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네시아인들이 가슴에 품은 한국인 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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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네시아인들이 가슴에 품은 한국인 전사
▲세 남자. 왼쪽부터 양칠성(꼬마루딘), 아오키(아부바카르), 우스만(하세가와)
1. 조선인 포로감시원들의 삶과 죽음
2024년 8월 22일(목) 서부자바 가룻(Garut) 탐방에
나섰다. 두 번째 가룻 행이었고 이번에도 양칠성 때문이었다.
1942년 포로감시원으로 인도네시아에 처음 왔다가 격변하는 역사의 흐름 속에서 인도네시아 유격대가 되어 네덜란드군과 싸웠다. 그러다가 1948년 8월
일본군 출신 동료들과 함께 네덜란드군에게 나포되어 반둥을 거쳐 자카르타로 압송되었고 글로독 형무소에 우선 수감되었다.
글로독 형무소는 일본이 패망하고 연합군이 진주한 후 일본군 소속 전범들을 가두었던 곳으로 많은 조선인 포로감시원들이 전범의 굴레를
수감되었다가 그중 일부가 처형으로 생을 마감한 곳이다. 양칠성과 아오키, 하세가와가 이곳에 수감된 것은 그들이 인도네시아 유격대에 합류하기 전 연합군 포로들을 학대한 전범혐의 때문이었다. 어쩌면 그들이 유격대에 합류한 이유 중엔 전범 혐의를 피하려던 의도도 최소한 몇 그램 정도는 있었을 것 같다.
그러나 양칠성은 동료들과 함께 곧 찌삐낭 교도소로 이감되었고 거기서 얼마나 수감생활을 했는지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이후 가룻에 관할권이 있다는 이유로 멀고도 먼 가룻으로 다시 이송되어 거기서 사형선고를 받고 1949년 인도네시아 독립전쟁이 끝나기 직전에 처형당했다.
2차세계대전 당시 노르망디에서 독일군 군복을 입고 연합군에게 포로가 된 조선인이 있었다고 하는데 양칠성 역시 그에 못지 않은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 죽었다.
그가 가룻 소재 인도네시아 유격대 빵에란 빠빡 부대(Pasukan Pangeran Papak)에
합류하게 된 경위에 대해서는 몇 가지 설명이 있다. 유격대가 1945년
일본 패망 후 일본군 잔류부대와 전투를 벌여 포로로 잡은 40여명의 일본군이 나중에 모두 전향했는데
그중 조선인들도 있었고 그중 한 명이 양칠성이었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비전투원인 조선인 포로감시원이
일본 패망 후 왜 일본군이 되어 총을 들게 되었는지 그 맥락이 잘 와닿지 않는다.
자카르타 찌삐낭 형무소에 갇혀 있던 양칠성 등을 굳이 멀리 떨어진 가룻까지 데려와 그곳에서 처형한 것 역시 잘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다. 그들을 가룻 주민들 앞에서 본보기로 처형하기 위해 공을 들여 장거리 이송을 해야 할 정도로 양칠성들을 가룻에서
죽여야만 할 특별한 이유가 네덜란드군에게 있었던 것일까?
이번 가룻 탐방은 4분의3 정도 톨이 깔린 자카르타-가룻 사이를 차로 달려 편도 4시간쯤에 주파하는 여정이었지만 1949년 당시의 도로상황, 차량상태를 감안하면 족히 그 세 배쯤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그런데도 네덜란드군은 그들을 찌삐낭에서 간단히 처형하지 않고 굳이 그 시간과
노력을 들여 가룻으로 데려가 군사재판을 열어 사형선고를 내리고 처형하는 식의 추가적인 수고를 한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곱씹어 보았다.
