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덤 속의 고통(Siksa Kubur)>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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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덤 속의 고통(Siksa Kubur)> 후기
배동선
아무리 무슬림들이 인도네시아 전체 인구의 80%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고 해서 거기 오래 살면 무조건 이슬람에 대한 지식이나 상식이 느는 건 아니다. 역시 이슬람을 배우려면 입교해서 정식으로 교리를 배워야 할 것 같은데 현지 호러영화를 좀 이해해 보려고 그렇게
하는 건 확실히 ‘오바’지 싶다.
그래도 나름 몇 가지 상식을 배우긴 했는데 그 중 영화를 통해서 배운 것도 있다. 예를
들면 조코 안와르 감독의 2019년 작 <Perempuan
Tanah Jahanam>은 <임페티고어(Impetigore)>라는
신조어로 영문제목을 달았지만 나는 <지옥의 여인>이라고
번역했다. 그런데 자하남(Jahanam)이라는 게 그냥 지옥이
아니다. 무슬림들은 천국도 7층, 지옥도 7층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믿는데 지옥 가장 저주받은 밑바닥
층의 이름이 자하남이다.
참고로 천국의 제일 높은 7층의 이름은 피르다우스(Firdaus),
남성의 이름에 많이 쓰인다. 천국엔 평화가 한없이 흐르는 아름다운 강이 있는데 그 강의
이름이 살사빌라(Salzabila), 이건 여성 이름으로 많이 쓰인다.
이런 것들과 함께 어깨 넘어 배운 것이 무슬림들의 죽음에 관한 것이다. 무슬림이 죽으면
무덤 속에 천사가 찾아와 ‘너의 신은 누구냐? 너의 선지자는
누구냐?’고 묻는다고 한다. 그래서 흰 광목 천에 싸서 ‘뽀쫑’을 만들어 시신을 매장할 때 천사를 만날 수 있도록 얼굴을
열어 주는 것이고 그 혼이 몸을 떠날 수 있도록 뽀쫑을 묶은 끈, 즉 딸리뽀쫑을 풀어주는 것이라 한다.
그러나 알라를 신으로, 모하메드를 선지자로 모시지 않은 이들은 지옥으로 끌려가 영원한 고문을
당하게 되는데 마침 앙기 암바라 감독 2023년에 <지옥의
고문(Siksa Neraka)>라는 영화를 개봉했다. 엄청난
고어 장면을 담은 이 영화에 260만 명의 관객이 들어 그해 로컬영화 흥행순위 5위에 올랐다.
하지만 직접 이 영화를 보면 그 시나리오와 특수분장의
허접함에 일단 놀라고, 이슬람의 지옥이 불교의 지옥과 크게 다를 바 없다는 사실에 또 한 번 놀라게
된다.
그런데 지옥으로 끌려가기 전 죄인들에 대한 고문은 무덤 속에서부터 시작된다고 한다. 그래서
이 영화 <무덤 속의 고통>이 나왔다.
▲<지옥의 고문> 포스터
지옥까지 카메라가 따라갈 수 없으니 지옥 고문의 실황을 찍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무덤 속에서 벌어지는 죄인에 대한 고문은 이승에서 벌어지는
일이니 담 큰 카메라맨이 죄인의 무덤 속에 함께 묻혀 하루 밤을 지내며 촬영하면 해당 기록을 남길 수 있을 것이란 아이디어가 영화 <무덤 속의 고통>이 가진 기본 컨셉이다.
시놉시스
시타와 남동생 아딜은 어린 시절 폭탄 테러로 부모를 잃는다. 당시 집에서 하던 빵집에 들른
이상한 남자가 가게 앞에서 폭탄을 터트려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는데 빵집 서랍에 돈을 훔친 일당을 잡으러 빵집 앞에 잠시 나간 부모가 폭발에
휘말린 것이다. 테러범 남자는 빵집을 나가기 전 자신이 듣고 있던 카세트 테이프를 시타에게 맡겼는데
거기엔 마치 지옥에서 아우성치는 것 같은 사람들의 비명소리만 가득할 뿐이었다.
