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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칼럼 자바에서 시를 읽다 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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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인숙의 독서노트
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6,352회 작성일 2017-07-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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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많던 여학생들은 어디로 갔는가
                                 시. 문정희
 
 
학창 시절 공부도 잘하고
특별 활동에도 뛰어나던 그녀
여학교를 졸업하고 대학 입시에도 무난히
합격했는데 지금은 어디로 갔는가
 
감자국을 끓이고 있을까
사골을 넣고 세 시간 동안 가스불 앞에서
더운 김을 쏘이며 감자국을 끓여
퇴근한 남편이 그 감자국을 15분 동안 맛있게
먹어치우는 것을 행복하게 바라보고 있을까
설거지를 끝내고 아이들 숙제를 봐주고 있을까
아니면 아직도 입사 원서를 들고
추운 거리를 헤매고 있을까
당 후보를 뽑는 체육관에서
한복을 입고 리본을 달아주고 있을까
다행히 취직해 큰 사무실 한켠에
의자를 두고 친절하게 전화를 받고
가끔 찻잔을 나르겠지
의사 부인 교수 부인 간호원도 됐을 거야
문화센터에서 노래를 배우고 있을지도 몰라
그리고는 남편이 귀가하기 전
허겁지겁 집으로 돌아갈지도
 
그 많던 여학생들은 어디로 갔을까
저 높은 빌딩의 숲, 국회의원도 장관도 의사도
교수도 사업가도 회사원도 되지 못하고
개밥의 도토리처럼 이리저리 밀쳐져서
아직도 생것으로 굴러다닐까
크고 넓은 세상에 끼지 못하고
부엌과 안방에 갇혀 있을까
그 많던 여학생들은 어디로 갔는가
 
출처: 오라, 거짓 사랑아 (민음사. 2001년)
 
 
NOTE*************
여고 다닐 적의 친구들을 몇 십 년 만에 만났었다. 작년 여름의 일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부끄럽지만 나는 공부를 열심히 했던 기억이 없다. 대학 가려고 버둥거리면서 마지막 발악을 하던 고3 때를 제외하곤 내가 언제 공부라는 걸 진지하게 해 본 적이 있었던가 싶다. 다시 생각해도 부끄럽고 후회스럽다. 작년 여름에 다시 만난 여고 시절 친구들은 한결같은 모범생들이었다. 친구들과 연락이 닿았을 때 구부정하게 앉아서 공부하던 그녀들의 뒷모습이 먼저 떠올랐던 걸 보면 확실히 나와는 다른 공부 벌레들이었다.
 
문정희는 그토록 열심히 공부하던 여학생들은 다 어디로 갔냐고 안타까운 분노를 터뜨리고 있지만, 다행히 친구들 여섯 명 중에 절반은 어엿한 선생님이 되어 있었다. 다른 친구들도 수간호사로 일하고 있거나 직장을 다니며 씩씩하게 살고 있었다. 한 마디로 나만 백수였다. 나는 문정희의 시 속에 등장하는 그 많던 여학생 중의 한 명이었던 것이다. 그나마 알량한 글재주로 밥벌이를 해 왔지만, 따지고 보면 시를 열심히 쓰지도 못 했고 뭔가 타인에게 도움이 될 만한 글을 열심히 써 본 적도 없다. 그나마 학창 시절 공부도 잘하지 못했고 특별 활동에도 뛰어나지 못했으니 이나마한 것을 다행이라고 위로 삼아야 하는 것인가. 이제부터 절치부심으로 열심히 글을 써서 시집도 내고 수필집도 내리라 뼈를 깎으며 다짐해야 하는 것일까. 오랜 시 한 편 읽고 마음이 심란한 밤이다.
 
 
채인숙/ 시인. 2015년 <실천문학> 오장환 신인문학상을 받으며 등단했다. 카피라이터, 라디오 작가, 다큐멘터리 작가로 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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