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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칼럼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책과 혁명에 관한 닷새 밤의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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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인숙의 독서노트
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6,720회 작성일 2017-02-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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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키 아타루/ 자음과 모음        

버지니아 울프는 무섭다: 하지만 아무리 바람직하다 하더라도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독서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그것(독서) 자체가 즐거워서 그것(독서)을 하는 즐거움은 세상에 없는 것일까요? 목적 자체인 즐거움이란 건 없는 걸까요? 독서는 그런 것 가운데 하나가 아닐까요? 적어도 나는 때때로 다음과 같은 꿈을 꿉니다. 최후 심판의 날 아침, 위대한 정복자, 법률가, 정치가들이 그들의 보답-보석으로 꾸민 판, 월계관, 불멸의 대리석에 영원히 새겨진 이름 등-을 받으러 왔을 때 신은 우리가 옆구리에 책을 끼고 오는 것을 보시고 사도 베드로에게 얼굴을 돌리고 선망의 마음을 담아 이렇게 말하시겠지요. “자, 이 사람들은 보답이 필요 없어. 그들에게 줄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이 사람들은 책 읽는 걸 좋아하니까.”
 
 
NOTE

나는 사사키 아타루의 광팬이다. 그를 만나러 일본에 가고 싶고, 일본어를 배우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십대들이 아이돌을 좋아하는 마음 못지않다.(심지어 그는 나보다 나이도 한살 어리다) 그와 함께 반둥의 숲길을 걸으면서 어떻게 독서가 우리를 구원했는지 이야기를 나누는 행복한 상상을 한다. 그의 글은 때로 난해하지만 독특한 문체와 열정적인시선 때문에 곳곳에 묘한 매력이 숨어있다. 어떤 무모한 도전에 나서는 20대의 젊은이마냥 그가 열에 들떠서 글을 쓰고 있다는 게 절로 느껴져 읽으면서 혼자 슬며시 웃음이 난다. 세 번쯤 이 책을 완독했다. 아무 페이지나 들춰 읽어도 마음에 새겨두고 싶은 새로운 문장들이 등장한다. 그러니 어찌 40대의 이 창창하고 매력 넘치는철학자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텍스트로 올린 문장은 그의 책에 등장하는 버지니아 울프의 글이다. 최후 심판의 날이 와서 신이 인간에게 포상을 내린다는 소문을 듣고 수많은 정치가와 법률가와 정복자가 신에게서 받을 포상을 기다리지만,책을 옆구리에 끼고 나타난 독서가들에겐 신의 포상조차 의미가 없다. 그들은 이미 지상에서 누릴 수 있는 최상의 것을 다 누렸기 때문이다. 심지어 신은 그들을 선망의 눈길로 바라보기까지 한다. 독서의 즐거움을 아는 것은 신의 부러움을 받을 만한 것이다. 목적 자체인 즐거움을 충만히 누릴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사사키 아타루는 독서가 어떻게 세계의 역사를 바꾸는 혁명적인 일들을 해 왔는지를 수많은 예시를 통해 서술한다. 주목해 읽을만한 부분은 둘째 날 밤의 이야기인 이슬람의 창시자 무함마드에 관한 이야기다. 알다시피 무함마드는 동굴 속에서 지브릴(가브리엘) 천사의 계시를 받는다. 그전에 그는마흔이 될 때까지 뭘 했는지 알 수조차 없는 평범한 상인이었고 심지어 문맹(글을 읽을 줄 몰랐다)이었다. 사사키는 <코란>에서 가장 아름다운 문장은 ‘나는 시장을 헤매고 다니며 먹고사는 평범한 남자에 지나지 않는다’ 라는 부분이었다고 고백한다. 아무튼 그는 처음에 천사의 계시와 기적을 거부했고 도망쳤다. 하지만 결국 동굴로 돌아가 그가 다시 천사와 조우했을 때, 신의 계시가 내려졌다.
 “읽어라-“
 
전 이슬람 세계를 창조하는 최초의 계시는 그것이었다. 
 
 
 
읽어라. 창조주이신 주의 이름으로.
 
아주 작은 응혈에서 사람을 만드셨다.
 
읽어라. 너의 주는 더없이 고마운 분이라.
 
붓을 드는 법을 가르쳐 주신다.
 
사람에게 미지의 것을 가르쳐 주신다.
 
어찌 이슬람 뿐이겠는가. 종교혁명을 일으킨 루터가 맨처음 한 일도 성서를 “읽는” 것이었다. 읽었으므로 그는 다시 “쓸” 수 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전 세계를 새로운 가치관으로 무장시키는 종교적 혁명이 시작되었다. 11세기 말, 피사의 도서관에서 발견된 <로마법 대전> 50권을 읽고 또 읽었던 사람들은 이를 전대미문의 규모로 고쳐쓰고 또 쓰기를 반복했고, 마침내 유럽 전체를 지배하는 교회법을 탄생시켰다. 이 모든 것들은 넓은 의미에서의 ‘문학’이었다. 2만여 년의 호모 사피엔스의 역사 중에서 고작해야 5000년 안팎 밖에 되지 않은 문학의 역사는 이토록 엄청난 변혁을 주도하며 세계의 역사를 이끌어 온 것이다. 결국 세상을 변화시킨 모든 혁명의 실체들은 텍스트를 읽고 다시 쓰는 것으로 시작되고 완성되었던 것이니, 사사키 아타루가 흥분하며 ‘문학’이야 말로 혁명의 근원이라고 말하는 것에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다.
 
글을 쓰면서 밥벌이를 하고 마침내 ‘시인’이라는 타이틀을 달았지만, 만약 글을 쓰는 사람이 되지 않았더라도 나는 충실한 독서가가 되고 싶다는 꿈을 여전히 꾼다. 내게 독서는 인간이 꾸리는 온갖 삶의 밀도에 더 가까이 뺨을 대고, 내 삶을 스스로 지배하고 스스로 자유롭게 변화시키는 지극히 사적인 혁명을 이루는 일이기 때문이다.
 
글쓴이: 채인숙 / 2015년, <실천문학> 오장환 신인문학상을 받으며 등단했다. 문예창작을 전공하고 라디오 작가와 방송 다큐멘터리 작가로 일했다. 한,인니 문화연구원 부원장으로 일을 돕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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