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칼럼 56. 도심 속의 일본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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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문환의 주간포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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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년 3월 초, 자바를 점령하는 일본제국군 병사들의 일부는 자전거를 타고 바타비아(자카르타)에 입성하였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 도심 곳곳에 ‘일본군의 눈부신 승전’이라 써 있는 선전용 입간판이 나붙었다. 선전문구를 자세히 들여다보는 주민들의 표정이 진지하게 보였다. 그리고 곧 일본은 ‘아시아의 빛, 아시아의 지도자, 아시아의 보호자’라는 허울 좋은 슬로건을 내건, 소위 ‘3A 운동’을 실시하며 착취정책으로 전환하기 위한 연막탄을 터뜨렸다.
일본이 패망한 지 13년이 지난 1958년 1월, 인도네시아와 일본간에 ‘대일청구권협상’이 타결되었다. 무상 3억불, 유상 2억불의 거대한 자본력을 앞세워 산업계를 독점할 일본 시행사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순식간에 인도네시아 경제지도는 온통 일본 깃발로 뒤덮였다. 그리고 수도 자카르타 의전도로인 땀린가와 수디르만가에 일본기업 사옥들이 거만하게 치솟기 시작했다. 미쓰이가 축성한 땀린가의 위스마 누산따라 빌딩을 필두로, 스카이라인 빌딩,수디르만 거리의 수밋마스 빌딩, 도요타 사옥들이 그들이다. 그러나 이 즈음 대학 캠퍼스 내에선 일본에 대한 경제예속화의 우려가 표출되기 시작했다. 1974년 1월 전국적인 반일폭동이 터져 나왔다. 계란투척 세례를 맞은 다나카 수상이 방문일정을 앞당기며, 수하르또 대통령이 친히 동행한 헬리콥터에 부랴부랴 몸을 싣고 할림 국제공항을 경유하여 귀국하였다. 국제적인 뉴스거리가 된 다나카의 방문사고는 그 후유증이 만만치 않아 기존 인도네시아 권력구도의 근간을 바꿔 놓았다. 그리고 떠오르는 별들이 하나 둘 등장한다. 주한 총영사로 재직 중이던 베니 무르다니 준장이 수빠르조 루스땀 외무부 아태총국장의 긴급호출 전화를 받은 지 24시간 만에 자카르타에 도착하였다.
그로부터 짧지 않은 세월인 24년이 또 흘렀다. 태국에서 전염되어 온 외환위기가 밀어 닥친 것이다. 소위 ‘IMF사태’가 터진 것이다. 캉드쉬 총재가 점령군처럼 팔짱을 끼고 내려 꼰아 보는 의자에 앉아 430억불의 피를 수혈 받겠다는 협정서에 서명하는, 32년간의 절대군주도 치욕스런 모습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직후 일본의 신화적인 기업인 소니 사가 인도네시아에서 철수하자, 사무라이 시절부터 내려온 단체행동의 습관이 몸에 베어서인지, 그 뒤를 따라 키가 조금 작은 일본 기업들도 ‘묻지마’ 철수를 단행한다. 일본기업이 빠져나간 공업지역은 썰렁했다. 그 빈 공간을 팔을 걷어 부친 한국기업들이 메우기 시작하였다. 한국기업들은 눈깜짝할 사이 대 인도네시아 투자 5위국가로 올라 섰으며, 8번째 교역 파트너 국가가 되었다. 30년 전 만 해도 오지 중의 오지였던 깔리만딴은 한국기업가들에겐 이제는 ‘낙원’ 이고, 아직도 구석기시대적 생활양태가 남아있는 파푸아 주민들의 화살과 창검도 겁내지 않는다. 1995년경 원조 한국기업들인 꼬린도, 꼬데꼬사가 그 ‘이상한 나라’에 과감하게 상륙했던 파푸아 지역까지, 지금은 대한민국 재계서열 상위그룹치고 그곳에 발을 딛지 않은 기업이 드물 정도이다.
최근 한 일본인과의 대화에서 초, 중 과정만 개설되어 있는‘자카르타 일본인학교’가 포화상태가 되어 더 이상 학생들을 받아들일 수 없는 상황이라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몇 년 전만 해도 불과 600명이던 학생수가 최근 1,400명으로 급증하였다고 한다. 한때 1만 명 선으로 떨어졌던 일본인 재외국민수가 현재 3만 명을 넘어 섰다고 한다. 한국기업들이 자원과 에너지원을 찾아 수마뜨라 섬에서 파푸아 섬까지 영역을 넓히는 사이, 일본인들은 자동차, 유통, 금융, 인프라 업종을 들고 주로 수도권 근교에 둥지를 틀며 권토중래하고 있다. 최근엔 인도네시아 대도시들의 고질병인 교통체증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자카르타만 하더라도, 모노레일, 도시철도 사업이 동시에 착공되고 있다. 특히 도시철도 분야는 일본 관치은행(JBIC)의 자금조달을 통해 일본의 대기업들이 시행사로 지정되어 속속 들어오고 있다.
요즘 한낮에 자카르타 도심거리에 작업복 차림의 나이 지긋한 일본인들이 여러 명씩 그룹을 지어 도보로 이동하며 누군가로부터 열심히 설명을 들으며, 메모하며, 사진 찍는 장면을 쉽게 볼 수 있다. 25년 전 자카르타 중심부인 땀린거리 한 가운데서 디럭스 호텔을 짓느라 분주하고, 그 곳에서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슬리피(Slipi) 고가도로 공사현장 주변에서 현지인들을 진두지휘하던 한국인의 모습을 자주 보던 기억이 되살아난다. 지금 눈 앞에 어른거리는 작업복 차림의 일본인들이 한국인이었으면 하는 미련이 남아 있는 것은 무슨 연유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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