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칼럼 자바에서 시를 읽다 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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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인숙의 독서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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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여름의 끝
시. 이성복
그 여름 나무 백일홍은 무사하였습니다 한차례 폭풍에도 그 다음 폭풍에도 쓰러지지 않아 쏟아지는 우박처럼 붉은 꽃들을 매달았습니다.
그 여름 나는 폭풍의 한가운데 있었습니다 그 여름 나의 절망은 장난처럼 붉은 꽃들을 매달았지만 여러 차례 폭풍에도 쓰러지지 않았습니다.
넘어지면 매달리고 타올라 불을 뿜는 나무 백일홍 억센 꽃들이 두어 평 좁은 마당을 피로 덮을 때, 장난처럼 나의 절망은 끝났습니다.
(출처: 그 여름의 끝-문학과 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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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복 시인을 흔히 ‘시인들의 시인’이라고 부른다. 어느 신문 기사에서 1980년대 이후 활동을 시작한 시인들 가운데 이성복의 ‘세례’를 받지 않은 이는 없다는 문장을 읽은 기억이 난다. 그는 후배 시인들에게 교과서와 같은 존재이다. 기존 시인들에게 조차 그에게서 새로운 서정적 영감과 자극을 얻는다는 건 의심할 필요가 없다. 좀 경박하게 표현하자면 시를 ‘진짜 잘 쓴다’.
이 시집은 내가 대학교 2학년 때 시 창작을 전공으로 선택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처음 읽었는데, ‘시는 이렇게 쓰는 거구나’ 감탄하며 책장을 넘겼던 기억이 남아 있다.
‘그 여름의 끝’은 시집의 제목이자 대표시인데, 여름만 오면 저절로 떠오르는 대표적인 시이기도 하다. 사실 백일홍을 은유의 수단으로 썼을 뿐, 이 시는 인간이 절망을 딛고 일어서는 지난한 과정을 보여 준다. 시집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는 연애시이므로, 어쩌면 사랑에 실패하고 실연의 상처를 빠져나오는 시인의 모습을 그린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언제나 느닷없이 폭풍처럼 닥쳐오는 실연과 시련을 맞지만 마냥 좌절할 수 없을 것이며, 어느 순간엔가 장난처럼 절망이 끝나고 `우박처럼 붉은 꽃'을 매달고 피는 백일홍이 될 것이라고 시인은 진술한다. 시인의 진술이자 동시에 백일홍의 고백이다. 절망을 딛고 피어 난 백일홍은 아름답고 대견스럽다. 물론 그 절망이 끝나면 또 다른 절망이, 다음 여름처럼 우리는 기다리는 게 삶이겠지만 말이다.
* 채인숙 / 시인. 2015년 <실천문학> 오장환 신인문학상을 받으며 등단했다. 라디오와 TV다큐멘터리 작가로 일했다. 1999년 인도네시아로 이주하였고, 인도네시아 문화 예술에 관한 칼럼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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