이번 가룻 탐방을 함께 한 역사전문지 히스토리아(Historia)지의 기자이자 역사협회
히스토리카 인도네시아(Yayasan Historika Indonesia)의 창립자 중 한 명인 헨디
조(Hendi Jo) 기자는 당시 전향한 조선인들만 40명
규모였고 일본인들은 수백 명이었다고 설명했다. 그 조선인 청년들 중 이름이 알려진 이들은 양칠성, 정수호, 국재만 등이고 나머지는 신원파악이 전혀 되어 있지 않다. 물론 그들이 모두 빵에란 빠빡 부대에만 있었던 것은 아닐 것이고 그 일대 여러 유격대 부대에 산재해 배치되었을
것 같다.
만약 나라도 적군이었던 대규모 병력을 통째로 한 부대에 몰아서 편성해 두었다가 나중에 뒤통수를 맞는 걱정을 했을 것 같다.
1970년대에 일본인 학자 우쯔미 아야코가 이들의 존재를 발굴해 낼 당시 양칠성은 야나가와 시치세이라는 이름의 묘비 아래 묻혀 있었는데
이후 죽은 지 20여년 만에 조선인 양칠성으로서 밝혀진 케이스다. 네덜란드
군에게 나포당하던 당시 저항하고 도주하다가 사살된 국재만이나 다른 동료 정수호를 비롯한 40명의 다른
조선인 청년들이 어딘가에 매장되었다 해도 일본인으로 분류되어 일본 이름으로 묻혀 있을 지도 모른다. 정부나
동포사회로서는 그들을 찾아낼 시간적, 금전적 의지가 아직 충분히 결집되지 않았다. 어쩌면 영원히 불가능할 지도 모른다.
우쯔미 아야코 박사가 밝혀내지 못했다면 한국인들은 양칠성이란 남자의 존재 자체를 지금도 모르고 있었을 것이다.
가룻 소재 뗀졸라야(Tenjolaya) 영웅묘지에
1975년 매장된 사람들 명단 중 양칠성의 이름은 꼼루딘(Komrudin)으로 표시되었다. 그의 인도네시아 이름 꼬마루딘(Komarudin)의 명백한 오타다. 거기 그의 한국 이름 양칠성은 표시되지 않았다. 그와 함께 처형된
아오키와 하세가와 역시 각각 아부바카르(Abubakar)와 우스만(Usman)으로
표시되어 있다. 그래서 사전 지식이 없다면 이 묘지에서 양칠성과 그 동료들을 찾아낼 수 없다. 어쩌면 이 묘지에 그의 다른 동료들도 다른 이름으로 매장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들을 가려낼 방법은 전혀 없다.
양칠성 등이 1949년에 처형되었으므로 그 정보만 가지고는 1975년 묘역에 묻힌 그들을 찾아낼 수 없다. 그들은 처형된 후
인근 찌누눅 공동묘지에 매장되었다가 신원이 밝혀진 후 1975년도에 뗀졸라야 영웅묘지로 이장되었다. 그래서 그들의 유해가 1975년 묘역에 누워 있는 것이다.
이런 자료들도 처음엔 우쯔미 아야코, 그리고 그 이후 뜻있는 많은 한국인 연구가들과 학자, 기관, 작가들에 의해 관찰과 기록이 이루어졌고 1995년에는 한인회와 공관이 주축이 되어 한국과 가룻에 남은 유족들을 불러들여 묘비를 새것으로 바꾸는 행사도
진행했다. 그래서 나란히 누운 아오키와 하세가와의 묘비에 비해 반짝반짝 빛나는 양칠성의 묘비는 새로 만들어졌음이 역력하다. 아오키와
하세가와의 무덤은 허물어져 가고 있다.
2. 기미가요와 처형일
찌누눅(Cinunuk) 강변 처형장에 선 세 사람은 네덜란드군의 총격에 통나무처럼 쓰러졌다.
