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기고란 세상의 모든 클리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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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엔 세계관이라는 것이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 국가들 사이의 역학관계를 공부하고 국제적 감각을 연마한 끝에 얻게 되는
하나의 '경지' 같은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요즘 흔히 말하는 세계관은 드라마나 영화 속에 등장하는 세계의 '설정'을 뜻하는 것으로 변질된 듯하다. 그렇게 설정된 세계관을 함께 공유하는
사람들이 그걸 토대로, 또는 그걸 발전시키거나 변형해 그 세계 속에 캐릭터들을 배치해 각자의 스토리를
전개해 가는 것이다.
그래서 세계관이란 더 이상 세상과 우주를 직관하는 개인의 이상이 아니라 필요하면 로열티를 주고서라고 빌려 쓰는 프랜차이즈 플랫폼이라
해야 할 것 같다.
작가가 다른 사람이 만들어 놓은 세계관을 차용하는 게 작가답지 않다는 생각을 하는 이들도 있겠지만 어차피 문화의 발전은 모방에서 시작하는
것이니 인기를 끄는 세계관에 수많은 작가와 독자 관객들이 열광하며 달려드는 걸 꼭 비난하진 않는다. 단지
처음 그 세계관을 만들어낸 사람의 놀라운 창의력에 경의를 표하고 규정에 따라 합당한 대가를 치르거나 제대로 출처를 밝히고 가져다 쓴다면 더 말할
나위 없지 않을까?
조앤 롤링의 해리포터, 조지 루카스의 스타워즈, 스필버그의
인디아나 존스를 비롯해 블레이드런너, 듄, 어벤져스, 저스티스 리그, 프레데터, 에일리언, 컨져링 같은 것들의 세계관은 대단하다고 밖에 할 수 없는데 사실 그들도 앞서 있었던 어떤 작품에서 영감을 받아
탄생했을지 모르지만 최소한 앞의 것들을 통합하고 발전시켜 세련되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박수받아 마땅하다.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 포스터
작품 속 세계관이 일반화되어 상식처럼 된 것도 적지 않다. 그중 하나가 좀비 세계관이다. 옛날 초창기의 좀비들에 비해 최근의 좀비들은 좀 더 빨라지고 변종들도 많이 출현했지만 변치 않는 법칙들은 누구나
알고 익숙해져 이제는 예측할 수 있는 클리셰가 된 것들 중 이런 것들이 대표적이다.
1. 죽은 사람이 좀비가 되어 돌아온다.
2. 물리면 감염되어 좀비가 된다.
3. 좀비들끼리는 서로 공격하지 않는다.
4. 부모 형제 자녀도 구할 수 없다. 감염되면 죽여야 한다. 모든 패륜이 합리화되는 순간이다.
5. 좀비의 주식은 초창기엔 인간의 뇌였지만 이후 인간 신체 전체가 되었다.
6. 목을 자르거나 뇌를 파괴하면 좀비도 죽는다.
7. 죽었다고 괴물이 될 리 없는데 영화에선 좀비가 되면 얼굴이 괴물처럼 변한다.
물론 나름 이런 클리셰를 극복하려고 좀비 발생원인이 바이러스나 특정 치료제의 부작용, 심지어 'REC' 시리즈에서는 지나치게 무리해 좀비가 악마의 빙의로 인해 발생하고 입을 통해 기생벌레 같은 것을 넘겨주며
숙주를 옮겨 다니는 것처럼 묘사했다.
그 좀비들이 뛰어다니기 시작하고 지성을 가진 좀비가 군단을 지배하고 돌연변이를 일으킨 특정 개체들이 각종 전투에서 무쌍을 찍지만 그렇게
한 텀을 돌고 돌아온 후 브래드 피트 주연의 <월드 워
Z>에서는 다시 좀비 세계관의 기본설정을 대체로 철저히 지키는 모습을 보인다. 오리지널의
힘이 큰 것이다.
좀비 영화가 대세 호러 장르가 된 것은 죽음에서 다시 일어난 내 딸, 아버지가 생전의 모습을
하고는 있지만 사실은 반드시 죽여 없애야만 할 불길한 '어떤 것'이
되어 있다는 점이 주효했다.
