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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칼럼 45. `9.30 사태`의 전말(顚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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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문환의 주간포커스
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2,811회 작성일 2014-07-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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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부  공산당(PKI)의 팽창
                                                                                        
1923년 수마뜨라 방까섬(Pulau Bangka)에서 출생한 아이딧은 ISDV에 가입한 후 마르크시즘에 심취되면서, 한편으로는 당대의 민족주의자들인 수까르노, 핫따, 아담 말릭 등으로부터 사사 받게 된다.
 
후일 초대 부통령에 취임하는 핫따의 수제자가 되었으나, 사상노선에 대한 견해차이를 보이면서 결국 결별을 맞게 된다. 그는 1948년 ‘마디운 공산당봉기’ 사건이 실패로 돌아가자, 중국으로 망명하였다가, 그 다음해인 1949년 딴중 쁘리옥항을 통해 재입국을 시도하려다 체포되어 수감되어 버린다.
 
그러나 1945년 족자카르타에서 친분을 맺은 적이 있던 딴중 쁘리옥항 부두노조 간부 샴(Sjam)의 도움으로 아이딧은 곧 석방되었다. 이를 계기로 아이딧은 샴을 공산당에 가입시켰으며, 그를 협력자로 삼아 1955년 총선에서 도약의 발판을 마련하게 된다.
 
1950년에 3천명의 당원으로 재건을 시도한 공산당은 1951년 아이딧, 루끄만, 뇨또 등이 당권을 장악하면서 1954년에 16만 5천명으로 급성장하였고, 1955년 총선에서 16%의 득표율을 달성하여 제4당의 위치에 올라서게 된다. 아이딧은 수까르노의 교도민주주의(Demokrasi Terpimpin) 노선에 적극 순응하며, 서부 이리안(Irian Barat) 탈환을 당론으로 정하는 등, 수까르노의 정책에 적극 편승하였다.
 
1957년엔 전국노동조합을 이끌고 있던 샴을 자신의 보좌관으로 임명하여, 그 조직으로 하여금 네덜란드인 소유기업과 외국인기업들을 강제수용하는 전위대 역할을 자임하자, 수까르노는 이에 대한 보답으로 아이딧을 공산당 당수직위에 오르도록 적극 후원하게 된다. 이후 아이딧 당수 체제하의 인도네시아공산당은 1965년도에 이르러 3백만 명이라는 당원을 확보하며 인도네시아 최대 정당으로 올라섰으며, 소련, 중국에 이은 세계 세 번째 규모의 공산당으로 성장하였다.
 
수까르노 정부를 떠받쳐오던 군부, 민족주의 진영, 이슬람계, 공산당간의 사각균형이 깨지며 공산당 우위로 변모되자, 수까르노는 1964년에 이르러 전통적인 ‘친소정책’에서 ‘친중정책’으로 급선회하며, ‘자카르타-프놈펜-베이징-평양’이라는 새로운 동맹축을 구축하게 된다.
 
이 동맹관계를 다지기 위해 수까르노 대통령과 수반드리오(Subandrio) 외무장관은 1965년 3월 2일 극비리에 프놈펜을 방문하게 되며, 이보다 앞선 1964년 11월과 12월에 첸의(陳毅) 중국 외무장관은 두 차례에 거쳐 자카르타를 드나들게 된다.
 
두 번째 방문 시점인 12월 3일엔 양국 외무장관 사이에 상호협력 의정서가 교환되었다. 이때 수까르노 대통령은 첸의 장관에게 “중국이 핵기술을 인도네시아에 이전하여 줄 것과 인도네시아 영토 내에서 핵실험을 해줄 것”을 요청하자, 이를 거절한 중국대표단을 향하여 책상을 치며 흥분하는 돌발상황이 발생하게 된다.
 
일단 양국간에 의정서가 교환되자마자 일련의 후속조치가 쏟아져 나오기 시작하였으니, 1965년 1월 7일 적대관계이던 말레이시아가 유엔안전보장이사회 비상임이사국으로 선임된 것에 반발하여 인도네시아는 유엔을 탈퇴하는 ‘깜짝쇼’를 연출하였고, 1월 15일엔 공산당과 그 꼭두각시인 민족전선(Front Nasional)이 공동성명을 내고 말레이시아와의 대결정책을 승리로 이끌 혁명전사들을 양성한다는 명분으로, 정부로 하여금 천오백만 명의 농민, 노동자들을 무장시킬 것을 촉구하였다.
 
1월 15일 국영 안따라(Antara) 통신은 중국이 인도네시아에 1억불 차관을 제공하기로 하였다는 뉴스를 쏘아 올리는가 하면, 수반드리오 외무장관을 단장으로 하는 대규모 정부사절단이 1월 말에 베이징을 방문하여 군사협력 방안까지도 논의하게 된다.
 
1965년 중반에 들어서면서 양국간의 교류는 본격화되어 수반드리오 장관은 인도네시아 공산당 제3인자인 뇨또(Njoto)와 함께 1965년 6월 초 광동성에서 주은래를 다시 만났고, 한 달 후엔 아이딧, 알리(Ali Sastroamidjojo) 수상 등 정부요인들을 대동한 수까르노가 직접 상하이를 방문하여 주은래 수상과 정상회담을 갖게 된다.
 
이 자리에서 중국은 제5군 창설에 필요한 소총 10만 정을 무상 공급하기로 약속하였으며, 이에 대한 후속조치를 위해 수반드리오 장관, 무르짓(Murjid) 장군, 물요노(Mulyono) 제독으로 구성된 군사사절단을 베이징에 파견하였다.
 
9월부터는 국회사절단, 경제사절단, 공군사절단, 국방대학원, 문화사절단, 기자협회 등 온갖 사절단이 베이징을 안방 드나들 듯 왕래하게 된다. 그러나 주은래가 수까르노에게 약속한대로 10만 정의 무기를 공급하는 시점이 임박하자, 중국 수뇌부는 고민에 빠지기 시작했다. 핵기술 이전에 대해 거부의사를 밝혔다고 첸의 외무장관 면전에서 범한 외교결례를 보고받은 바 있는 모택동과 주은래는 천방지축의 수까르노가 중국을 악용할 가능성에 대해 경계하고 있었다.
 
모택동을 비롯한 중국 수뇌부는 돌출적인 성격의 수까르노의 역할에 우려를 나타내며, 인도네시아에서의 혁명과업은 수까르노를 배제하고 아이딧 당수의 주도로 수행되어야 한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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