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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칼럼 51. ‘9.30사태’의 전말(顚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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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문환의 주간포커스
작성자 jktbizdaily1 댓글 0건 조회 8,860회 작성일 2014-07-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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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부  승자들의 행진-마지막 회
 
10월 1일 새벽 사복 경찰정보원인 수낏만(Sukitman)은 심상치 않은 이날의 정황을 파악하려고 서성거리다 우익 장성들을 납치한 혁명군에 의해 할림 지역으로 연행되고 말았다. 오후에 이곳을 가까스로 탈출하여 바이파스 지역(현 Jalan Gatot Subroto)을 지날 때, 이번에는 그의 거동을 의심한 대통령 경호실 순찰대에 체포되어, 전략사령부로 끌려간다. 그의 진술에 의해, 특전사 요원들은 그를 대동하여 10월 3일 자정을 넘겨 뽄독 그데, 루방 부아야(Lubang Buaya) 지역에 있는 지름 75센티 깊이 12미터의 폐기된 우물 속에서 차마 눈을 뜨고 볼 수 없는 참혹한 형체의 시체들을 찾아 내게 된다. 10월 4일 아침 수하르또 장군, 나수띠온 장군 등 고위 장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특전사 제1대대장 산또사 소령의 지휘아래 신똥 빤자이딴 소대원들과 해병대 잠수부들에 의해 시체 인양작업이 진행되었다. 이날 밤 8시 수하르또 장군은 전국 라디오 방송망을 통해 공산당과 군부가 개입된 쿠데타의 진상과 그들의 잔혹성을 전국민에게 알리게 된다. 그리고 다음 날인 10월 5일 ‘국군의 날’ 행사는 취소되고, 대신 이들 7명의 희생자에 대한 장례식이 깔리바따 국립묘지에서 거행되었다. 수까르노 대통령은 자신을 대리하여 수반드리오 제1부수상을 장례식에 파견하였으나, 육군 측의 거부로 발걸음을 돌려야 했다. 10월 10일 자로 국가안보질서회복사령부(Kopkamtib)가 출범하여 수하르또 소장이 사령관에 취임하였고, 10월 16일에는 일계급 특진하여 육군참모총장직에 오르게 된다. 이후 특전사, 전략사령부, 실리왕이 사단 등이 주축이 되어 사건 관련자 체포는 물론 공산당을 발본색원하는 정풍운동이 1966년까지 자바, 발리 섬 전체와 수마뜨라 일부 지역을 광풍처럼 휩쓸게 된다. 특히 공산당과 상극관계로 치달았던 이슬람계는 선봉에 나서게 된다. 이 정풍운동의 주 타겟은 골수 공산당원뿐만 아니라 공산당 동조자로 판단되는 민간인으로, 그 범위는 실로 광범위하였다. 이 당시 희생된 주민 수는 적게는 5십만 명에서 3백만 명이라는 숫자까지 거론되는, 엄청난 민족적 비극을 초래하여 그 후손들은 현재까지도 그 악몽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다. 
 
당시 수도경비사령관으로 사태발생 당일 새벽부터 수하르또 진영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었던 우마르 소장은 대장으로 예편한 후, 1983년 부통령 직위에까지 올랐으나, 당시 수도권에 남아있던 최정예 부대인 특전사령관으로서 수하르또 진영이 쿠데타군을 소탕하는데 일등공신이었던 사르워 에디 위보워 대령은 국군사관학교 교장, 주한대사를 거치며 중장으로 예편하였다. 1983년 대선 당시엔 그의 청렴성에 대한 국민들의 인기에 힘입어 국군사령관인 유숩 대장, 회계감사원장인 우마르 대장과 함께 강력한 부통령 후보로 거론되었으나, 우마르 대장에게 그 자리를 양보하여야 했다. 사르워 에디 특전사령관과 더불어 당시 실리왕이 사단 참모장으로서 쿠데타군 소탕작전에 혁혁한 공적을 세운 다르소노 준장은 직후 실리왕이 사단장으로 승진하여 초기에는 순탄하였으나, 이후 수하르또 측근들의 견제를 받아 중장으로 예편하여 아세안(ASEAN) 사무총장이라는 직책에 머무르며 권력의 중심에서 멀어지게 된다. 1980년에는 자카르타 주지사를 11년간이나 역임한 알리 사디낀과 함께 ‘50인 청원그룹(Petisi 50)’을 결성하여 가장 대표적인 반정부 인사가 되어 4년간의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전략사령부 참모이면서 전략사령관인 수하르또 장군과 특전사령관인 사르워 에디 대령의 연락책을 맡았던 와호노 대령은 중장으로 예편하여 동부 자와 주지사를 거쳐 국회의장까지 역임하면서 입신하게 된다. 수하르또의 중부 자와 지역사령관 시절부터 줄곧 정보참모로서 그림자 역할을 하였던 알리 무르또뽀(Ali Moertopo) 대령은 수하르또의 최측근으로 자리매김하며 2인자의 반열에 올랐으나, 1974년 1월 15일 발발한 반일폭동을 전환점으로 내리막길에 접어들게 된다. 네 번에 걸린 심장마비 끝에, 1984년 60세를 일기로 사망하면서 알리 무르또뽀의 군 인맥은 고스란히 베니 무르다니 장군에게 승계되게 된다.
 
특전사 소속으로 10월 1일 오후 쿠데타군이 점령하고 있던 라디오 방송국 건물을 탈환하는 일선 중대장이었던 화이잘 딴중 중위는 수하르또 정권 말기 국군총사령관, 정치안보조정장관으로 크게 입신하였으나, 화이잘 딴중의 직속 부하였던 신똥 빤자이딴 소위는 분쟁지역인 동띠모르 관할 지역사령관으로 재직 중이던 1991년 11월 발생한 산타 크루즈(Santa Cruz) 공동묘지 학살 사건에 지휘관으로서의 책임을 끌어안고 예편하게 되어, 미래의 참모총장 감을 잃어버리게 되는 아쉬움을 남기기도 하였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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