▲<월드 워 Z>
또 하나의 성공한 프랜차이즈 세계관은 뱀파이어 유니버스다. 그 기원이 오스만투르크와 싸운
루마니아의 군주이거나 좀 더 고대의 불길한 존재가 흡혈귀들의 아버지라는 설정이 일반적이다. 이 장르에
올라탄 작가나 영화감독들은 다음의 클리셰들을 금과옥조처럼 지키는 편이다.
1. 뱀파이어는 밤에만 행동하고 낮엔 관 속에서 잔다.
2. 햇빛 또는 자외선에 노출되면 불타 소멸한다.
3. 사람의 피를 주식으로 하지만 없으면 동물 피도 먹는다.
4. 사람 음식을 먹으면 지독한 고통을 느끼며 결국 다 게워낸다.
5. 문밖의 뱀파이어는 집주인이 들어오라고 허락하지 않으면 집안에 들어오지 못한다.
6. 좀비와 달리 뱀파이어에게 물리는 것만으로는 뱀파이어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뱀파이어의
피를 받아 마신 사람만이 뱀파이어로 거듭 난다.
7. 뱀파이어들에겐 특수능력이 있는데 완력이 세지는 것은 물론 엄청난 속도로 움직일 수 있고 사람의 정신을 지배하며 박쥐떼나 쥐떼, 연기 같은 것으로 변해 이동한다. 무엇보다도 늙지 않는다.
8. 뱀파이어를 죽이는 방법은 햇빛에 노출시키거나 심장에 나무 못을 박는 것이다.
9. 움직일 수 없는 낮에 안전을 위해 인간 조수나 하인을 고용하기도 한다.
10. 마늘과 십자가를 꺼린다.
11. 거울에 비치지 않는다.
과거 음습하고 괴기스럽기만 하던 존재가 최근엔 '늙지 않는다'는 점에 착안해 놀라운 미모를 영원히 유지하며 오랜
세월 인간세상을 관조하는 매력적인 존재로 묘사되기도 하지만 뱀파이어란 존재는 기본적으로 '피에 굶주린
사신'이다.
▲클로이 모리츠의 <렛미인>
이런 클리셰들은 수도 없이 많다. 슬래셔 영화에서는 가장 깝치는 놈, 숲 속에서 정사를 나누는 젊은이들이 가장 먼저 살해당하고 혼신의 힘을 다해 상대방을 공격한 후 '해치웠나?'라고 중얼거리면 상대방이 되살아나 중얼거린 사람을 죽여버리는 장면들. 추리소설
속 범인은 가장 범인이 아닐 것처럼 묘사되었던 사람 또는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 전원이었다는 식이다.
작품 속 세계관이 일반 상식이 될 정도라면 그만큼 많은 작품들이 나와 그걸 많은 사람들이 그 내용을 접했다는 것이니 결국 크게 각광받는
장르라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사람들이 좀비 영화와 뱀파이어에 빠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건 패륜과 살인을 결과적으로 정당화하는 장르의 특성상 당연시되는 과도한 피칠갑의 폭력이 주는 일정 정도의 카타르시스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이들 장르가 '무섭지만 사실은 절대 실제로는 발생하지 않을 상황'이어서
모두 안도하면서 좀비와 뱀파이어를 즐기는 것 아닐까?
그런데 이런 식으로는 좀처럼 설명하기 어려운 세계관이 웹소설과 웹툰을 중심으로 대세를 이루었다. 이른바
전생, 환생, 빙의 같이 죽은 이가 내세로 가지 않고 과거의
특정 시점으로 돌아가거나 소설 속이나 이 세계의 존재에 빙의하는 것이다.
세상에 포털이 나타나 마물들이 쏟아져 나오고 이들과 싸우는 특수능력자 헌터들의 이야기 그리고 게임처럼 변한 세상에서 사람과 세상에
대한 평가를 스탯창 위의 수치로 확인하는 이야기들이 넘쳐난다.
이 현상 속에서도 좀비와 뱀파이어의 이론을 대입해 설명할 수 있을까?
다음에 그 얘기를 해보자.
*배동선 작가
- 2018년 ’수카르노와 인도네시아 현대사’ 저자
- 2019년 소설 '막스 하벨라르' 공동 번역
- 2022년 '판데르베익호의 침몰'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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