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칼럼 헤밍웨이, 스페인의 론다에서 깨달은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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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재 손인식 느낌과 새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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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부부의 인상파식 여행] 아! 이베리아 반도 ⑯
"론다(Ronda) 탐방 이야기를 헤밍웨이로 풀어?"
갈래가 잡히지 않던 론다 이야기가 대문호 헤밍웨이로 인해 풀렸다. 헤밍웨이의 스페인과 론다 사랑은 특별했다. 나이 37세 때 스페인 내전에 공화파 의용군 기자로 참전한 것도 그렇거니와, 종전 후 거처한 미국 플로리다 주의 키웨스트로 집 대부분을 스페인 가구로 장식했다는 것에서도 짐작이 간다.
그의 소설 중 가장 인기가 있고 그에게 노벨상을 안긴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의 배경으로 삼은 곳도 또 집필을 시작한 곳도 론다다. 물론 영화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의 촬영지 일부이기도 하다. 어쨌든 론다는 헤밍웨이를 빌어 이야기될 때 가장 론다다울 것이라는 내 생각은 부동이다.
론다는 스페인 남부 말라가에서 북서쪽으로 113km 떨어져 있는 도시다. 론다 산맥에 자리한 해발 780m 고지대로 협곡과 절벽을 끼고 앉은 도시다. 절벽과 협곡은 과달레빈강(Río Guadalevín)이 천연으로 빚은 천혜의 절경이다.
그리고 이 절경은 론다를 낭만 넘치는 아름다운 도시로 알려지게 할 충분한 조건이다. 론다를 여행한 사람이라면 '사랑하는 사람과 로맨틱한 시간을 보내기 좋은 곳'이라는 헤밍웨이의 평가를 쉽게 인정할 곳이다.
▲ 론다의 투우장 인근에 세워진 헤밍웨이 동상
그러나 론다는 이 절경으로 인해 고난도 겪었다. 절벽과 협곡으로 인해 요새가 될 수밖에 없었다. 절경이 지닌 요새다운 조건으로 인해 뺏고 빼앗기는 질곡의 역사를 품을 수밖에 없었다. 한때는 무어인들에게 정복당했고, 다시 레콩키스타, 즉 국토회복 운동에 의해 탈환되었으며 스페인 내전 때는 공화파와 파시스트로 주인이 바뀌기도 했다. 그러나 세상 모든 진리와 역사, 인간사가 그렇듯 한 방향만으로 전개되지 않는다. 모난 것 같지만 둥글고 한 방향 같지만 사방으로 갈라진다.
그러므로 론다는 두 가지 특성이 극명한 곳이지만 누가 뭐래도 론다는 그냥 하나의 론다다. 누구라도 론다의 문을 열고 성큼 안으로 들어가 보시라. 왜 헤밍웨이가 머물러 살았으며, 왜 소설의 배경으로 삼았는지, 그리고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왜 론다를 사랑했는지 느끼게 되리라. 그때 비로소 론다다운 론다를 알게 되리니 그땐 누구라도 론다를 좋아하게 되고 아울러 론다의 아픔을 가슴으로 어루만지게 되리라.
길동무 일행을 태운 버스가 코르도바에서 출발해 론다에 이르기까지 소요 시간 약 2시간 40분, 그 시간은 론다를 예비하기에 딱 좋은 여백이었다. 론다로 접어든 국도에서 뜻하지 않은 교통사고로 인해 1시간여를 지체했지만, 그 또한 있어서 좋은 시간이었고 흥미로운 소비였다.
급커브에 오르막 경사길, 론다행 국도의 시작은 그랬다. 거친 듯 온화한 풍경이 좌우로 펼쳐졌다가는 접혔다. 산악과 구릉이 교차하며 뒤로 흘렀다. 고향같이 정겨운 전경 속에 허물어진 외딴집 터도 언뜻 스쳤다. 삭은 세월이 쌓인 허물어진 외딴집 터, 혹 그건 이미 오래전에 스쳐 간 내전의 아픔은 아니겠지? 론다에 대한 두 가지 인상에 대한 저울질은 거기서부터 시작이었다.