훗날 우쯔미 아야코는 그녀의 저서 ‘적도에 묻히다’에서
이들이 처형당하기 직전 기미가요를 부른 후 장렬히 최후를 맞았다고 적었다. 그것은 당시 양칠성 등과
유격대 동료로서 함께 싸웠던, 또는 그들의 최후를 보았던 주민들 일부가 1970년대에 조사를 나왔던 우쯔미 아야코에게 해주었던 증언이었고 일본인들에게는 실로 가슴 뭉클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우쯔미는 공동묘지에 묻힌 야나가와 시치세이라는 이름의 사내의 이름이 일본 이름으로서는 어색하다고 생각해 여러 자료들을 조사한 끝에
비로소 그가 사실은 양칠성이란 조선인이었음을 알게 되지만 그녀가 증언을 듣던 1970년대의 가룻 주민들은
일본군들 사이에 끼어 유격대에 합류하고 나중에 이슬람에 입교하면서 꼬마루딘이란 이름을 받은 양칠성이 어느 나라 사람인지는 몰랐을 것 같다. 그들이 모두 일본인일 것이라 생각했을 것이므로 우쯔미 아야코에게 일본인으로서 자부심 느낄 만한 이야기를 지어내
말한 것은 아닐까?
그럴 가능성은 양칠성과 두 일본인 동료들이 처형당한 날이 1949년 8월 10일로 되어 있는 부분에서도 엿보인다. 해당 처형일 역시 우쯔미가 현지에서
조사하며 수집된 증언들을 토대로 그녀의 저서에 적었다.
▲뗀졸라야 영웅묘지에 있는 양칠성의 묘비에도 사망일이 1949년 8월 10일로 되어 있다.
이 날짜는 매우 극적인 드라마를 내포한다.
인도네시아 독립전쟁은 1949년 12월 27일 네덜란드가 파푸아를 제외한 현재의 인도네시아 영토 대부분의 주권을 수카르노의 인도네시아 정부에 공식 양도하면서
끝나지만 종전의 조짐은 그해 5월 7일 인도네시아 공화국과
네덜란드 외무상들이 서명한 룸-로옌 조약(Roem-van Roijen
Agreement)에서 태동했다.
그리하여 종전과 인도네시아의 독립조건을 협상하는 헤이그 원탁회의가 1949년 8월 23일부터 11월 2일까지 열리게 되는데 이를 위해 그전에 일단 인도네시아 전역에 휴전이 선포된다. 그 휴전 일자가 공교롭다. 자바에서는 8월 11일, 수마트라에서는 8월 15일.
양칠성과 그의 일본인 동료들이 8월 10일 처형당했다는
것은 그들의 처형이 하루만 늦었다면 8월 11일 휴전이 선포되며
처형이 이루이지지 않았을 가능성을 내포한다. 즉, 그들이
불과 하루 상관으로 아깝게 목숨을 잃었다는 뜻이다. 드라마틱하다. 하지만
너무 극적이면 주작이기 쉽다.
2011년부터 가룻 유격대들의 이야기를 취재하다가 양칠성의 이야기를 깊이 파고든 헨디 조 기자는 이번 가룻 탐방을 포함해 몇 차례에
걸쳐 양칠성의 처형일이 잘못되었다고 주장해왔다. 우쯔미 아야꼬가 자신의 저서 속에 재구성한 이들의 삶과
죽음은 현지 탐방을 통해 들은 당시 목격자들 또는 그 가족들의 증언을 토대로 한 것이지만 헨디 조 역시 가룻 주민들, 특히 빵에란 빠빡 부대 생존자들과 그 후손들을 수도 없이 인터뷰했을 뿐 아니라 네덜란드 측 자료를 찾기 위해서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 결과 헨디 조 기자가 내놓은 물증은 보다 신빙성 있어
보인다. 그가 사진으로 보여준 1949년 5월 24일자 네덜란드 신문에는 이들이 5월 21일 사망했다는 기사가 실려 있다.
▲양칠성 처형을 다룬
1949년 5월 24일자 네덜란드 신문
헨디 조가 보내준 관련 번역은 다음과 같다.
“Pada pagi hari tanggal 21 Mei (1949), proses hukuman mati telah dilaksanakan
di Garut. Proses tersebut diikuti upacara pemakaman pada pagi harinya. Mereka
yang dihukum mati atas vonis oleh pengadilan militer khusus di Garoet,
masing-masing bernama Aoki alias Aboebakar, Hasegawa alias Oesman dan Janagawa
alias Komaroedin dari Jepang.”
