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칼럼 33. 15년 전 오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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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문환의 주간포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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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5월 12일 유도요노 장군은 미국 웹스터대학 석사과정 동창생인 누르홀리스 마짓과 힐튼호텔 일식당 니뽄깐에서 부부동반으로 저녁식사 중이었다. 가두시위를 벌이던 뜨리삭띠 대학 학생이 총탄에 맞아 사망한 것 같다는 급보를 받자마자 식사를 멈추고 황급히 자리를 떴다. 유도요노 장군은 당시 3성 장군으로 인도네시아 국내 정치를 관장하는 국군사령부 정치사회 참모부장(Kepala Sospol ABRI)이었다. 이날 사망한 대학생 장례식이 그 다음날 뽄독 인다 지역 따나 꾸시르(Tanah Kusir) 공동묘소에서 거행되었다. 4월, 5월 내내 지속된 대학생 시위를 주도하였던 전국이슬람학생연맹 의장이던 화흐리 함자(현 PKS당 사무차장)와 그들의 멘토였던 아민 라이스가 이날의 장례식에 참석하여 CNN 방송의 인터뷰에 응하고 있었다.
장례식이 끝난 5월 13일 오후시간 대부터 동료 4명을 잃고 울분을 참지 못한 대학생들이 가두로 뛰쳐나오자 이에 공분한 시민들이 합세하여 삽시간에 자카르타 따나 아방, 번둥안 힐리르 상가와 주유소에 방화하여 약탈과 파괴행위로 이어졌으며, BCA은행은 주 약탈 대상이었다. 그 다음 날인 5월 14일에는 폭도들이 자카르타 화교상권 중심지인 꼬따(Kota) 지역으로 몰려 들어 방화, 파괴행위를 일삼았다. 꼬따 전 지역은 불바다가 되었으며, 화교들은 부녀자들을 감싸 탈출하기에 급급하였다. 이 과정에 화교 부녀자들에 대한 심각한 인권유린 행위가 자행되었음이 사후에 유포된 비디오로 확인되기도 하였다. 이틀간 계속된 파괴행위가 진압된 이후, 이젠 대학생들이 국회의사당을 점거하기 시작했다. 국회 의사당 돔 지붕에 올라가 대통령의 퇴진과 개혁을 부르짖으며 철야농성에 들어갔다. 메드코 그룹 사주 아리핀 빠니고로가 물질적으로 지원하고, 아민 라이스가 주도하는 ‘피플 파워’는 5월 20일 ‘국민각성의 날(Hari Kebangkitan Nasional)’을 맞아 대통령궁 바로 턱 밑인 모나스 광장에서 ‘100만 명 민주행진’을 기획하고 있었다. 군 당국은 이 시위만은 무슨 희생을 치르더라도 막아야 할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군의 강경진압과 시위대 측의 시위강행 입장이 팽팽히 대립되자 ‘제2의 천안문사태’를 우려한 외국인들은 월요일인 18일부터 엑소더스 행렬에 줄을 섰다. 미국은 필리핀 수빅만에 정박 중이던 제7함대 소속 수송선을 발리에 급파하여 자국민들을 그곳으로부터 소개시킬 준비가 되어 있었다. 일본 당국도 일본항공 전세기를 줄줄이 보내 자국민들을 거뜬히 실어 날랐다. 그러나 한국 교민들에 대한 대책은 보이지 않았다. 교민들의 아우성 속에, 겨우 몇 대의 대한항공 특별기가 뒤늦게 도착하였지만, 턱없이 부족한 좌석 때문에 또 한차례의 난리를 겪어야 했다. 이 지경에 이르자, 몇몇 한국계 대기업들이 해답을 내어 놓았다. 원칙적으로 직원 가족들만 귀국시키고, 산업역군들은 그대로 남아 직장과 자택을 지키기로 솔선수범한 것이다. 해병전우회 소속 교민들은 빨간 모자를 쓰고 동네 자경대를 만들었다. 디 데이(D-Day)인 5월 20일이 되자 한국인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외국인들은 탈출하여 수도 자카르타는 유령의 도시가 되었다. 긴 밤을 지새운 시민들은 과연‘제2의 천안문사태’가 일어날까 걱정하면서 새벽부터 TV 채널을 돌렸다. ‘피플 파워’의 기수 아민 라이스가 갑자기 브라운관에 등장하여 “유혈사태를 막기 위해‘100만 명 민주행진’을 전격 취소한다”는 멘트를 하고 사라졌다.
모나스 광장의 행진은 좌절되었지만, 대학생들에 의한 평화적인 시위는 계속 되어 이번에는 무대를 국회의사당으로 옮겼다. 사태의 심각성을 간파한 권력 중심부에선 서서히 자중지란이 일기 시작했다. 대통령은 이슬람 지식인을 대표하는 누르홀리스 마짓을 불러 고견을 들었다. 이어 학계를 대표하는 부디산또소 UI대학 총장이 대통령 앞에서 장시간 직언하였다. 그리고 국회에서도 반란이 일어났다. 하르모꼬 의장, 부의장인 샤르완 하밋 중장이 주도하여 ‘수하르또 하야’ 결의안을 이끌어 냈다. 곧이어 기난자르 경제조정부장관 외 12명의 경제각료들이 일괄 사표를 제출하였다. 그리고 저 멀리 대양을 건너 클린턴 대통령과 울브라이트 국무장관이 친히 전화를 걸어 수하르또의 조속 퇴진을 권유하였다. 토니 블레어 영국 수상과 존 하워드 호주 수상도 이에 가세하였다. 이쯤 되니 정권유지의 마지막 보루인 군부도 입장을 밝혀야 할 차례가 되었다. 위란또 국군사령관과 유도요노 정치사회 참모부장은 대통령을 긴급히 면담하여 “주변상황이 더 이상 국군으로 하여금 대통령을 지킬 수 없게 만들었기에 대통령에 대한 지지를 철회한다.”는 입장을 전달하였다. 그리고 이틀 후인 1998년 5월 21일 오전 10시, 수하르또는 32년간의 장기집권에 종지부를 찍고, 전격적으로 하야 성명서를 읽어 내려갔다. 그리고 부통령인 하비비가 제 3대 대통령직을 승계하였다. 바로 15년 전 오늘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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