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기고란 호러영화 <수잔나: 말람 주맛 끌리원>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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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러영화 <수잔나: 말람 주맛 끌리원> 리뷰
배동선
▲<수잔나는 무덤 속에서 숨쉰다>(왼편)과 <수잔나: 말람 주맛 끌리원> 포스터
<수잔나: 말람 주맛 끌리원(Suzzanna:
Malam Jumat Kliwon)>은 루나 마야(Luna Maya) 주연의 원톱
호러 영화다.
자바의 전통적 5요일이 서양식 7요일과 만나 5x7=35요일을 낳았다. 저 복잡한 제목 속에 등장하는 주맛(Jumat)은 서양력의 금요일, 끌리원(Kliwon)은 자바력 5요일의 마지막 날이다. 즉 주맛 끌리원이란 금요일과 끌리원 요일이 겹치는 날이란 뜻이다.
그리고 요즘은 그 의미가 대체로 퇴색되어 가는 중이지만 자바의 하루는 해가 지는 시간을 기준으로 나뉜다. 서양력 기준 목요일 저녁 해질 때부터 금요일 저녁 해질 때까지가 자바의 금요일이 되므로 말람 주맛, 즉 자바의 금요일 밤이란 사실 우리의 목요일 밤이다. 귀신들이 가장
많이 활동한다고 알려진 시간이어서 인도네시아 무속이나 호러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시간대다.
한편 ‘수잔나’라는 이름은 영화 속 루나 마야가
분한 여주인공의 이름이지만 1980년대 인도네시아의 대표적인 호러퀸 수잔나의 오마주이기도 하다. 특히 그녀가 출연한 <순델볼롱(Sundelbolong)>(1981)은 당시 엄청난 센세이션을 일으켰는데 그래서 루나 마야의 <수잔나> 영화들에는 모두 순델볼롱이 등장한다. 순델볼롱이란 원한을 품고 죽은 여성에게서 발생한 극강의 원귀다.
루나 마야의 첫 수잔나 영화는 2018년의 <수잔나는
무덤 속에서 숨쉰다(Suzzanna: Bernapas Dalam Kubur)>였다. 여기서 루나 마야가 분한 수잔나는 남편이 집을 비운 사이 악당들에게 습격당해 억울한 죽음을 맞는데 그렇게 죽은
그녀가 다음 날 아무 일 없는 것처럼 집에서 일상을 보내는 모습이 목격되면서 살인자들은 혼란에 빠진다. 물론
그녀가 더 이상 인간일 리 없다.
하지만 여기선 그녀가 왜 순델볼롱이 되어 나타나는지 그 개연성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 원한을
품고 죽으면 대체로 꾼띨아낙(Kuntilanak) 귀신이 되지만 그들 모두가 순델볼롱이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 필요충분조건은 임산부가 산뗏저주를 맞아 정상분만을 하지 못하고 아기가 산모의 등을 뚫고
나오면서 죽음을 맞는 것이다. 그래서 순델볼롱 귀신의 대표적 특징은 등에 난 큰 구멍이다. 2023년작 <수잔나: 말람
줌앗 끌리원>은 그런 과정이 잘 묘사되어 있다.
시놉시스
수리아(아흐맛 메간타라 분)와 수잔나는 연인
사이다.
수리야는 참호전투 비슷한 씨름대회에서 곧잘 우승해 송아지를 우승상품으로 타는 장사 또는 싸움의 달인처럼 등장하지만 나중에 나오는 격투장면을
보면 그 실력이 점점 의심스러워진다.
그곳의 지주 라덴 아리오(띠요 빠꾸사데워 분)는
자신의 부를 토대로 마을 사람들에게 고리대금업을 하며 행패를 부린다. 수잔나도 부모의 빚 때문에 해결사들의
협박을 견디지 못하고 라덴 아리오의 첩이 되어 임신하게 된다. 아기를 갖지 못하는 본처 미나티(살리 마르셀리나 분)를 대신한 씨받이 성격이 크다. 하지만 본처는 시기심을 못이겨 용한 두꾼을 통해 수잔나에게 산뗏 저주를 내리게 하고 수잔나는 괴기한 출산과정을
겪으며 참혹하게 사망하고 만다.
그렇게 태어난 아기를 라덴 아리오가 거두지만 본처 미나티는 호시탐탐 아기의 목숨을 노리는 가운데 몰래 매장된 수잔나의 시신을 파낸
수리아가 악마의 힘을 빌어 수잔나를 순델볼롱으로 되살려낸다. 그리고 아기를 돌려받기 위해 라덴 아리오
측의 깡패들과 산뗏 저주술 두꾼 끼자야와 혈투를 벌이기 시작한다.
순델볼롱
원래 야사와 전설에 등장하는 꾼띨아낙과 순델볼롱은 거의 자연재해급의 강력한 력을 발휘해 상대방을 압도한다.