‘1949년 5월 21일 아침 가룻에서 일본인
아오키(아부바카르), 하세가와(우스만), 야나가와(꼬마루딘=양칠성)를 처형하고 당일 매장했다’는
내용이다.
인도네시아 초기 교민사회 연구를 깊숙이 연구하고 ‘한인
100년사’ 집필을 진두지휘한 김문환 선생조차 양칠성 등이 처형 당시 기미가요를 불렀다는
우쯔미 아야코의 기록을 철석같이 믿었다. 한국일보 특파원 역시 해당 기록을 참고해 2019년 3월 4일자
한국일보에 ‘3개의 이름, 두 가지 죽음... ‘일본의 똥개’라 불린 양칠성의 삶’이란 제목의 기사를 싣기도 했다.
하지만 8월 10일이란 처형일이란 기록이 허구이고
이들의 진짜 처형일이 5월 21일이 맞다면 처형장에서 기미가요를
불렀다는 등 8월 10일 처형과 관련된 에피소드 전체가 거짓일
가능성이 크다.
일각에서는 오히려 이들이 처형 전 마지막 소원으로 처형일에 붉은색 상의와 흰색 바지를 입게 해달라고 하여 마치 인도네시아 국기를 상징하는
복장을 하고서 죽기 직전 맬 깁슨 주연 영화 <브레이브 하트>
속 13-14세기 스코틀랜드의 영웅 윌리엄 월레스처럼 ‘머르데카(Merdeka=독립)’를 외치며 총탄에 스러져갔다고도 전한다.
헨디조는 당시 목격자들이 고령으로 사망하고 그 후손들이 방문하는 연구자들에게 당시 상황을 증언할 때 수고비를 좀 더 받을 목적으로
상대방이 듣기 좋아할 만한 스토리를 이야기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고 속삭였다.
사실 난 양칠성과 그 일본인 동료들이 기미가요를 부르지도, 머르데카를 외치지도 않았을 것이라
생각한다. 열악한 환경의 감옥에서 오랜 수감생활을 한 그들은 피폐할 대로 피폐한 상태에서 절망적인 최후를
맞았으리라. 하지만 그들이 전범이 아니라 가룻에서 네덜란드군에게 적잖은 피해를 입힌 반군(독립군)으로서 처형당한 것만은 분명하다. 그래서 그들은 가룻의 자랑이 되었고 인도네시아인들의 영웅이 되었다.
그러니 이제 와서 기미가요니 머르데카니 헛소리들 그만 하자.
헨디 조 기자는 8월 10일이 적힌 양칠성의
묘비를 바꿔야 하지 않느냐 물었다. 올바른 사망일을 기록하는 것은 당연히 바람직한 일이지만 명백히 유족들이
아직 존재하는 묘소인데 제3자가 임의로 묘비를 바꾸는 것은 곤란한 일이 아닐까 생각했다.
3. 헌화
요즘 본의 아니게 민족적 정체성을 스스로 따져보게 만드는 일이 자주 벌어진다. 그래서 양칠성과
다른 조선인 포로감시원들의 입장을 생각해 보았다.
일본이 대한제국의 주권을 강탈한 1904년의 을사늑약, 그리고 1910년의 한일병탄조약은 기본적으로 국제법을 위반한 불법이었으며 1919년 4월 11일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으므로 당시 식민지
시대의 조선인들 국적은 일본이 아니라 대한민국이었다. 이게 올바른 역사인식이다.
하지만 식민지 시대를 살던 사람들 모두가 그런 역사관을 갖고 일본에 투쟁하기를 기대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만약 굳이 따져야 한다면 그들의 ‘정체성’을 물어야 할 것이다. 한쪽 극단의 사람들은 일본의 침탈을 견딜 수
없어 국내외에서 목숨을 걸고 독립운동을 벌인 이들이고 다른 극단의 사람들은 침략자들에게 빌붙어 그들의 국적과 이름과 외양을 따르며 그들의 이익을
위해 일본인보다 더한 일본인이 되어버린 이들이다.
