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기고란 [칼럼4] 파타힐라의 ‘완벽한 승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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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타힐라의 ‘완벽한 승리’
최수진 (역사 연구팀 수석 연구원)
“ 빠꾸안의 풍요로운 왕국에서 사람들은 먹을 걱정, 입을 걱정 없고, 쌀은 넘쳐나며
데와 구루(Dewa Guru)의 축복이 온 땅에 퍼지고 모든 이들이 부유하네,
이 땅의 명성이 다른 땅으로 번져가네….”
( Pantun Bogor: Kujang di Hanjuang siang, Sutaarga 1984:47)
빤뚠(Pantun)은 인도네시아의 구전문학의 한 장르인 4행 시조(時調)이다. 빠꾸안(Pakuan)혹은 빠자자란(Pajajaran)은 순다왕국의 수도(지금의 보고르)를 뜻하며, 순다국을 빠꾸안의 왕국, 빠자자란 왕국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산스크리트어인 ‘순다(Sunda)’의 어원은 희고, 아름답고, 순수하며, 밝고, 영특한, 여신의 이름이었다. 1000년의 역사를 가진 순다왕국은 669년에서 1579년까지 존재했던 아름다운 왕국이며 이 곳에서 인도네시아의 반세기 역사를 가진 수도 자카르타가 태어났다. 하지만 자카르타가 제 이름을 갖기까지 겪어야 했던 수난은 길었다.
파타힐라의 두 번의 승리
역사박물관의 순다네즈 파드랑 돌비석을 확인한 후, 우리는 파타힐라를 만난다.
순다항으로 첫발을 내디딘 포르투갈은 환영 받았다. 그리고 우호조약(1522)으로 순다항에서 후추 무역에
특혜를 받고 방어요새를 지어 순다를 지켜주기로 한다. 이렇게 외세와 손을 잡고 강력한 도시 방어력을 갖추게 된 순다는 예상대로 인접한 중부자바의 이슬람 술탄국들에게 위협이 되었다. 그리고 1526년 드막 술탄국의 봉신국인 찌레본 왕국의 장군이 1천452명의 군사를 이끌고 항구를 동서로 포위한채 순다 끌라빠를 불태운다(1526). 그가 바로 자카르타의 아버지라 불리는 파타힐라이다.
파타힐라는 포르투갈을 상대로 2번의 큰 승리를 거두고 순다 끌라빠를 자야카르타(Jayakarta) 즉, ‘완벽한 승리’’라고 이름짓는다. 그만큼 파타힐라의 승리는 자카르타 수도 역사에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드막 지역의 최고 지휘관, 파타힐라 (구글이미지)
두번째 승리는 포르투갈의 요새를 지으러 들어온 프란시스코 드사( Fransisco de Sa)의 함대가 좌초되어 그중 3대의 함선이 순다 항구에 들어오게 되었을 때 였다. 두아르테 코엘료( Duarte Coelho) 선장은 이미 순다끌라빠가 파타힐라의 손에 들어간지 모르고 3대의 함선들을 순다항구에 대고 군사들을 내리게 했다. 하지만 첫번째 배가 정박하자마자 파타힐라는 기다렸다는 듯 30여명의 포르투갈 군인들을 무차별 공격하고 잔인하게 살육한다(1527). 두아르테 선장은 대처할 틈도 없이 공격을 당하자 서둘러 남은 두대의 배를 돌려 말라카를 향해 도망간다. 당시 자바해를 항해하던 프란시스코 드사의 함선들은 순다 요새를 지키기 위해 다시 순다 끌라빠항으로 들어오기를 시도했지만, 이제 파타힐라의 군사력은 그누구도 대적할 수 없이 강력해 졌고, 결국 드사의 함선들은 자바섬에서 깨끗이 물러나고 만다. 파타힐라의 포르투갈과의 해전이 벌어진 곳은 지금의 ‘빠사르 이깐 ( Pasar Ikan ; 생선시장)’부근이다. 이 지역이 1520년대에는 모두 바다였다.