론다를 사랑하고 론다가 자랑스러워하는 헤밍웨이의 동상을 만났을 때도 두 가지 생각이었다. 동상은 스페인에서 가장 오래된 투우장 중 하나인 론다 투우장(Plaza de Toros de Ronda) 앞에 세워져 있었다. 왜 여기지 싶었다. 아 헤밍웨이가 투우경기를 매우 즐겼다지. 그래도 그렇지 투우장 앞의 헤밍웨이는 뭔가 안 어울리는 아웃 테리어다.
▲ 스페인에서 가장 오래된 투우장 중 하나인 론다 투우장(Plaza de Toros de Ronda) 앞에 세워진 투우 상
"론다는 근대 투우의 발상지라고 합니다. 론다 출신의 유명한 투우사 페드로(Pedro Romero) 때문이지요. 본래 투우 경기는 투우사가 말을 타고 소를 창으로 찌르는 형식이었는데 한번은 페드로가 경기 중 말에서 떨어져 위기를 당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가 입고 입던 옷을 활용해 달려드는 소를 피함으로써 그때부터 투우 방식이 바뀐 것입니다. 이 투우장에서는 지금도 가끔 투우 경기가 열립니다."
가이드인 이 선생의 설명을 들으며 걸었다. 작은 공원이 다가온다. 바람 따라 이리저리 뒹구는 낙엽, 빈 벤치가 여행객을 유혹한다. 그러나 걸어야 했다. 도로에서 지체한 시간 때문이 아니라 지금은 함께 나아갈 시간이다. 함께 걸으면서 각자 보고 느낄 시간이다. 그렇게 나아간 곳. 그곳에는 어김없이 새로운 것이 있어서 좋다.
드디어 론다에서 가장 기대했던 장소에 다다랐다. '헤밍웨이 산책로'다. 호흡을 가다듬으려는데 휘이익~ 겨를도 없이 다가드는 것이 있다. 고지대 절벽 위를 달리는 바람이다. 산책로라고 하기엔 분위기 꽝이다. 그러나 개성 만점이다. 탁 트인 곳, 눈을 두는 곳마다 끝 간 데 없는 대지와 구릉이 펼쳐져 있다. 그리고 그 끝자락엔 겹겹이 산 능선이 둘러있다. 내려다보기 아찔할 정도로 깎아지른 절벽이다. 가이드 선생이 한 마디 덧붙인다.
▲ 헤밍웨이 산책로 오른쪽으로 펼쳐진 전경
"이 절벽 높이가 약 200m라고 합니다. 죄가 없는 사람은 뛰어 내려도 바닥에 닫기 전 누군가가 구해준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누가 실험해본 사람이 있었나요?"
이런 살벌 차가운 개그라니. 또 복나눔씨다. 기대했던 헤밍웨이 산책로에 왔으니 때와 장소에 알맞게 무게 잡고 사색 좀 하려는데 나의 산통을 깨고 만다. 그는 남을 웃겨놓고는 자신은 웃지도 않는다. 물론 다른 사람 조크에는 그의 큰 키만큼 크게 웃는다.
산책로는 절벽을 따라 이어져 있다. 난간을 잡고 낭떠러지를 넘겨다보는 것만으로도 찌릿찌릿 몸에 전율이 인다. 절벽, 절벽은 막힌 것이다. 추락하는 것이다. 그래서 절망을 상징한다. 그러나 어떤 이에게는 도전의 대상이요 극복의 대상일 것이다. 새처럼 날아 내리기를 꿈꾸는 장소일 것이다. 대문호 헤밍웨이가 늘 이 산책로를 걸었다지. 그에게 묻지 않을 수 없다.
"헤밍웨이, 그대에게 론다의 절벽은 무엇이었는가?"
▲ 누에보다리(Puente Nuevo). 뒤쪽에 보이는 것이 론다 파라도르다. 다리 중앙 아치 위에 보이는 작은 문이 전쟁 때는 감옥으로 쓰였던 장소다. 지금은 박물관.
그에게서 괜찮은 답을 들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성큼 다가온 다리, 헤밍웨이가 즐겨 찾았을 누에보다리(Puente Nuevo)다. 이 다리는 론다의 상징이다. 신시가지와 구시가지를 사이에 두고 120m 깊이의 협곡에서 솟아올라 양쪽을 연결하는 론다의 중심 다리다. 높이와 비교해 반도 안 되는 길이, 그 다리의 중심에 섰다.