그리고 그들 사이에는 어쩔 수 없이 그 시대를 살아갈 수밖에 없었던 수많은 민초들이 있다. 그들이
이광수, 모윤숙, 김활란도 아닌데 왜 독립운동을 하지 않고
창씨개명에 따랐고 왜 일본이 원하는 대로 재산과 목숨까지 바보처럼 뺏겼냐고 책임을 물을 수는 없다. 당시
그들에게 당신 국적이 뭐냐 물으면 김문수처럼 일본이라 답하는 사람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광복을
맞은 지 80년 가까이 된 이 시점에 당시 우린 일본인이었다고 자랑스러워하는 인물을 정부요직에 기용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아무튼 손기정 선수는 그게 부끄러워 베를린에서 마라톤 우승 후에도 죄인처럼 고개를 숙였던 것이고 수많은 민초들이 이를 갈며 그 시대를
견뎌냈을 것이다. 그들을 반역자, 부역자라고 부를 수 없다. 2차세계대전 당시 노르망디 상륙작전 이후 프랑스가 수복된 후 돌아온 샤를 드골 장군은 부역자들 수만 명을 즉시
처형했지만 나치 치하에서 목숨을 부지했던 일반 시민들은 처벌하지 않았다. 부역하는 것과 살아남는다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다.
이런 인식을 전제로 양칠성을 바라봐야 한다. 그가 연합군 포로들을 학대한 혐의로 전범재판에
넘겨질 만한 인물이었을지 모르나 과연 친일파, 반역자로 분류해야 하는 것일까? 가룻 탐방에 참여해 그의 무덤에 참배한 사람들이 타향에서 처형당한 그의 죽음을 애도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가
꼭 존경받을 만한 인물이라 꽃을 바친 것은 아니었다. 우린 그의 인간 됨됨이가 어떠했는지 어떤 실마리도
가지고 있지 않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그를 참배하는 것은 장수호, 국재만을
포함해 무덤조차 남기지 못한 그의 한국인 유격대 동료들을 함께 추모하는 것이고 그들과 어깨를 함께하고 네덜란드와 맞섰던 빵에란 빠빡 부대 동료들을
함께 기념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린 아오키와 하세가와에게도 헌화하고 무너져가는 그들의 무덤에도 꽃잎을 깔았다. 79주년
광복절이 지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일본군 묘소에 헌화한 것에 대해 나중에 ‘정신 나간 놈들’이라며 욕을 먹게 될지 몰라도 우린 일본인으로서의 그들이 아니라 양칠성과 다른 한국인 동료들의 전우로서 그들을
함께 추모했다.
아오키와 하세가와의 경우에는 오래전 관계자들이 일본에서 와 그들의 유해를 화장하고 뼛가루를 분골해 일본으로 가져갔다고 한다. 그래서 그들의 묘지에는 아직 남은 유골함이 묻혀 있지만 돌보는 사람이 없어 묘지의 상태는 험해 보였다.
4. 히스토리카와 양칠성로
우리가 이날 가룻을 방문한 가장 큰 이유는 2023년
11월 10일 설치된 양칠성로를 실사하기 위한 것이었다.
가룻군은 이날 관내 27개 도로에 지역 영웅들의 이름을 부여했는데 그 27번째 도로에 Jl. Komarudin(Yang Chil Sung)이란
이름이 붙었다.
꼬마루딘은 양칠성의 인도네시아 이름이지만 거기 ‘양칠성’이란
표기가 들어가지 않으면 누구도 그가 양칠성인지 알 수 없는 일. 그래서 실제로 서부자바 주정부 웹사이트(Portal JABARPROVGOID)의 2023년 11월 12일자 관보에 실린 것처럼 괄호( ) 안에 Yang Chil Sung이란 표기가 들어있는지를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사실 가룻군이 보유한 영웅들이 27명보다 훨씬 많을 것이 분명한데 그런 상황에서 양칠성이
턱걸이하듯 27번 도로 이름으로 채택된 것은 현지 역사협회 히스토리카 인도네시아(Yayasan Historika Indonesia)의 끈질긴 노력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고 단언할 수 있다.
