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 소설 읽는 노인 - 루이스 세풀베다 (열린책들) > 전문가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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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칼럼 연애 소설 읽는 노인 - 루이스 세풀베다 (열린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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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인숙의 독서노트
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7,450회 작성일 2017-03-3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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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은 천천히, 아주 천천히 책을 읽었다. 그의 독서 방식은 간단치 않았다. 먼저 그는 한 음절 한 음절을 맛보듯 음미한 뒤에 그것들을 모아서 자연스러운 목소리로 읽었다. 그리고 그런 식으로 단어가 만들어지면 그것을 반복해서 읽었고, 역시 그런 식으로 문장이 만들어지면 그것을 반복해서 읽고 또 읽었다. 이렇듯 그는 반복과 반복을 통해서 그 글에 형상화된 생각과 감정을 자기 것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음절과 단어와 문장을 차례대로 반복하는 노인의 책읽기 방식은 특히 자신의 마음에 드는 구절이나 장면이 나올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도대체 인간의 언어가 어떻게 해서 그렇게 아름다울 수 있는가를 깨달을 때까지, 마침내 그 구절의 필요성이 스스로 존중될 때까지 읽고 또 읽었다.
 
 
NOTE
 
안토니오 호세 볼리바르 프로아뇨. 이 긴 이름이 아마존의 밀림에서 부인을 잃고 홀로 살아가는 노인의 이름이다. 약속의 땅이라고 불리우는 아마존을 개발하겠다는 정부의 정책에 따라 엘 이딜리오까지 들어왔지만, 그는 아내를 잃고 깊은 숲 속으로 홀로 들어가 아마존의 원주민인 수아르 족과 어울려 산다. 
 
어느 날 선착장에서 백인 남자의 처참한 시체가 발견되고 아마존의 야만인들이 저지른 짓이라는 사람들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노인은 그것이 살쾡이들이 벌인 일이라는 걸 직감한다. 백인들은 그동안 아마존의 살쾡이들을 죽여왔고, 이를 목격했던 암살쾡이가 복수를 가했던 것이다. 노인은 어쩔 수 없이 마을 사람들과 살쾡이를 죽이는 ‘빌어먹을 게임’에 동원된다.
 
그는 숲 속 오두막에서 그저 연애 소설이나 읽으며 살고 싶지만, 세상은 그를 내버려 두지 않는다. 문명의 이름으로 아마존의 생명을 파괴하다가 죽임을 당하는 백인들과 종족의 죽음을 복수하는 살쾡이 사이에서, 그는 어느 쪽이 이기든 비극적일 수 밖에 없는 싸움의 결말을 예견하며 괴로워 한다. 그는 문명인을 자처하는 백인들이 야만인이라 손가락질하는 수아르 족들의 진실된 친구였지만, 그들과는 처음부터 다른 존재였던 것이다. 결국 그는 살쾡이를 죽이는 백인들의 편에 서서 아마존으로 들어간다. 여기에도 저기에도 그의 자리는 없었으므로 노인은 아름다운 언어로 씌여진 연애 소설을 읽는 것으로 자신만의 세상을 추스리며 살고 싶지만, 세상은 그를 그냥 내보려 두지 않는다.
 
 
소설은 정확히 말하자면, 작가의 친구이자 환경운동가였던 치코 멘데스의 죽음을 기리고 자연 속에서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야 할 인간이 얼마나 무자비하게 생태계를 파괴하는지를 고발하는 작품이다. 인간이 파괴한 자연의 피해자인 또 다른 생명체에 의해 인간이 또다시 파멸을 맞고, 서로가 피해자가 되어가는 과정을 적나라하게 그리고 있다.
 
그러나 나는 이 소설이 그 야만의 세상 안에서 ‘인간다움’을 잃지 않고 문명의 이기에 더럽혀지지 않으려는 한 노인의 눈물겨운 투쟁으로 읽혔다. 아무도 찾지 않는 오두막에서 연애 소설을 읽는 노인의 독서는 그래서 절실하고 아름답다. 한 문장 한 문장을 곱씹고 음미하고 반복하고 반복하며, 그 구절의 필요성이 스스로 존중될 때까지 읽고 또 읽는다는 대목에서는 숭고함마저 느껴졌다. 세상과 단절되어 오로지 기도와 노동으로 신을 찾는 수사의 삶과 야만적인 투쟁으로 점철된 삶 안에서 연애 소설을 읽으며 인간다움을 찾으려는 노인의 삶이 다르지 않다고 생각되었다. 나는 누군가가 밤을 새워 쓴 한 줄의 문장을 그토록 애절하게 아끼며 읽어 본 적이 있었던가 되돌아 보았다.
 
나는 노인의 오두막에서 같이 무릎 담요를 덮고 번갈아 연애 소설을 낭독하는 행복한 상상에 잠시 빠져 보았다. 노인이 아마존에서 돌아오는 책의 마지막 문장을 읽은 후였다. 그 모든 야만의 현장을 떠나 다시 오두막으로 돌아오는 노인의 모습은 이러했다.
 
 
-       안토니오 호세 볼리바르 프로아뇨는 틀니를 꺼내 손수건으로 감쌌다. 그는 그 비극을 시갖가헤 만든 백인에게, 읍장에게, 금을 찾는 노다지꾼들에게, 아니 아마존의 처녀성을 유린하는 모든 이들에게 저주를 퍼부으며 낫칼로 쳐낸 긴 나뭇가지에 몸을 의지한 채 엘 이딜리오를 향해, 이따금 인간의 야만성을 잊게 해 주는, 세상으 아름다운 언어로 사랑을 얘기하는, 연애 소설이 있는 그의 오두막을 향해 걸을을 떼기 사작했다.
 
글쓴이: 채인숙 / 2015년, <실천문학> 오장환 신인문학상을 받으며 등단했다. 카피라이터, 라디오작가, 방송 다큐멘터리 작가로 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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