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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칼럼 바띡, 느린 영혼의 여행 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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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공경의 잘란잘란
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7,401회 작성일 2017-08-2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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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 바띡 혹은 인도-유로피안(Indo-European) 바띡시대 (1840-1940년)
 
글. 사공 경 / 한인니문화연구원장 
 
*무단복제 금지
 
 
네덜란드 바띡 혹은 인도-유로피안(Indo-European)바띡은 네덜란드의 영향을 받은 자바 바띡을 말한다. 네덜란드 바띡은 1800년대에 시작되어 뻐깔롱안(Pekalongan)을 중심으로 발전하였다. 1800년대부터 유럽인, 중국인, 아랍인이 바띡 산업에 참여하면서 바띡 상품이 다각화되었고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게 된다.
 
여기서 말하는 인도 유로피안은 인도네시아에 오래 살아서 그 문화에 동화된 유럽인을 말한다. 주로 네덜란드인을 지칭하며, 혹은 네덜란드인이나 유럽인과 결혼한 중국, 아랍, 인도네시아인을 말한다. 또한 그들의 자녀를 말하기도 한다. 당시에 인도인 사회와 인도네시아인들은 사이가 좋았다. 인도인들은 자바어에 능통하고, 중국어와 아랍어도 가능하였다.
 
인도인들 중 여자들이 주로 바띡 사업을 하였다. 1840-1940년에 인도사람들은 인도네시아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바띡사업을 시작한다. 그 이전에는 바띡은 사고팔고 하는 상품이 아니었다. 네덜란드 바띡 문양은 유럽의 식물과 네덜란드 전래 이야기에 대한 것이 많았는데, 특히 우아하고 잔잔한 꽃과 나비, 새, 동화 속 등장인물, 공원을 거니는 사람, 애완동물, 원 모양 등을 자주 볼 수 있었다. 자주 사용된 색은 빨간색, 빨간색과 파란색, 빨간색과 하얀색 등이며, 가끔 갈색도 사용하였다. 이처럼 네덜란드 바띡은 기존 디자인의 틀을 깨며 더욱 화려해졌다. 네덜란드 바띡을 제작하는 사람들은 빠르고 섬세하게 만들어서 가격은 비쌌지만 많은 사람들이 선호하기도 하였다. 네덜란드 바띡사업은 사롱(Sarong)과 긴 천(Kain Panjang)을 많이 생산하였다.
 
하르멘 벨후숀(Harmen Veldhuijsen)의 “Batik Belanda 1840-1940”이라는 책에 네덜란드 바띡에 대한 역사와 중요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이 책에 의하면 네덜란드 바띡 시대는 다음과 같이 구분될 수 있다.
 
1840-1860: 네덜란드 바띡(Batik Indo-European) 개척시대
까로리나 조세피나 프란크에몬트(Carolina Josephina von Fraquemont)는 수라바야에서 네덜란드 바띡의 산업화를 개척한 여성이다. 그녀는 바띡의 가운데 부분(Badan)을 동화의 주인공과 꽃이나 다른 문양을 반복되게(Ceplokan) 그리는 것으로 유명했다.
 
스마랑에서 제작한 바띡 중에 말라유(Melayu) 남자가 쓴 시를 형상화한 작품이 있는데, 깨끗한 사랑이 단아하면서도, 그 사랑에 대한 열정이 잘 표현되어 있다. 남자가 사랑하는 여자에게 꽃을 주고 말을 타고 떠나는 장면이 반복적으로 그려져 있어서 더욱 애절하게 느껴진다.
 
The carriage is ready to go./ Goodbye, young lady, goodbye/ I must go away./ My heart is feeling sad./ To go is hard/ but to stay is not allowed./ When I am afar/ Please do not forget me./ And if I would die/ May your angel-heart/ keep thinking of me./ Come to see my grave/ but do not shower it with flowers./ Shower it with your own tears
 
(떠나서 슬프다, 날 잊지말아다오, 내가 죽어도 당신의 천사 같은 마음은 계속해서 날 생각해주길. 내 무덤에 찾아와 주오. 그러나 내 무덤을 꽃이 아닌 당신의 눈물로 적셔주시오.)
 
