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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칼럼 자바에서 시를 읽다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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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인숙의 독서노트
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6,623회 작성일 2017-11-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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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의 세계
 
 시. 이재연
 
우리는 아주 가끔씩 다정해진다. 식사가 끝나면 카드를 찾아 손쉽게 자신의 이름으로 자신을 증명하였다. 그다지 어려운 일도 쉬운 일도 아닌 그런 일들과 함께 나무보다 앞서서 나무를 생각하기도 한다. 나무는 나무들끼리 조금씩 움직이고 아이들은 자신들의 은어를 가지고 놀았다.
 
이 별에는 비가 내리거나 발자국이 아닌 발자국을 따라가듯 눈이 온다.
 
혹자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길냥이를 키워낸다. 또 다른 혹자는 불안이라는 이불을 덮은 오늘과 자연스럽게 동침을 하였다. 바람은 부풀려지고 희망은 양은 냄비에 담겨 길냥이들을 불러 모으지만 길냥이의 눈은 종종 믿음이 가지 않는다.
 
캔도 믿을 수가 없고 커피 속의 아메리카노도 믿을 수 없는 저녁, 우리는 다시 모인다. 모이고 헤어지는 데에 이유는 없었지만 이유 없다는 것만큼 커다란 이유도 없다.
 
우리는 제단의 모서리처럼 예민해진 얼굴을 감추고 가족 사진을 찍으며 비로소 가족을 이해하려고 했다. 결국 이해하려고 하지 않는 쪽이 자신을 창유리에 던진다.
 
비와 비는 꿈틀거린다. 햇빛은 달아나기 직전 다시 붙들려 왔지만 육 일 밤 내내 혼선과 피로를 유지한 채 저녁이면 다정한 얼굴로 불빛 앞에 서있다. 많이 본 얼굴, 어디선가 본 얼굴, 다정한 얼굴.
 
출처: 쓸쓸함이 아직도 신비로웠다 (실천문학사)
 
NOTE**************
나이가 드니까 그렇더라. 다정하고 친절한 사람이 좋더라. 더 어렸을 때는 날카로운 신경과 예민한 감성과 상대를 꿰뚫어 보는 찌릿한 눈빛과 통찰로 가득 찬 문장들을 뱉어내는 사람들을 좋아했어. 그런 사람들 곁에서 내가 막 덩달아 진화하는 느낌이 들었거든. 그런데 말야… 속 시원하게 자기 말도 제대로 할 수 없는 타국에 사느라 늘 실수와 긴장으로 상대를 대하는 시간을 20여 년쯤 살다 보니, 점점 그런 관계들이 피곤해지더라. 나는 좀 다정하고 친절한 사람들을 만나고 싶었어.
 
식사가 끝난 식당에서 서로 카드를 내겠다고 웃으며 실강이를 벌이는 사람들과, 가끔 그 집 정원에서 자라는 나무의 안부를 묻는 사람들과, 눈이 하얗게 덮인 산머리 사진을 찍어서 보내주는 사람들과, 저녁 산책을 나오는 길에 조그만 플라스틱 통 안 가득 길냥이의 밥을 준비해 나오는 사람들과, 먼 길 떠나는 차 안에서 캔커피 하나를 꺼내서 건네주는 사람들과, 같은 색깔 옷을 맞춰 입고 찍은 가족 사진을 수줍게 보여주는 사람들과, 주말 저녁이면 동네 앞 슈퍼에서 맥주 한 잔을 나눠 마시며 계산 없이 웃는 사람들과 다정하게 어깨를 나누면서 살고 싶은 거야.
 
그런데, 친구야. 그런 다정의 세계는 어디에 있는 거니? 왜 나는 아직도 그 세계에 속하지를 못하는 거니? 시를 쓴 이재연 시인은 참 다정한 큰언니 같은 분이니까, 우리, 시인에게 물어볼까?
 
* 채인숙/ 시인. 2015년 <실천문학> 오장환 신인문학상을 받으며 등단했다.                라디오와 다큐멘터리 작가로 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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