파타힐라는 누구인가?
파타힐라가 누구인가에 대한 기록은 분분하다. 단지 그가 포르투갈을 대파한 인물이라는 것에 의미를 두자면 굳이 그의 족보를 따질 필요는 없겠지만, 파타힐라가 수도 자카르타를 설립한 인물로 추대된 이후에는 더욱 그의 존재가 인도네시아 사회에서는 자주 논란이 되는 것이 사실이라고 한다.
▲ 자카르타 해양 박물관(Maritime Musium)의 파타힐라 왕자 모형 (사진=사공 경 )
대표적으로 3개의 설이 있는데, 그 첫번째는 그가 인도의 구자라트에서 온 아랍인의 아들이라는 설이다. 당시 파타힐라의 고향인 수마트라 북부 아체( Ache) 의 빠세이(Pasei) 지역에는 페르시안, 구자라트, 벵갈 상인들이 있었다. 파타힐라는 메카로 순례를 떠났다가 빠세이가 포르투갈에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중부 자바의 Jepara(1525)로 항해했고, 드막 술탄국의 세번째 왕인 뜨랑가나(Trenggana) 술탄의 여동생과 결혼하고 이듬해 순다 끌라빠를 함락시킨다. 순다 끌라빠에는 이미 수년간 구자라트 상인들이 있었기 때문에 파타힐라는 순다끌라빠의 강점과 약점을 쉽게 파악할 수 있었던 것이다.
두번째 설은 파타힐라가 이집트 출신의 학자이며 순다왕국의 실리왕이(Silliwangi)왕의 사위라는 설이다. 파타힐라는 포르투갈이 순다끌라빠에서 무역 혜택을 받자, 중부자바에 반땀( Bantam)이라는 왕국을 세우고 자신의 아들인 하사누딘( Hassanudin)에게 통치를 맡긴다. 그리고 드막 술탄에게 반땀왕국에 군대를 지원해주기를 요청한 후, 함께 포르투갈을 몰아내자고 제안했다. 결국, 파타힐라, 그리고 아들 하사누딘, 그리고 드막 술탄국이 연합하여 포르투갈을 순다끌라빠항에서 몰아낸다.
세번째 설은 파타힐라가 자바에 이슬람을 전파한 9명 중의 하나인 수난 구눙 자띠 (Sunan Gunung Jati) 와 동일 인물이라는 설이다. 수난(Sunan)은 순다 왕실의 후손이었고, 드막왕국의 공주들 중 한 명과 결혼을 한 인물이다. 하지만 최근 연구에 따르면 파타힐라는 찌레본-드막 동맹군의 사령관이 되었을 가능성이 크며 동시에 수난( Sunan)의 사위였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찌레본의 슴붕 산에 묘지에는 뚜바구스 빠세(Tubagus Pase)의 소유라고 적혀져 있는데, 이는 파타힐라와 동일인물일 가능성이 크다. 왜냐하면 이 묘지는 1568년에 죽은 수난구눙자띠 의 무덤 옆에 위치해 있고, 1526년 순다끌라빠를 함락시킨 파타힐라는 자신의 장인이 죽은지 몇년 후에 죽었다는 기록이 있다.
▲파타힐라 초상( Mozaik Nauval 작품, 구글이미지)
파타힐라가 순다-포르투갈 조약을 수정했더라면?
