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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칼럼 [向人尋書 : 사람에게서 서예 찾기 10] 좋은 창작을 위한 키워드 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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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재 손인식 느낌과 새김
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9회 작성일 2024-09-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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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向人尋書 : 사람에게서 서예 찾기 10] 


좋은 창작을 위한 키워드 둘

- 집 주변 숲을 흔드는 바람이 걸러낸 생각들


인재 손인식/서예가



예술 창작과 감상을 통한 소통, 이를 보통 예술을 통한 치유라고 한다. 그런데 더 실질적인 분석이랄까? ‘예술 실천’이라는 주장이 대두된다. 공감한다. 행동하고 사고하는 실천이 없으면 치유가 따라오지 않을 것이니. 좋은 소통과 치유, 작가들에겐 창작과 소통하는 속에 치유가 있다. 진지한 감상 순간 또한 어찌 매우 특별한 소통과 치유가 아니랴. 감상 속엔 창작인이 아니고는 맛보지 못할 특별함도 있다. 감상자가 작품을 통해 어떤 느낌의 질문을 떠올리게 될지 예상해보는 특별함, 이 뿌듯한 치유.

 

이런 공리성으로 인해 작가들이 창작을 직업 그 이상의 무엇으로 생각하는 것 같다. 일로 생각하는 이도 아주 없진 않을 거다. 창작행위를 말 그대로 일을 의미하는 작업이라 일컫지 않는가. 그러나 대다수 작가들은 창작을 일인지 취미인지 경계를 가르려 하지 않는다. 필자 또한 작품창작을 일로 생각해본 적이 거의 없다. 창작을 기획하고 완성하고 또 다른 창작 준비를 복 받은 일로 여긴다. 창작을 왜 산고, 즉 고통 그 넘어 새 생명 탄생의 신비에 빗대겠는가. 그렇다고 뭐 호들갑을 떨 것 뭐랴. 그 적소나 잘 찾자. 어딜까. 답은 이미 앞에서 밝힌 셈이다. 삶의 일상과 소통에 두는 거다. 질문과 답 놀이 뭐 그런 것. “왜 사느냐?” 라는 덩치 큰 질문의 답이 그냥 오늘을 살아가는 것에 있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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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인지 발달도 (박제영 님의 브런치 스토리에서) 


삶과 창작, 답보다 질문

 

고대 그리스에서는 비극을 관람하는 게 시민의 의무였다고 한다. 반드시 극장에 가서 연극을 봐야 하는데, 희극이 아니라 비극을 봐야 해야 했다. 인생 자체가 희극과 비극으로 나뉘지만, 누구나 비극을 접하지 않고 살 수는 없다는 진리 때문이라고 보면 비극보기를 의무로 정한 이유가 좀 찾아진다.

 

사람들이 다른 사람의 로맨스를 보면서 자신의 로맨스를 꿈꾸고 대리만족을 한다는 것도 이유리라. 하니 비극을 감상하는 일은 공부였다. 나에게 다가올 비극에 관한 마음의 대비였다. 그래서 필자는 예술은 답이 아니라 질문이라는 말을 떠올리곤 쾌재 했다. 여기엔 작품 한 점 완성하는 것이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란 의미도 들어있다. 창작을 통해 답을 찾는데, 결과를 얻는데, 이게 질문이라고? 불편해 할 혹자 있을까? 이 불편함을 억지로 순하게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인생 자체가 비극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을 긍정하지 않는 사람도 많을 테니까.

 

어쨌든 질문이 창작의 길이라는 점은 평범 속 비범 쯤에 속하리라. 예술이 뭐지? 예술이 인간의 삶에 무슨 도움을 주지? 이런 질문들이 바로 창작의 원인이니까. 마찬가지, 감상 때도 질문은 절대이니, 다소 진부한 질문이래도 좋다. 답은 각자가 나름으로 찾는 것이기에 예술은 대상하는 모두에게 매우 흥미로운 절대다. 이것이 필자에겐 24년간 인도네시아에서 나름의 활동을 펼친 이유고.

