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칼럼 자바에서 시를 읽다 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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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인숙의 독서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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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
시, 서효인
사랑하는 여자가 있는 도시를
사랑하게 된 날이 있었다
다시는 못 올 것이라 생각하니
비가 오기 시작했고, 비를 머금은 공장에서
푸른 연기가 쉬지 않고
공중으로 흩어졌다
흰 빨래는 내어놓질 못했다
너의 얼굴을 생각 바깥으로
내보낼 수 없었다 그것은
나로 인해서 더러워지고 있었다
이 도시를 둘러싼 바다와 바다가 풍기는 살냄새
무서웠다 버스가 축축한 아스팔트를 감고 돌았다
버스의 진동에 따라 눈을 감고
거의 다 깨버린 잠을 붙잡았다
도착 이후에 끝을 말할 것이다
도시의 복판에 이르러 바다가 내보내는 냄새에
눈을 떴다 멀리 공장이 보이고
그 아래에 시커먼 빨래가 있고
끝이라 생각한 곳에서 다시 바다가 나타나고
길이 나타나고 여수였다
너의 얼굴이 완성되고 있었다
이 도시를 사랑할 수밖에 없음을 깨닫는다
네 얼굴을 닮아버린 해안은
세계를 통틀어 여기뿐이므로
표정이 울상인 너를 사랑하게 된 날이
있었다 무서운 사랑이
시작되었다
출처: 여수 – 문학과 지성
NOTE****************
여수, 불광동, 곡성, 강릉, 부평, 자유로, 송정리역, 나주, 서귀포, 장충체육관, 지축역, 진주, 무안…….. 서효인의 시집 속에는 수많은 지명이 등장한다.
공간 속에 숨겨진 이야기들을 예민하게 드러내고자 하는 시인의 욕망이 역마살을 끼고 전국을 떠돈다. 시집을 읽으면서 독자들도 함께 수많은 장소의 이야기 속으로 빠져든다.
어떤 장소의 사적이거나 혹은 공적인 역사의 기록들이 시로 다시 탄생하는 순간을 읽어내는 짜릿한 공감과 감동을 느낄 수가 있다.
시집에는 사랑하는 아내의 고향인 ‘여수’에 관한 이야기나 치약공장에 다니던 고모가 사는 ‘나주’의 이야기도 있지만, 공적인 역사가 기록되는 장소에 관한 이야기들이 더 많다.
예를 들자면, 자유로를 달리는 출근길 버스에서 1968년의 무장공비 김신조를 떠올리고(자유로), 장충체육관에서는 1970년대의 프로레슬링과 1980년대의 체육관 선거, 최근의 외국 뮤지션 공연이 펼쳐지며(장충체육관), 마산의 자유무역단지에서는 이제는 중년이 된 70년대의 여공 누나들을 생각하는 식이다. 그리고 그 공간에서 시인은 "머리를 조아리고 피가 솟을 때까지 바위에 이마를 찧으며, 성실하겠다고 다짐"(강화)한다.
어떤 공간 속에 서 있건 시인은 통렬한 탐색과 반성의 시를 쓰고, 우리는 그의 시를 읽으며 덩달아 시간의 역사를 쌓아가는 듯한 묘한 경험을 얻는 시집이었다.
***
채인숙/ 시인. 2015년 <실천문학> 오장환 신인문학상을 받으며 등단했다.
라디오와 다큐멘터리 작가로 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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