"어느 쪽이 더 무거울까요?"
또 뜬금없는 복나눔씨의 질문, 아무도 웃지 않는다. 대답이 없다. 웃을 수 없는 절경이다. 침묵하게 될 뿐 양쪽 무게나 가늠할 분위기가 아니다. 조각품처럼 절벽 위에 얹힌 론다 파라도르의 소리 없는 경건함이 답일까? 양쪽 절벽 위에 그림처럼 군집한 집들의 하얀 반짝임이 답일까? 마치 꼭 그래야 하는 것처럼 절벽 끝에 매달린 카페에 커피 한잔 놓고 앉으면 답을 찾을 수 있을까?
▲ 론다의 상징 누에보다리(Puente Nuevo)에서 바라본 풍경
그래 누에보다리가 답이다. 낭만과 아픔의 끈을 사방에 걸고 선 이 다리가 답이다. 아니 론다시 전체가 답이다. 그러므로 늘 이 길을 걸었던 헤밍웨이의 답을 살펴봐야 한다. 론다의 전망대에서 보는 순한 맛보다 짭조름한 낭만과 질곡의 아픔이 교차하는 누에보다리, 선 곳이 곧 전망대인 이 산책길에서 그는 그가 펼친 답들을 찾아야 한다.
"이 세상에 너 하나뿐이라서 널 사랑한 게 아니라, 널 사랑하다보니 이 세상에 너 하나뿐이다."
영화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의 한 대사다. 헤밍웨이는 론다에서 찾았을 답 하나를 영화에 그렇게 슬쩍 흘려 놨다. 아주 간절한 마음으로. 론다를 찾는 여행객들 모두가 스스로 론다가 제시하는 메시지 하나를 멋지게 찾아내도록 그렇게 유도해 놨다.
론다는 제시한다. 단호한 절벽 너머에 유연하게 펼쳐진 평지가 있음을. 그리고 그것은 둘이 아니고 하나의 대지라고 선연한 증거로 풀어놨다. 절벽만을 보고 절망하지 말고 평지만을 보고 마음을 놓지 말라고 한다. 구릉이 얕다고 깔보지 말고, 둘러선 먼 산은 그것이 곧 머지않아 필적해야 할 상대임을 예시해 놨다.
론다의 마주 선 협곡은 역설에 역설이다. 높이에 대한 높은 통찰인가 하면 깊이에 대한 깊은 천착이다. 높이 솟아 다리로 이어졌으되 그 뿌리는 하나다. 그리고 그 뿌리 위로는 유유히 물이 흐른다. 작은 폭포도 있다. 협곡은 대립하기 위해 마주 선 것이 아니라 균형을 맞췄다. 모든 것이 나름으로 어우러지기 위해서는 그렇게 각고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바로 거기에 론다식으로 대령해놨다.
▲ 협곡 아래는 물이 흐르고 다리 아래에는 폭포도 있다.
헤밍웨이, 그가 자원해서 의용군으로 참전한 스페인 내전은 어땠는가? 자기의 신념을 실천하기 위해 참전한 전쟁터는 어땠는가? 외적으로는 파시스트와 공화주의자들의 양자 간 대결이지만 이면은 이와 아주 다르다. 사회주의, 공산주의, 아나키즘, 파시즘 등 온갖 이념의 전장이었고, 자본가 지주계급과 노동자 농민계급이 서로에게 총을 겨눴다. 또 스페인 민중과 그들을 억압한 가톨릭교회가 격돌한 종교 전쟁이기도 했다.
파시즘을 추구하는 국가인 독일과 이탈리아는 국민 진영, 즉 프랑코를 도왔고, 소련을 비롯한 여러 나라가 공화 진영을 지원했다. 세계사를 바꾼 국제전이었고 2차 세계대전의 암시였다. 한쪽에서는 적군지역 민간인에게 폭격을 가하고, 또 다른 한편에서는 그 적군에게 무기를 팔았다.