 

플라톤의 『국가론』, 주지하는 바다. 흔히 이 책의 주제를 의문이라고 규정짓는다. 정의로운 사람이 과연 불의한 사람보다 더 행복한지 따지니까. 세상은 정의를 외치고 정의가 진리인데 부정이 활개를 치니까. 답을 찾겠다고 의문을 던지고 갖은 방법으로 답을 찾는데 결과적으로는 답을 얻지 못하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은 정답을 찾으라고 권한다. 정의롭게 살라고 한다. 예술가가 읽으면 창작이 왜 끝없는 의문 또는 질문이어야 하는가가 더욱 또렷해지는 책이다.

 

『명상록』으로 유명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일상에서 자주 철학으로 돌아가 휴식을 취하라고 말한다. 필자가 창작인이기 때문이리라. ‘예술로 돌아가 휴식을 취하라.’는 말로 바꾸는 것이 더 어울린다는 생각을 한다. 삶에서 휴식은 무엇일까? 우주의 관점에서 자기의 인생을 바라보는 것이라면 뭐 그럴 듯한 답일까? 사라지는 것들과 다가오는 것들을 느끼는 것이라면 더 어울릴까?

 

나이 고희에 이르러 드는 생각이다. 휴식이란 망리투한(忙裏偸閒), 하루해가 뜨는 것이나 지는 것처럼 쉼 없는 운행 속에 쟁취해야 한다는 것, 그래서 그냥 내 삶에 순응하자다. 일상에 순응하며 창작의 끈을 놓지 않으면 더 좋을 것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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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렐리우스 명상록 

자의식의 확장성

 

현대미술 작품 중에는 대중들에게 이거 나도 하겠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작품들 많다. 서예에도 없진 않다. 얼른 떠오르는 것이 추사의 봉은사 <판전(版殿)> 현판이다. 이 작품은 반듯하거나 잘 휘갈긴 것을 좋아하는 대중이나 일부 서예 초학자들에게는 의문만 부풀릴 대상이다. 좋은 작품을 가릴 안목의 고하에 빗대지 말자. 서예가 직관성이 약한 예술이라는 평가에 답하기에는 이 작품 역시 설득력 부족이니까. 모호함, 이건 서예의 장점일까 단점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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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 김정희의 봉은사 판전(版殿) 현판 

서예를 직관성이 강한 예술로 변화시키려는 노력은 나름 많았고 지금도 변함없다. 그 바탕에는 깨우친 작가들의 자의식(自意識)이 두텁게 작용했다. 그러나 이 역시 길을 찾지 못한 부류들이 보기엔 혼란이다. 서예는 예술로서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 서예적 아름다움의 중점은 어디에 있을까? 이런 근원적인 질문을 바탕에 두고 서예가들의 자의식은 다양한 실험으로 드러났다. 여기서 말하는 자의식이란 메타인지, 즉 내면의 자의식이다.

음미해보자. 대중이 나도 할 수 있겠다라고 여기는 창작품의 바탕에는 어떤 요소들이 있을까? 우선 익숙하거나 편안함, 또는 단순성을 들 수 있겠다. 그러면서도 특수성, 시대 흐름, 작가의 개성 등을 간과할 수 없으니 나도 할 수 있겠다는 말과는 달리 실제로는 자의식 출중한 창작이란 매우 어려운 경지임에 틀림없다. 다행스러운 것은 작금은 과거에는 상상할 수도 없었던 메가톤급 자료를 누구나 탐색할 수 있다. 바로 이 점이 현대의 예술가들이 자의식을 갖추는데 지름길을 제공했고.

 

자의식엔 매우 흥미로운 특징이 있다. 확장성이다. 한 번 얻게 되면 끊임없이 부푼다. 예컨대 누가 약간 부당한 일을 오랫동안 당하고 있었다 치자. 그걸 당연하게 받아들이거나 가스라이팅 당하면 그게 부당하다는 인식 자체를 하지 못했을 수 있다. 그런데 어느 날 의식이 바뀌면 그 후부터는 고민하게 된다. 그것에 관해 과연 옳고 그른 게 무엇인지 고민하게 된다


옳고 그름이나 새로운 것이란 확신이 생기면 무섭도록 증식하는 자의식, 서예도 무심하지 않았다. 새로움을 일깨우는 현대 예술의 흐름을 보면서 안일한 창작에 관해 비판적 통찰이 여기저기서 고개를 내밀었다. 과도기적 문제점도 생겨났다. 휩쓸린 자의식들이다. 표절된 자의식들은 오래가지 못한다. 반듯하게 잘 쓴다거나 고전 흉내 내기는 별 의미 없다는 것은 인지하겠는데, 기본이 결여된 상태에서는 자의식 발휘가 제대로 될 수 없음이다.