파타힐라가 누구인지를 밝히는 논란은 정치적으로 흐르고 있지만 팩트가 무엇으로 결론날지는 중요하지 않다. 포르투갈의 역사서에 기록되어 있듯이 팔라뜨한(Falatehan; ‘파타힐라’를 포르투갈어로 부르는 말 )이 포르투갈 군대를 물리치고 순다 끌라빠를 함락시켰다는 사실에 가치를 두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만약 파타힐라가 포르투갈을 물리치고난 후 1522년에 체결된 순다 끌라빠 조약을 수정했었다면 어땠을까? 아돌프 휴켄( Historical Site of Jakarta의 저자)은 파타힐라가 이 조약을 수정했었다면 반뜬과 자야카르타의 새로운 주군들은 찔리웅 강둑에 거대한 창고를 지을 네덜란드와 같은 포르투갈의 대적을 허락하지 않았을 것이고, 자바의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라는 아쉬움을 쓰고 있다. 이것은 충분히 가능성이 있었다. 포르투갈은 아시아의 대국을 점령하고 지배하려는 시도를 해본 적이 없었고, 늘 탐험한 지역의 도시를 무역의 거점으로 삼는 것에 그쳤던 나라였기 때문이다.
자카르타의 생일은 파타힐라의 승전일
파타힐라가 ‘완벽한 승리’를 거둔 1527년 6월22일을 자카르타의 생일로 정한 것은 수디로(Sudiro) 자카르타 주지사의 업적이었다. 수디로 주지사는 자카르타의 첫 주지사(1958-1960)를 역임했고, 당시 수깐또 박사( Dr. Soekanto)가 파타힐라의 승전일을 자카르타의 탄생으로 보아야 한다는 이론을 받아들였다고 한다.
하지만 여러 기록들에 근거하자면 1500년대 후기까지 ‘자야카르타’라는 이름보다 ‘순다끌라빠,끌라빠’ 등의 명칭이 계속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포르투갈의 역사가 주앙드 바로스(Joao de Barros ; 1496-1570)의 Da Asia Decada에 의하면 “xacatara por outro nome caravam ; 즉, ‘자카타라’ 또는 ‘카라밤(까라왕)’ 이라는 문구가 나온다. 이 책은 1615년에 출판되었지만 쓰여진 것은 1560년대 이다. 바로스는 고아, 리스본을 거쳐 말라카까지 18개월을 여행한 후 이 책을 썼기 때문에 여기 나오는 ‘xacatara’ 즉 ‘자카타라’라는 이름이 1560년대 초기부터 쓰여졌다는 합리적인 결론이 가능하다. 게다가 1596년 자카르타를 처음 방문한 네덜란드 첫 함대 코르넬리스 드 후트만(Cornelis de Houtman) 사령관은 공식적으로 이곳을 여전히 ‘끌라빠 (Kelapa)’ 라고 불렀다고 한다. 자카르타 혹은 자야카르타 라는 도시의 이름은 1527년 이래로 사용되었다는 사실은 역사적인 근거가 없는 추측일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자카르타의 옛 이름인 ‘자야카르타’라는 도시의 이름이 만들어진 것이 파타힐라의 업적으로 보는 데에는 이견이 없는 듯 하다. 후에 도시 이름의 변천사에 대해 다시 한번 자세하게 다루어 보려고 한다.
▲ 역사 박물관 앞 파타힐라 광장. 카페 바타비아, 보험회사 건물, 우체국 건물이 보인다.(사진=사공 경)
식민역사의 중심지인 구 시청 건물이자 역사박물관 앞 광장의 이름은 영웅 파타힐라의 이름을 따 파타힐라 광장이라고 지어졌다. ‘완벽한 승리’ 자야카르타의 시민들은 그곳에서 파타힐라를 떠올리며 오랜 역사의 상처를 이겨내고 당당해지고 싶었을 것이다. 파타힐라의 이름을 단 인도네시아 해군함정은 500년 전의 그때처럼 조국의 바다를 변함없이 지키고 싶었을 것이다. 파타힐라는 그들의 자존감의 상징이며 영원한 자카르타의 수호신으로 존재하는 것 같다.
*참고문헌
- A.Heuken SJ, 『Historical site of Jakarta』 (2007)
- Bagoes Wiryomartono, 『Traditions and Transformations of Habitation in Indonesia』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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