▲빵집 앞 폭탄테러
희생자들의 시신
시타와 아딜은 한 쁘산트렌 이슬람 기숙학교에서 감금에 가까운 생활을 하다가 간신히 탈출하지만 아딜은 그곳에서 이사장에게 당한 성폭행이
평생의 트라우마로 남는다. 그들은 쁘산트렌과 외부세계를 연결하는 긴 터널을 달려 빠져나가는데 그곳은
아이들의 원혼이 가득 찬 곳이다.
장면이 바뀌어 장성한 시타는 부자들이 노년을 지내는 요양원의 요양사로 일하며 요양하는 노인들이나 그 가족들을 대하는 일을 하고 아딜은
그곳에서 잡무를 보며 요양소에서 사망한 노인들의 시신을 닦고 매장하는 일을 하고 있다.
수완 좋고 할 말 다하는 요양사 시티는 요양소에 부자들은 물론 죄 많은 이들을 들이고 있다. 그녀는
죽음 후에 신의 심판이 없다고 믿고 싶다. 자살폭탄테러로 죽은 부모가 죽은 후 고통을 받았다고 믿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죄 많은 이가 죽으면 그 무덤 속에 따라 들어가 하루 밤을 지내며 무슬림들이
믿는 ‘무덤 속의 고통/고문’이 없다는 것을 카메라로 찍어 증명하고자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
그 일을 도울 수 있는 자리에 동생 아딜을 넣은 것이다.
어린 시절 아딜을 성폭행했던 쁘산트렌 이사장이 정년퇴임하고 노인이 되어 요양소에 들어왔다가 권총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자살이라는 죄가 더해진 것. 정말 무덤 속 고문이 있다면 절대 그를
피해가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시신이 무덤 속에서 밤새 무사하다면 이슬람의 신은 없다는 것이 증명되는
것. 시타는 기꺼운 마음으로 무덤 속에 따라 들어가 진실을 직접 자기 눈으로 확인하려 한다.
장점과 약점
조코 안와르 감독이 만들어 온 호러영화들을 보면 그가 영화의 공포적 요소를 바라보는 관점의 스팩트럼이 꽤 넓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그의 출세작 <사탄의 숭배자(Pengabdi
Setan)> 시리즈에는 이슬람 교사인 우스탓도 등장하고 무슬림들의 기도인 숄랏 장면이 나오지만 종교적 이념보다는 공포를 빌드업시키는
기재로 사용된 측면이 크다. 한편 <지옥의 여인(Perempuan Tanah Jahanam)>은 이슬람적 요소가 완전히 배제된 자바의 주술을 고어(Gore) 장르에 접합했다.
그런데 <무덤 속의 고통>은 본격적으로
이슬람을 배경으로 한다. 그렇다고 성직자들이 반드시 선하게 묘사되지 않는다. 영화 속 신은 언제나 옳지만 쁘산트렌 이슬람 기숙학교의 교사들, 이른바
종교선생들과 지도자들은 대체로 악인으로 묘사된다.
사실 영화 속 이런 모습은 그가 얼마 전 인터뷰를
통해 밝힌 ‘완벽한 신앙은 모든 악을 물리칠 수 있지만 인간들은 성직자나 우스탓조차 완벽할 수 없는
나약한 존재들’이란 그의 평소 생각을 새삼 증명하는 듯하다.
그래서 <무덤 속의 고통>은 <지옥의 고문>보다 무슬림이 아닌 사람들에게 진입장벽이
높은 주제다. 그래서 조코 안와르 감독이 주인공들의 어린 시절 빵집 앞 자살폭탄테러와 쁘산트렌에서 겪는
부조리들, 요양소에서 노년을 지내는 부자들의 군상을 보여주는 것은 관객들이 그 진입장벽을 잘 넘을 수
있도록 돕는 빌드업이다.