2016년 설립된 히스토리카는 저평가된 인도네시아 독립영웅들을 발굴하는 것이 주요 활동 중 하나인데 가룻의 지역 영웅들을 조사하던
중 양칠성의 존재에 그들의 관심이 꽂혔다. 그래서 2018년부터
관련 세미나를 진행했고 2019년부터 가룻에 양칠성로가 설치되도록 가룻 군청과 오랜 협상을 벌였다. 그러니 2023년 11월에
이름 붙여진 양칠성로는 한국인도 아닌, 인도네시아인들이 7년
만에 이뤄낸 성과다.
▲2018년 8월 18일 히스토리카가 진행한 세미나에서 프로젝팅된 화면.
네덜란드군에게 나포된 가룻 유격대원들. 오른쪽 사진의 남자가 양칠성이고
왼쪽 사진에서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잡혀가는 이가 아오키.
빵에란 빠빡의 후손이기도 하고 가룻 유격대원의 후손이기도 한 가룻 군수 루디 구나완은 양칠성로에 대해 적극적으로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고 2019년 12월에 한인니문화연구원을 주축으로 일단의 한인들이 히스토리카의
해당 활동에 힘을 실어주기 위해 함께 가룻 군청을 방문한 일도 있었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이 일은
매우 지지부진했고 한인들이 나타나자 가룻 군청의 요구가 점점 커졌다.
원래 히스토리카가 내놓은 첫 제안은 양칠성 등이 처형당한 곳에 작은 표지석을 하나 만들자는 것이었으나 이후 점점 일이 커져 빵에란
빠빡 부대를 기념하는 전시관, 공원을 만들자며 한국 측에 적잖은 관련 비용을 요구했다. 당시 양칠성이란 인물의 성격 규정이 애매했던 대사관이나 한인회 입장에서는 히스토리카나 가룻 군청이 일을 진행한다면
측면에서 일부 지원해 주겠다는 입장이었지만 마치 군청이 무엇을 원하든 한인들이 관련 비용을 해결해 줘야 할 것처럼 흘러가면서 논의는 벽에 부딪혔고
그 와중에 코로나 팬데믹이 터지며 모든 일이 중단되었다.
2022년쯤 가룻 군청은 코로나로 인해 예산이 소진되어 양칠성 프로젝트를 더 이상 진행할 수 없다고 히스토리카에 통지하기에 이른다. 양칠성로와 관련된 모든 것이 정지된 것이다. 한인 측은 물론 히스토리카의
실망도 컸다. 도로에 이름 붙이는 데에도 돈이 든다는 걸 처음 알았다.
그러다가 가룻 군청은 2023년 8월 25일(금) 뜬금없이 자카르타 소재 JS 루완다 호텔 볼룸에서 열린 '가룻군 투자의 날(Malam Pesona Investasi Garut)' 이란
제목의 성대한 행사를 열고 양칠성 영화를 제작하겠다며 관련 프레젠테이션과 함께 제작비 모금을 진행했다. 이
영화에 <꽃보다 남자> 출신 김범 배우를 캐스팅하겠다며
기염을 토했으나 결과적으로 영화제작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2024년 8월 22일 가룻에서 다시 만난 루디
구나완 전 군수는 얼마전 10년간 재직했던 군수직을 떠나 야인이 되어 있었는데 영화제작 불발 사유에
대해 쁘라보워 수비안토 국방장관까지도 영화제작을 동의하고 응원했는데 전투장면을 더 많이 넣어달라는 요청에 이 영화를 ‘러브스토리’로 만들려 했던 영화제작사 측이 제작비 부담을 느껴 난색을
표했다고 설명했다. 독립전쟁 이야기에 필수적인 전쟁 장면을 부담스러워했다는 설명은 좀 석연치 않았으나
아무튼 중요한 것은 해당 영화가 제작되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디 군수는 퇴임 전 도로명 부여 작업을 진행하면서 잊지 않고 양칠성로를 포함시킨 것은 고마운 일이다. 하지만 비록 2022년 이후 소원해졌지만 그럼에도 그간 히스토리카가
끈질기게 양칠성로를 가룻 군청에 제안하지 않았다면 27번째 도로에도 그 이름이 달리지 못했을 것이다.