 

고래로 갖출 것을 갖춘 선각자들이 있어왔다. 공부의 깊이와 넓이를 실천으로 드러내는 작가들, 암묵적인 작품으로 새로운 이론을 제시하는 작가들, 이 시대 또한 이런 작가들이 제법 많다. 그들은 공통적으로 어떤 형식으로 고전의 생명력을 유지하면서 새롭게 펼쳐야 할까라는 질문에 각자가 답을 제시한다. 각자 자기식을 찾으라고.

질문과 자의식을 바탕삼아 창작으로


한 페이지에 글을 쓰려면 100페이지에 책을 읽어라.” ()의 거인으로 불리는 다치바나 다카시의 말이다. 인풋과 아웃풋의 법칙으로 유명한 이 말을 서예가에게 적용하면 고전을 많이 보고 많이 연습한 다음에 비로소 제대로 된 작품을 창작할 수 있다는 의미도 되겠다. 물론 여기엔 다른 예술 장르와 변주 또는 초범주성도 포함된다.

 

그런 의미에서 서예에 존재하는 만고불변의 방법에 크로스오버가 필요하다. 이해를 돕기 위해 세 가지로 압축해 본다. 첫째 반드시 고전을 많이 공부하는 것이다. 전통을 이해하고 정통을 능숙하게 발휘할 줄 아는 수준의 공부다.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둘째 다른 장르도 폭 넓게 공부하고 이해해야 한다. 크로스오버는 개성을 찾는 창작의 지름길이지만 그 또한 수많은 실험을 요구한다. 성공도 가깝지 않다. 그리고 세 번째는 바로 지금 자의식과 시대 트렌드를 하나로 꿰는 것이다. 이야말로 아무나 도달하지 못하는 창작의 경지일 것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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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작가의 유튜브 영상<서툰 글씨가 왜 명작인가? 추사의 판전(版殿)▶영상 보기 


우선 지금의 한 창작을 받아들이는 것은 첫 걸음이자 지혜다.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인정하는 것이다. 그것을 위해서는 어떤 작품이라도 일단 완성해야 한다. 그래서 예술 실천이고 창작 실천이다. 완성을 할 때까지 다른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 좋다. 완성도 습관이다.

 

필자의 약점 중 하나가 싫증을 잘 내는 거다. 어지간하다 싶으면 다른 것을 찾곤 했다. 다양한 시도를 통해서 새로운 것에 접근했다. 알고 나면 또 새로운 것이 없나 또 찾아 나서곤 했다. 지금 돌아보면 뭐든 더 견뎠어야 했나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그나마 스스로를 지탱하는 힘은 본고와 같은 글쓰기였다. 나아가는데도 물러서는데도 절대적인 힘을 발휘하는 글쓰기. 다행스럽게도 창작은 과거로 돌아갈 수 있어 좋다. 고전 공부로 다시 돌아가도 된다. 과거에 하던 방식을 다시 차용해도 느낌이 다르고 결과가 달라지니까. 필자는 예나 지금이나 그림과 글씨를 오락가락한다. 지금도 글씨 같은 그림, 그림같은 글씨로 그 경계를 두지 않는다. 막힌다 싶으면 새로운 활로를 뚫는다는 식인데, 그냥 편하게 크로스오버라고 여긴다.


세상에 일방통행은 없다. 나 혼자만 불행하지도 않고 나 혼자만 행복하지도 않다. 역사도 소설도 영웅 탄생은 늘 어렵다. 실패를 극복하고 그 안에서 의미를 찾아 삶의 진짜 가치가 무엇인가를 느끼게 하는 것, 부정할 수 없는 영웅의 서사다. 좋은 작품, 질문하고 고뇌하지 않고 얻을 수 있으랴. 자의식 없는 좋은 창작도 없다.

 

집을 둘러싼 숲이 흔들린다. 바람 한 줄기 출렁인 게다. 상념인가? 푸념인가? 그만 마무리하라고. 세상 모든 작가들의 행복한 창작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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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의 거장'으로 불리는 다치바나 다카시



※ 본고는 한국의 월간지 《서예문인화》 10월호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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