국제법을 들먹이며 중립을 취한다던 나라들은 내전의 어려움에 처한 스페인을 이용하여 어떻게 하면 더 많은 이익을 챙길까 호시탐탐 노렸다. 패배한 공화 진영의 변명은 독일의 조직적인 군사지원이 결정적이었다고 하지만, 많은 학자들은 공화진영 내부의 분열과 공화 정부의 무능력이었다고 평가한다.
이 모든 현실 때문에 헤밍웨이는 전장의 현장에서 정의를 실현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절감한다. 커지는 폭력에 대한 혐오와 스스로가 얼마나 많이 싸워야 하는가를 깊이 느낀다. 마침내 자아 고립을 느끼며, 경험과 신념의 일관된 질서가 깨진다. 아울러 자신과 세상을 향한 모든 가치에 대해 재평가를 내려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헤밍웨이의 바로 그런 갈등과 깨달음은 소설과 영화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를 통해 은근하고 강렬하게 드러난다. 배경과 인물, 인물의 성향과 대사를 통해서 깨알같이 되살아난다.
참으로 아이러니인 것은 한 나라를 황폐화하고 수많은 인명을 살상한 전쟁을 세상은 "온갖 명작의 자궁"이라 평한다는 사실이다. 헤밍웨이의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를 비롯하여 조지 오웰의 <카탈루냐 찬가>, 피카소의 <게르니카> 등이 탄생했다는 이유이리라. 그리고 생텍쥐페리, 파블로 네루다, 앙드레 말로 등 많은 지식인이 국적과 민족을 초월해 이 전쟁에 뛰어들었고, 그 체험을 확신에 찬 창작으로 펼쳤기 때문이리라.
어쩌면 이 모두를 자극한 원천이 있다. 17세기 영국의 성직자이자 형이상학파 시인인 존 단(John Donne, 1572-1631)이다. 헤밍웨이의 소설과 영화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For whom the bell tolls)>는 그가 쓴 꽤 긴 수필에서 발췌한 제목이다. 제목뿐만 아니라 존 단의 글과 소설과 영화의 주제가 한결같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것이 내가 본 론다의 이미지와 떼려야 뗄 수 없음은 기연일까? 다음은 존 던의 수필 일부다.
"어느 누구도 그 자체로서 온전한 섬은 아니다. 모든 인간은 대륙의 한 조각, 본토의 일부분. 한 줌의 흙덩이가 바다에 씻겨 가면 유럽은 그만큼 작아지며 모래톱이나, 친구들이나 그대 자신의 영지가 그러해도 마찬가지. 어느 누구의 죽음도 나를 감소시키니, 나는 인류의 한 부분이기 때문. 그러므로 누구를 위해 종이 울리나 알아보려고 사람을 보내지 말라. 종은 그대를 위해 울린다."
▲ 헤밍웨이 산책로 반대편 절벽 누에보 다리에서 바라본 풍경이다.
그렇다. 오늘의 세상사는 오늘 우리 모두의 삶터인 하늘 밑 세상의 일이다. 많은 사건도 우연히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누구에게나 죽음의 위기가 있다. 참혹한 고통이 있을 수 있다. 그러기에 오늘 우리 모두의 삶은 빛나야 한다. 오늘 어디에선가 종이 울리면 그것은 듣는 이 모두의 것이고, 오늘 어디에선가 촛불 하나 켜지면 그것이 곧 나를 태우는 것이고 나를 밝히는 것이다. 헤밍웨이가 전장과 투우장에서 자신을 발견하려 한 이유이리라.
헤밍웨이, <잃어버린 세대(lost generation)> 작가의 한 사람으로 평가받는다. 그는 지성과 문명의 세계를 속임수가 많은 곳으로 보았다. 삶을 고통스럽고 복잡한 것으로 파악했다. 그러기에 그는 어려운 현실에 맞서 감연히 신념을 행했느냐에 중점을 두었다. 패배한 삶일지라도 신념을 행한 것이라면 그 존엄성이 인정되어야 하고 그것이 승리라는 사상을 그의 소설 속에 펼쳤다.
그러므로 안타깝고 의문스러운 것이 있다. 그가 자결한 사건이다. 그는 왜 절벽은 끝이 아니며, 협곡을 사이에 두고 마주 선 절벽은 대립을 위해서가 아니라 균형임을 망각했던 것일까?
이 글은 오마이뉴스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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