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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칼럼 자바에서 시를 읽다 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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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인숙의 독서노트
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7,016회 작성일 2017-05-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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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상
시/  박형준
 
 
책에는 두 번 다시 발을 담글 수 없어요
나는 책상에 강물을 올려놓고 그저 펼쳐 볼 뿐이에요
내 거처는 공간이 아니라 시간일 뿐
 
나는 어스름한 빛에 얼룩진 짧은 저녁을 좋아하고
책 모서리에 닿는 작은 바스락거림을 사랑하지요
예언적인 강풍이 창을 때리는 겨울엔
그 반향으로 페이지가 몇 장 넘어가지만
나는 벽에 부딪혀 텅 빈 방 안을 울리는 메아리의 말과
창밖 단풍나무 꼭대기에서 식사를 하고
매일 새롭게 달라지는 거처를 순간 속에 마련할 뿐
 
죽음이 뻔뻔하게 자신의 얼굴을 하나하나 벗기면서
안을 드러내는 밤중엔
여유롭게 횡단하지요, 나는 어둔 책 속에 발을 담그지 않아요
그저 책상에 흐르는 강물 끝에 손을 적실 수 있을 뿐
 
책상에 넘치는 강물 위로,
검은 눈의 처녀가 걸어 나오는 시각엔
바람의 냄새가 흘러내리는 머리카락 속에
얼굴을 묻고 대양을 꿈꾸지요
 
출처 : 생각날 때마다 울었다 (문학과 지성 시인선)
 
 
NOTE *******
박형준 시인의 시집 <생각날 때마다 울었다>는 다른 시집보다 두 배쯤 두껍다. 무려 100편의 시가 실렸다. 다른 시집들에 비해서 두 배쯤 많은 분량의 시가 한꺼번에 실렸으니, 팔천원짜리 시집 한 권을 사서 누리는 호사가 이보다 더 좋을 수 있으랴. 이토록 많은 시를 쓰는 동안, 그리고 시를 써서 시집을 엮고 그 시집을 세상에 시집 보낼 때까지 시인은 오랜 시간을 책상에 앉아 있었을 것이다. 기껏해야 2미터도 채 되지 않는 책상에서 운명의 깊이와 슬픔을 가늠하고 고독에 몸부림치고 아름다움을 탐닉했을 것이다.
 
그래서 운명의 거처가 되어버린 책상은 시인에게 어떤 공간의 개념이 아니라 수없이 갈등하고 번민하며 시를 썼던 시간으로 다가온다. 시가 써지지 않는 시간인들 어쩌겠는가. 시인은 그저 책상에 멍하니 앉아서 어스름한 빛에 얼룩진 짧은 저녁을 맞이하거나 책 모서리에 닿는 작은 바스락거림을 사랑하게 된다. 나 역시도 깨어있는 동안의 대부분 시간을 책상에 앉아 보낸다. 책상에 앉아서 책을 읽고, 메일을 쓰고, 잡문들을 정리하고, 인터넷을 뒤적이고, 아주 가끔 선물처럼 내려오는 시를 쓴다. 그러니 넓디넓은 이 세상에서 실존의 나를 만나는 유일한 공간은 책상일지도 모른다. 지금도 길이 2미터, 폭 60센티짜리 책상에 앉아 박형준의 시집을 빼들고 읽으며 이 글을 쓰다가 저녁을 맞는다. 책상에 넘치는 강물 위로 검은 눈의 처녀가 걸어 나오는 시각이다.
 
채인숙/ 시인. 2015년 <실천문학> 오장환 신인문학상을 받으며 등단했다. 카피라이터, 라디오 작가, 방송 다큐멘터리 작가로 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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