이 시기(1840-1860년)는 또한 면(cotton)을 본격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한 시대이기도 하다. 특히 흰 면 중에서 최상인 쁘리미시마(Primissima)로 바띡을 많이 만들었다. 긴치마나 통치마(Sarong)를 만들고 남은 천은 식탁보, 손수건, 또는 장식품으로 만드는 등 자투리 천 하나도 버리지 않고 활용하였다.
 
초기 네덜란드 바띡은 염색과 왁싱의 기술발전에 대해서는 기여를 했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주목받지는 못했다. 족자처럼 청색과 흰색만 사용하는 바띡 끌레안(Batik Kelengan)을 만들다가 차차 빨간색과 배경을 흰색으로 하는 바띡 방방안(Batik Bang-bangan), 빨간색에 배경을 청색으로 하는 바띡 방-비루(Batik Bang-biru)로 색이 늘어나고 발전하였다. 왕궁에서는 청색, 흰색을 사용다가 차차 고동색(Sogan)을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그 당시 대부분의 자바사람들은 짠띵(cating)에 말람(malam)을 담아 천에 바로 그렸다. 그런데 네덜란드 바띡은 짠띵을 사용하기 전에 연필로 밑그림을 그리는 사전작업을 하여 더욱 정교한 바띡을 만들 수 있었다.
 
바띡 짭(cap)도 이 시기에 뻐깔롱안에서 만들어졌는데, 처음에는 고구마로 만든 도장을 사용하다가 1815년에 나무도장을, 그리고 1845년에는 현재 사용되고 있는 구리로 만든 짭도장을 만들었다.
 
                                                    
1860-1880: 뻐깔롱안을 중심으로 바띡이 산업이 되는 시기
바띡의 인기가 늘어나고, 수요자가 점점 많아지면서 네덜란드 바띡의 대량생산 시대가 열린다. 당시 유명한 디자이너로는 피셔(B. Fisher), 도프(R. Scharff van Dopp), 투롭(J.Toorop), 둔히슨(Dunhijsen), 위트(J. A. de Witt) 등으로 주로 인도-유로피안들로 기록되어 있다. 또한 1870년대부터는 디자이너들이 바띡에 사인을 그려 넣어 자신의 이름을 건 바띡을 만들기 시작하였다.
뻐깔롱안 외에도 바따비아, 스마랑, 수라바야 및 라슴에 바띡공장이 세위지고 해외 수출도 증가하기 시작했다. 라슴에서는 까인 빤장이 많이 생산되었는데, 뚬빨(Tumpal=잎, 그 뜻처럼 착용 시 뚬빨이 앞쪽에 위치)을 양 가장자리에 그리는 특징이 있다. 이는 인디아(India) 영향을 받은 것이다. 또, 바따비아와 찌르본에서는 이깟 끄빨라(Ikat Kepala, 두건)와 슬랜당(Selendang, 숄)이 많이 생산되었는데 아랍영향을 받은 문양이 많다.
 
유럽인들은 사롱을 만들 때 위, 아래쪽에 레이스 문양을 그려 넣었다. 또, 뚬빨에 기하학적인 이등변 삼각형 문양 대신에 아름다운 꽃다발을 그리고 뚬빨 양쪽에는 파판(Papan)을 만들어 이전보다 화려하고 부드러운 문양이 되었다. 미국남북전쟁(1861-1865년)으로 인해 자바에 면이 수입되지 않아 바띡 생산이 어려워져 많은 공장이 문을 닫기도 하였으나 1865년에 정상으로 되돌아왔다.
 
 
 
1880-1890: 네덜란드 바띡의 전성기 시대의 시작
네덜란드인들을 중심으로 많은 사람들이 바띡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이 같은 관심에는 바띡 사업가이며 디자이너인 주이즐렌(Eliza van Zuijlen)의 역할이 컸다. 사업의 중심지는 당연히 뻐깔롱안이다.
 
1890-1910: 전성기를 맞이하는 네덜란드 바띡
주이즐렌(Eliza van Zuijlen), 피셔(B. Fisher), 메첼러(Lien Metzelaar), 와일러(Wiler) 등의 디자이너들 덕분에 네덜란드 바띡 사업은 점점 더 번창한다. 차차 족자와 솔로도 인도 바띡 사업을 시작하게 된다. 족자와 솔로 유명한 인도 바띡 사업자들은 van Gentsch Gottlieb, Jonas, W. F. van Lawick van Pabst, ter Horst, E. Lerasehi와 Gobe이다.
 
