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칼럼 떠도는 먼지들이 빛난다. (손택수 - 창작과 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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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인숙의 독서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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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한 일들이 좀 있어야겠다
시. 손택수
내게도 공연한 일들이 좀 있어야겠다
일정표에 정색을 하고 붉은 색으로 표를 해놓은 일들 말고
가령, 태풍이 올라온다는 소식에 모종대를 손보는 노파처럼
곧 헝클어지고 말 텃밭일망정
흙무더기를 뿌리 쪽으로 끌어다 다독거리는 일
장맛비 잠시 그친 뒤, 비가 오면 다시 어질러질 텐데
젖은 바닥에 붙어 잘 쓸리지도 않는 은행잎을 쓸어담느라 비질을 하는 일
치우고 나면 쌓이고, 치우고 나면 쌓이는 눈에 굽은 허리가 안쓰러워
어르신, 청소부에게 그냥 맡기세요 했더니
멀거니 쳐다보곤 하던 일을 마저 하던 그 고요한 눈빛처럼
별 뜻도 없이 고집스레, 내 눈엔 공연한 일들에 노고를 아끼지 않는 사람들이 있으니
이상하지 않은가, 나는 이 쓸모없는 일들 앞에서 자꾸 부끄러워지는 것이다.
세상에는 값지고 훌륭한 일도 많다지만
NOTE
호모 사피엔스들의 빅히스토리와 별과 우주에 관한 책을 읽는데 한창 열중하던 때가 있었다. 거대서사를 읽는 일은 생각보다 몹시 피곤하고 집중력을 요한다. 벽돌만한 책의 두께도 그러하거니와 읽다보면 책의 미궁 속으로 한없이 빠져드는 경험을 하게 되는데, 그런 순간들은 쉽게 표현하자면 독서의 즐거움을 만끽하는 것이고 나쁘게 이야기하면 시공간의 개념이 흐릿해지는 중독 상태가 되는 것과 비슷하다. 그런 집약적인 독서에 지치면 어김없이 시집을 꺼내들었다.
한창 우주학자들의 이야기들에 심취해있던 그때, 손택수의 시집 <떠도는 먼지들이 빛난다>는 참으로 절묘하게 다가왔다. 한창 읽고 있는 책에서는 과학자들이 인간은 그저 별이 남긴 먼지라는데, 이 시인은 그 먼지들이 떠돌며 한없이 빛나고 있다고 노래하는 것이다. 과학과 시의 환상적인 도킹이었다.
그러니까 그 우주의 이론과 손택수의 시를 결합해 보자면, 우리는 별이 남긴 빛나는 먼지들인 것이다. 그 먼지들이 뭉쳐서 얼마나 찬란하게 빛나는지는 우주 공간에서 지구를 찍은 한 장의 사진을 들여다보는 일로 충분하겠지만, 손택수는 5분만 멈춰서서 길을 지나는 사람들과 길 위에 서있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것으로 대치한다. 고작 길 위에서 별의 아름다움을 찾아내다니, 시인이 과학자보다 한 수 위라는 생각을 했었다.
세상에는 돈이 되고 공적을 세우는 값지고 훌륭한 일을 하며 살겠다는 사람들이 차고 넘친다. 무슨 일이건 돈으로 연결되지 않으면 금방 가치가 없는 일이 되고 마는 천박한 세상이 된지는 이미 오래다. 그러나 내일 태풍에 쓰러질 모종대를 오늘도 고집스럽게 다독여 세우고, 다시 장맛비에 어지러질 게 뻔한 은행잎을 쓸어담고, 금방 또 눈이 내릴텐데도 쌓인 눈을 치우고 또 치우는 공연한 일들을 해 나가는 사람들이 있어서 세상은 숨 쉬고 살아갈 만한 곳이 된다.
생각해 보면, 더 많은 사람들이 별다른 자본적 가치가 없는 쓸모없는 일들에 열중하는 것이야 말로 이 지구를 아름답게 만드는 일일지도 모른다. 시를 쓰고, 그림을 그리고, 식물원에 앉아 음악을 듣고, 길가의 고양이들에게 밥을 나눠주고, 별을 보러 시골을 찾아가는 그 모든 일들 말이다. 일정표에 정색을 하고 붉은 색으로 표를 해놓은 일들만 하면서 사는 나를 부끄럽게 만드는 사람들이 더 많아져야 한다. 별 뜻도 없이 고집스레, 내 눈엔 공연한 일들에 노고를 아끼지 않는 사람들이 지금도 묵묵히 해 나가는, 이 쓸모없는 일들의 소박한 아름다움 앞에서 자꾸 부끄러워져야 한다. 세상에는 값지고 훌륭한 일도 많다지만 말이다.
글쓴이: 채인숙 / 2015년, <실천문학> 오장환 신인문학상을 받으며 등단했다. 문예창작을 전공하고 라디오 작가와 방송 다큐멘터리 작가로 일했다. 한,인니 문화연구원 부원장으로 일을 돕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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