media.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