말하자면 비무슬림들을 배려한 장치인 셈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 죽은 망자가 지옥이 아닌 무덤에서부터 신의 사자에게 고문을 당한다는 것은 타 종교를 가진 이들에겐 여전히 생경한 개념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 영화는 분명 신앙에 회의나 일말의 의심을 품었을 무슬림들에겐 경종을 울렸다. 그게
이 영화가 자바 토착 무속을 배경으로 한 <무용수마을의 바다라우히>의 흥행을 추월하는 동력이 되었다. 종교의 위력은 영화산업에서도
맹위를 떨친다.
이 영화가 가진 또 하나의 강점은 필모그래피 풍성한 연기파
배우들로 이루어진 라인업이다.
여주 시타의 성인역을 맡은 모델 출신 1989년생 파라디나 무프티(Faradina Mufti)는 영화에는 2014년 데뷔한 10년차 배우지만 TV 드라마에는 2013년부터 얼굴을 비추며 많은 필모를 쌓았다. 상대적으로 일천한 경력이지만 엄청난 필모를 갖춘 다른 출연자들에 비해 전혀 밀리지 않는 연기력을 보이며 영화의 중심을 잡았다.
남주라고 하기엔 조금 역할이 빈약한 아딜 역의 래자 라하디안은 파라디나보다 두 살 많을 뿐인
1987년생이지만 2007년 영화 데뷔해 수많은 영화에 출연했고 <내 멍청한 상사(My Stupid Boss)> 시리즈, <하비비와 아이눈(Habibie & Ainun)> 트리올로지, <아브라카다브라>, <지독한 복수(Berbalas Kejam)>, <가스빠르와의 24시간(24 jam bersama Gaspar)> 등의 주연을 맡았다. <판데르베익호의
침몰>, <스리아시>에서처럼 악역도 마다하지
않는 그는 인도네시아 영화제(FFI) 조직위원장이기도 한 쟁쟁한 인물이다.
권총자살하는 전 쁘산트렌 이사장 역의 슬라멧 라하르조 자롯은 FFI 2022에서 남우조연상을
받았고 젊은 시절 눈부신 미모를 뽐냈던 크리스틴 하킴은 요양소 입주 노인 중 한 명을 연기했는데 그간 수많은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조연상을 받았다.
특히 크리스틴 하킴의 남편 역을 맡는 아르스웬디
브닝스와라는 2022년 영화 <자서전(Autobiography)> 국내외 여러 영화제에서 남우주연상을 수상했고 그해 최고의 영화 중 하나인 <아주 달콤한 작전(Ngeri-Ngeri Sedap)>에서도
가부장적인 바딱(Batak)족 가장을 능청스럽게 연기했다.
이외에도 넷플릭스 문제작 <나나>의
여주인공이었던 해피 살마도 극 초반에 폭탄테러로 희생되는 시타의 어머니 역을 맡았다. 이 정도 화려한
배역이니 연기력에 책잡힐 일은 없는 영화가 된 셈이다.
▲<무덤
속의 고통> 주요 출연진. 왼쪽부터 레자 라하디안, 자장 C 누르, 슬라멧
라하르조 자롯, 크리스틴 하킴, 아르스웬디 브닝스와라
하지만 약점은 역시 시나리오에 있다. 무슬림 감성으로 만든 영화여서 비무슬림에게 잘 와닿지
않고 이해되지 않는 부분도 있다. 그래서 논리적으로 잘 이해가 되지 않으니 영화의 스토리 전개가 좀
무리하다고 느껴지는 부분이 있었다.
예를 들어 극 초반에 자살폭탄테러를 벌인 남자가 남긴 카세트테이프. 그 남자가 마치 지옥에서
고통받는 이들의 비명소리를 녹음한 듯한 그 내용을 계속 들었던 모양인데 그게 왜 꼭 자살폭탄테러로 귀결된 것일까?
