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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칼럼 사라진 손바닥- 나희덕 (문학과 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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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인숙의 독서노트
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6,919회 작성일 2017-01-2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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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을 얻다
 
                 시. 나희덕
 

담양이나 창평 어디쯤 방을 얻어
 
다람쥐처럼 드나들고 싶어서
 
고즈넉한 마을만 보면 들어가 기웃거렸다
 
지실마을 어느 집을 지나다
 
오래된 한옥 한 채와 새로 지은 별채 사이로
 
수더분한 꽃들이 피어 있는 마당을 보았다.
 
나도 모르게 열린 대문 안으로 들어섰는데
 
아저씨는 숫돌에 낫을 갈고 있었고
 
아주머니는 밭에서 막 돌아온 듯 머릿수건이 촉촉했다.
 
-저어, 방을 한 칸 얻었으면 하는데요.
 
일주일에 두어 번 와 있을 곳이 필요해서요.
 
내가 조심스럽게 한옥 쪽을 가리키자
 
아주머니는 빙그레 웃으며 이렇게 대답했다.
 
-글씨, 아그들도 다 서울로 나가불고
 
우리는 별채서 지낸께로 안채가 비기는 해라우.
 
그라제마는 우리 집안의 내력이 짓든 데라서
 
맴으로는 지금도 쓰고 있단 말이요.
 
이 말을 듣는 순간 정갈한 마루와
 
마루 위에 앉아 계신 저녁 햇살이 눈에 들어왔다.
 
세 놓으라는 말도 못하고 돌아섰지만
 
그 부부는 알고 있을까,
 
빈방을 마음으로는 늘 쓰고 있다는 말 속에
 
내가 이미 세들어 살기 시작했다는 것을.
 
 
NOTE

외갓집을 생각하면 소박하고 정갈한 모습으로 누워있던 마루가 먼저 떠오른다. 세월에 반질반질하게 닳아버린 나무결과 마루 틈새로 길게 홈이 파인 곳이 곳곳에 있어서, 그 사이로 먼지라도 낄새라 열심히 걸레질을 하던 막내이모의 작은 등도 생각난다. 나는 그때 어린 나이였는데도 사람의 마음이 깃든 오래된 사물들은 세월을 따라 어떤 표정을 가지게된다는 것을 어렴풋이 깨달았던 것 같다. 마루 한가운데로 햇살이 들면 목침을 들고나와 낮잠을 주무시던 외증조할머니의 흰머리와 고구마에 김치를 얹어주시던 손가락의 주름도 떠오른다. 앞마당에 서 있던 키 큰 감나무와 우물 옆의 무화과 나무, 그 당시엔 참 귀하게 여겨졌던 밀감나무와뒷마당으로 나가는돌담에 끼어있던 푸른 이끼의 색깔도 선명하게 기억난다. 외할아버지는 마당에 서서 저쪽 큰 산과 작은 산을 가리키며 밤나무에 얼마나 밤이 들었는지 보라고 맞춰보라 하셨고, 물이 나지 않은 코섬에 염소를 놓아 기르는 사람들 이야기를 해 주셨다. 외갓집은 어린 나에게 모든 게 풍요로웠고 모든 기억이 따뜻했던 곳이다. 

시인은 아마도 나의 외갓집 같은 소박하고 정갈한 옛집에 방 한 채를 얻어 밥벌이에 지친 도시에서 잠시 숨을 돌리고 싶을 때마다 찾아들고 싶었나 부다. 그 방에서,그동안 보아 온 시인의 많은 시처럼 삶의 깊이를 헤아리고 여리고 작은 생명들의 힘을 노래하며   자연과 교감하는 시를 쓰고 싶었을 것이다. 어느 날 시인은 지실마을 어디쯤을 지나다가 꼭 그런 방이 있을 것만 같은 오래된 집 한 채를 발견한다. 그리고 저도 모르게 대문을 열고 들어가서농사를 짓는 주인 내외와 마주친다. 방을 얻고 싶다는 시인의 말에 이제 막 밭에서 돌아 와 여즉 머릿수건이 촉촉한 안주인은 “글씨. 아그들도 다 서울로 나가불고우리는 별채서 지낸께로 안채가 비기는 해라우.그라제마는 우리 집안의 내력이 짓든 데라서맴으로는 지금도 쓰고 있단 말이요” 라고 은근하고 느린 사투리로 답한다. 집안의 내력이 짓든 데라서 남에게 방을 내어주기가 힘들다는 안주인의 말에 순순히 그 집을 나오면서, 시인은 볕 좋은 마루가 드는 그 집의 방 한 칸을 벌써 마음에 들였다고 고백한다. 

‘마음으로는 지금도 쓰고 있는 집’. 나는 집을 향한 그 마음이 어떤 것일지를 안다. 지금은 고구마를 까주시던 외증조할머니도, 무화과를 따주시던 외할아버지도, 마루를 닦던 막내이모도 다 떠나고 없는 나의 외갓집. 아직도 혼자 쓸쓸히 우리를 기다리고 있지는 않은지 편지라도 써서 안부를 물어보고 싶은 집. 몇번이고 제 살던 곳을 떠나 도시를 떠돌다 마침내는 남방의 먼 나라까지 왔으면서도 한번도 내 마음에서 떠난 적 없는 어린 시절의 외갓집. 다시 돌아간다면 아침 햇살과 저녁 노을이 흘러간 세월만큼 앉았다 갔을 오래된 마루를 몇번이고 쓰다듬어 주고 싶은 그 집을, 나도 마음으로는 지금도 쓰고 있기 때문이다. 
 
글쓴이: 채인숙 / 2015년, <실천문학> 오장환 신인문학상을 받으며 등단했다. 문예창작을 전공하고 라디오 작가와 방송 다큐멘터리 작가로 일했다. 한,인니 문화연구원 부원장으로 일을 돕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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