반둥에 패션센터 “Paris van Java"가 건립되어 순다족들이 많이 사는 가룻(Garut), 따식말라야(Tasikmalaya) 바띡도 패션센터에 자리 잡게 된다. 네덜란드 식민지 시절 반둥은 점차 플랜테이션 소유주들의 리조트 도시로 변모하였다. 그때 고급 호텔, 레스토랑, 카페, 유럽피안 부티크 등이 많이 생겼고, 반둥은 "자바의 파리"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참고로 현재의 Paris van Java Mall은 2006년 7월에 개장)
 
1910-1940: 네덜란드 바띡 뚤리스(Tulis) 쇠퇴
네덜란드 바띡은 어려운 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제1차 세계 대전(1914-1919)은 유럽 경제에 영향을 끼쳤다. 이어 세계 2차 대전(1939-1945), 일본의 식민지, 인도네시아 독립 혁명은 인도 바띡 사업에 타격을 준다. 이 어려운 시대를 견디어 낸 디자이너들은 리엔 메쯔레르(Lien Metzelaar), 주이즐렌(Eliza van Zuijlen), 보우워(S.E. Bouwer), 도랄(E.M. Dora)l, 시모넷(Simonet), 아르뎀메(J.C. van Ardemme)와 나벨만(M. Naberman)이다. 이중 주이젤렌 어려운 시기를 버티다가 1940년에 인도바띡 공장 중에서 마지막으로 문을 닫는다.
 
 
참고서적: Batik Belanda 1840-1940 Harmen C. Veldhuisen 1993
 
라덴아징까르띠니(Raden Ajeng Kartini, 1879 4 21 ~ 1904)
 
바띡을 이야기하자면 까르띠니를 빼놓을 수가 없다. 그녀는 여성해방운동의 선구자로 인도네시아 정신이 함축되어 있는 전통의상 바띡을 권장하고 보편화 시켰다. 자신도 바띡을 즐겨 입었으며, 직접 바띡 디자인을 창안하고 발전시킨다. 또한 바띡을 인도네시아 여성의 전통적인 복장으로 권장하였다. 그녀가 이슬람 율법에 따라 칩거했던 시기에 만든 바띡은 국립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유럽영향을 받은 바띡으로 네덜란드 친구가 오면 잔잔한 꽃과 섬세한 잎으로 디자인된 이 바띡을 즐겨 입었다. (Sarong Jepara, Central Java,1900년 제작, 260 x 106 cm) 그녀는 여성 정장 끄바야(Kebaya)도 장려하였다.
 
그녀는 12살 때 학교를 그만 다니고 궁에서 격리되어 지내야만 했다. 그 당시의 자바의 여성들처럼. 그녀는 네덜란드 친구에게 절망감과 귀족 남자들과의 교육적 차별과 부당성을 편지에 써서 보냈다. 그녀는 자신의 삶을 여성해방과 여권신장, 여성교육에 바치기로 결심한다. 중첩제도를 반대하였으나 아이러니컬하게도 그녀는 렘방(Rembang) 시장의 네 번째 부인이 된다. 남편의 도움으로 여자들만 다니는 초등학교 건립을 추진한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이 학교는 까르띠니가 세상을 뜨고 나서 1912년 완공된다. 아기를 낳다가 그녀의 나이 25세에 사망하였다. 이 학교는 최초의 인도네시아 여학교가 되었으며 획기적인 여성교육의 돌파구가 되었다.
 
네덜란드 친구에게 보낸 그녀의 편지는 국보로 지정되고, 1964년 정부에서 그녀를 영웅으로 선포하고, 생일인 4월 21일을 ‘까르띠니의 날’로 정해 추모하고 있다. 이날 바띡을 가장 잘 입은 사람을 뽑는 대회를 개최하기도 한다. 매년 그녀의 생일에는 남자 아이들까지 전통의상 바띡 사롱을 입으며 그녀를 추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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