그렇게 부모를 잃고 쁘산트렌에서 학대를 받은 후 고생 끝에 요양소의 간호사가 되었으니 세상에 대한 불만과 복수심이 생긴 건 알겠는데
왜 그게 이교도 또는 죄를 지은 망자들에게 무덤 속 고문이 찾아온다는 이슬람의 가르침이 틀렸음을 증명하려는 의지로 발전했는지 아무래도 설명이 부족하다.
혼자 알면 충분할 그 사실을 왜 공개해서
이 세상의 이슬람 신앙을 붕괴시키려 한 것일까? 어린 시절 자신을 학대한 쁘산트렌 또는 이슬람 사회
전체에 복수하려던 것일까? 그 부분의 논리가 모호했다.
무덤 속에 들어간 시타 앞에 펼쳐지는 세계는 생기가 하나도 남지 않은 어린 시절의 그 빵집, 그리고
쁘산트렌과 세상 사이를 이어주는 또는 단절시킨 길고 어두운 터널 속이다. 영화 속 터널은 땅 속 무덤의
연장이란 인상이 강하고 그 안에 맴도는 아이들의 혼령들은 쁘산트렌에서 불의하게 죽어나간 학생들의 것이다.
그
혼령들이 말하는 메시지가 애매하다. 그 많은 아이들 중 어떤 아이 한 명의 혼령을 특정해 그 아이를
도우라고 말한다. 물론 그 아이의 이름이 이슬람 예언자의 이름과 같다는 것도 영화 속 한 장치일 것
같다. 하지만 그 의미가 충분히 와닿지 않았다.
그 모든 것을 겪은 후 시간을 거슬러 돌아온 시타가 동생 아딜의 도움으로 무덤에서 일어나 묘지를 달리는 마지막 장면에서 아딜의 눈이
떠지지 않을 정도로 부어올라 있는 모습이 정말 뜬금없다. 무슨 일이 벌어졌음을 암시하려 한 것일까?
그래서……
물론 이게 전부 다 영화 탓이 아닐 수도 있다.
라삐필름(Rapi Films) 중심으로 제작한 이 영화는 영어자막을 달아주는 MD 픽쳐스의 영화들과는 달리 아무런 자막 서비스도 없어 대사를 모두 듣고 이해해야 했으므로 내가 놓친 부분들이
있었을 것 같다.
그리고 이 영화를 이해하는 또 하나의 중요한 키는 이슬람에 대한 이해인데 그건 잠시 공부한다고 다 알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다. 무슬림들은 취학 전부터 머스짓 사원에서 구룽아지(Guru Ngaji)라는
알쿠란 강독선생에게서 배우기 시작해 오랜 세월 종교에 대한 지식을 쌓는데 그런 배경이나 상식 없는 외국인이 이슬람 색체 가득한 이 영화를 완전히
이해하는 건 애당초 어려웠던 것인지도 모른다.
결국 난 이 영화를 보고서도 그 진입장벽을 넘진 못한 셈이다. 작년에 보고 고개를 설레설레
저어야 했던 <더 마블스>처럼.
난해하고, 그래서
크게 재미있었다 말하기 어려운 이 영화에서 내가 문턱을 넘지 못한, 그래서 결국 이해하지도, 발견하지도 못한 어떤 점들이 무슬림 사이에서 입소문을 타 아직도 극장에서 순항하며 400만 관객 고지를 막 넘어서려 하는 것이리라.
▲파라디나 무프티는 어쩌면 조코 안와르 감독의 새 뮤즈? 그의 모든 영화에 나오던 타라 바스로를 비롯해 이른바 ‘조코 안와르
사단’ 배우들이 이 영화에는 거의 보이지 않았다.
▲어린시절 자신을 성폭행했던 쁘산트렌 이사장의
목을 조르는 아딜
*배동선 작가
- 2018년 ’수카르노와 인도네시아 현대사’ 저자
- 2019년 소설 '막스 하벨라르' 공동 번역
- 2022년 '판데르베익호의 침몰'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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