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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칼럼 자바에서 시를 읽다 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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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인숙의 독서노트
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7,153회 작성일 2017-05-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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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이 없는 15초
 
시/ 심보선
 
 
 
아득한 고층 아파트 위
태양이 가슴을 쥐어뜯으며
낮달 옆에서 어찌할 바를 모른다
치욕에 관한 한 세상은 멸망한 지 오래다
가끔 슬픔 없이 15초 정도가 지난다
가능한 모든 변명들을 대면서
길들이 사방에서 휘고 있다
그림자 거뭇한 길가에 쌓이는 침묵
거기서 초 단위로 조용히 늙고 싶다
늙어가는 모든 존재는 비가 샌다
비가 새는 모든 존재들이
새 지붕을 얹듯 사랑을 꿈꾼다
누구나 잘 안다 이렇게 된 것은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태양이 온 힘을 다해 빛을 쥐어짜내는 오후
과거가 뒷걸음질치다 아파트 난간 아래로
떨어진다 미래도 곧이어 그 뒤를 따른다
현재는 다만 꽃의 나날 꽃의 나날은
꽃이 피고 지는 시간이어서 슬프다
고양이가 꽃잎을 냠냠 뜯어먹고 있다
여자가 카모밀 차를 홀짝거리고 있다
고요하고 평화로운 듯도 하다
나는 길 가운데 우두커니 서 있다
남자가 울면서 자전거를 타고 지나간다
궁극적으로 넘어질 운명의 인간이다
현기증이 만발하는 머릿속 꿈동산
이제 막 슬픔 없이 십오 초 정도가 지났다
어디로든 발걸음을 옮겨야 하겠으나
어디로든 끝간에는 사라지는 길이다
 
 
출처: 슬픔이 없는 15초 /심보선 시집 [문학과 지성]
 
NOTE *******  한순간, 모든 걸 멈추고 싶을 때가 있다. 타인들 앞에서 보여 온 헛된 몸짓과 과잉된 감정과 기쁨이거나 슬픔이거나 즐거움이거나 괴로움이거나, 모든 축적된 기억으로부터 나를 지워버리고 싶은 순간. 그 순간은 어쩌면 15초만으로 충분하다. 사물과 사물들 사이에서, 자연과 나 사이에서, 모든 것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버린 ‘나’라는 존재만으로 충분한 시간, 15초.
 
 살아간다는 것은 그저 조용히 늙어가는 일이란 걸 깨닫지만, 비가 새는 지붕 아래서도 새로운 사랑을 꿈 꾸고, 꽃이 피고 지는 일을 슬프게 바라보다가도 태양이 온 몸을 쥐어짜내며 빛을 만들어 내는 오후의 힘으로 우리는 온 힘을 다해 생을 살아간다. 그러다 어느 순간, 어떤 풍경도 보이지 않고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는, 고요하고 적막하고 평화로우며 슬픔이 없는 15초를 선물처럼 맞기도 하는 것이다. 슬픔이 없는 그 15초 동안, 나는 그렇게도 그리웠으나 오래 잊어버렸던 단 한 사람의 ‘나’를 만날 수 있는 게 아닐까.
 
채인숙/ 시인. 2015년 <실천문학> 오장환 신인문학상을 받으며 등단했다. 카피라이터, 라디오 작가, TV다큐멘터리 작가로 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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