따라서 양칠성로가 생긴 것에 대해 히스토리카의 지분은 70% 이상이라 보인다. 가룻 군청은 20%, 한인사회의 기여도는 나머지 10%가 아닐까 한다.
양칠성로는 차량 두 대가 가까스로 비껴 지나갈만한 좁은 도로지만 자바섬에 한국인 이름이 적히고 지자체장의 확인서(SK)까지 발행된 첫 도로가 되었다.
5. 아직 남은 일들
우리가 양칠성을 대표적으로 기리게 된 이유는 그가 가장 큰 공적을 남겼다거나 가장 존경할 만한 인물이었기 때문이 아니다. 그가 무덤을 남긴 유일한 조선인 빵에란 빠빡 유격대원이란 점이 크다.
가룻에서 여러 유격대에 나뉘어 인도네시아 독립전쟁에 참여했던 다른 한국인들의 발자취를 찾는 작업은 아직도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시간이 워낙 많이 지났을뿐더러 묘지가 남아 있다고 해도 대부분 인도네시아 이름 또는 일본 이름일 것이므로 쉽지
않은 조사가 될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그럴 만한
비용도 없고, 인원도 시간도 부족하다.
아직 가용한 것 중 하나는 국재만의 일지를 찾는 것이다.
도라 삼림지대에서 네덜란드군에게 붙잡혔을 때 도주를 시도하다가 사살된 국재만은 당시 상황을 기록한 두꺼운 일지를 남겼는데 헨디조 기자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해당 일지가 현재 네덜란드 정보국에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이 자료를 얻을 수 있다면 당시 유격대의 상황은 물론 부대에서 함께 했으나 이름을 남기지 못한 다른 한국인
동료들의 흔적을 찾는 데에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엄강심 박사가 네덜란드에 날아가 한번 시도해 보겠다고
했다.
양칠성의 실제 처형일에 맞춰 묘비의 내용을 바꾸는 작업도 필요하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을 주도적으로 진행하며 양칠성로 설치에 앞장선 히스토리카를 한인회 또는 정부/대사관 차원에서 응분의 치하를 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
이번 가룻 탐방은 2024월 8월 22일(목) 하루에 진행되었다. UI 객원교수 엄강심 박사, 데일리인도네시아의 신성철 대표, 조연숙 편집장, 배동선 작가가 아침 7시 자카르타에서 출발해 오전 11시 뗀졸라야 영웅묘지에서 기다리던
히스토리카의 압둘 바시드(Abdul Basyith) 회장과 헨다 조 기자를 만나 루디 구나완 전 군수
예방, 양칠성 등이 처음 묻혔던 찌누눅 공동묘지 방문, 빵에란
빠빡 기일 행사 참석, 양칠성로 답사 등의 순서로 움직였다.(2024. 8. 28)
▲2023년 8월 25일 JS 루완다 호텔 볼룸에서 열린 '가룻군 투자의 날’ 행사
▲8월 22일(목) 전 가룻 군수
루디 구나완(왼쪽) 예방.
가운데는 헨디조 기자.
오른쪽은 신성철 데일리인도네시아 대표. 오른쪽 앞은 엄강심 박사
▲마침 8월 22일은
빵에란 빠빡의 기일이기도 해서 그의 묘소에서 열린 행사에도 참석했다.
*배동선 작가
- 2018년 ’수카르노와 인도네시아 현대사’ 저자
- 2019년 소설 '막스 하벨라르' 공동 번역
- 2022년 '판데르베익호의 침몰'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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