그래서 서깔리만탄 주도인 뽄띠아낙 건설고사에 등장하는 꾼띨아낙은 정글을 개척해 들어오는 알카드리 왕자의 부대들을 집요하게 괴롭히며
전진을 막아 알카드리는 타고 온 전선에 달리 포를 떼어와 꾼띨아낙의 웃음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포격을 하며 정글 안으로 전진해 마침내 꾼띨아낙의
본거지가 있던 곳에 왕궁을 세우고 그곳 이름을 여성의 원귀란 의미인 ‘뽄띠아낙’이라 짓는다. 군대와 싸울 정도의 전투력을 발휘했던 무시무시한 꾼띨아낙에
대한 경계와 두려움을 도시 이름에 담으려 했던 것일까?
또 다른 자바의 고사에서는 산뗏저주로 처참한 죽음을 맞은 후궁이 원한 가득한 순델볼롱이 되어 나타나 왕궁은 물론 왕국 전체를 멸망시키기도
한다. 하지만 <수잔나> 영화에 등장하는 순델볼롱은 그 정도는 아니어서 재해레벨이 비교적 낮은 편이다.
잘 알려진 순델볼롱의 성격은 원수들에겐 한없이 매서운 원귀이지만 서민들에게는 대체로 친근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서민들의 음식을 즐겨 먹고 그 몇 배의 대금을 치르고 사라지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 돈이 전부 나뭇잎으로
변해 당장은 손해를 보지만 그런 일이 벌어지고 나면 이후 메어 터지도록 손님들이 몰려들어 엄청난 대박이 난다는 것이다.
▲박소 장사를
괴롭히는 순델볼롱. 왼쪽은 2023년작, 오른쪽은 1981년작
그래서 1981년 작 <순델볼롱>에서도 수잔나가 길가 포장마차 같은 ‘와룽’에서 박소 수십 인 분을 시켜 먹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 먹은 것 모두가 등 뒤의 구멍을 통해 구더기들과 함께
바닥으로 떨어진다. 2023년 작에도 박소 장사가 우리로 치면 장사용으로 개조한 리어카 비슷한 ‘그로박(grobak)’을 끌고 가다가 수잔나를 만나는데 이는 1981년 작 <순델볼롱>을
대놓고 오마주한 것이다.
영화 후반으로 가면 유모 라티의 모습으로 변한 수잔나가 아기를 찾으려고 라덴 아리오의 집에 들어가는데 거기서 라띠의 뒷모습을 보던
여주인 미나티가 악취를 맡은 듯 자기 코를 붙드는 장면이 나온다. 이는 ‘앞에서 보면 아름답고 향기가 풍기지만 뒤에서 보면 등에 난 구멍은 썩은 내가 나며 구더기들이 드글거린다’는 순델볼롱에 대한 일반적인 묘사를 따른 것이다.
영화 맨 마지막엔 수리야가 순델볼롱이 된 수잔나의 정수리에 쇠말뚝을 박아 넣는 장면이 나온다. 물리적
공격에 아무런 피해도 입지 않는 것이 당연한 순델볼롱 귀신이 드라큘라도 아닌데 쇠말뚝에 치명상을 입는 이유는 ‘빠꾸
꾼띨아낙’(paku kuntilanak)의 전설을 알아야 비로소 이해할 수 있다.
앞서 언급한 자바 왕국을 멸망시킨 순델볼롱이 막 발생한 초창기에 마침 그곳을 지나던 용한 이슬람 선생 울라마가 있어 분연히 순델볼롱에
맞선다. 그런데 그의 퇴마 방식은 순델볼롱을 퇴치하는 것이 아니라 대못을 순델볼롱의 정수리 부근 어딘가에
박아 넣어 순델볼롱의 귀기를 지우고 무해한 인간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그래서 원래의 아름다운 후궁의
모습으로 돌아왔지만 그녀의 몸 속에는 귀신의 원한과 본성이 그대로 숨어 있었다.
그러자 본처인 왕비는 다시 시기심에 불타오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후궁을 크게
아꼈던 국왕이 그렇게 돌아온 후궁을 더욱 극진히 사랑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왕비는 다시 용한 두꾼을
불러 꾸짖었고 두꾼을 자신의 능력을 증명하기 위해 어느 연회에서 후궁의 머리에 박힌, 그러나 일반인들의
눈에는 보이지도 않는 그 대못을 뽑아내 버렸다. 그러자 모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후궁은 무시무시한
순델볼롱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그녀가 사실은 순델볼롱 귀신이란 사실을 모든 이들 앞에서 성공적으로 폭로한
것이다.
하지만 상황은 그렇게 끝나지 않았다. 그렇게 본 모습을 찾은 순델볼롱이 최악의 저주를 퍼부어
궁궐과 왕국을 절멸시켰고 살아남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영화 <빠꾸 꾼띨아낙>
이 고사를 토대로 2009년에 당대의 호러퀸 데위 뻐르식이 주연한 <빠꾸 꾼딜아낙>이란 영화도 나왔다.
한편 영화 속 두꾼인 끼자야는 최악의 산뗏저주슬이라며 ‘바나스빠띠’라는 명칭을 언급하는데 원래 도깨비불 같은 인도네시아의 불귀신 중 하나지만 저주술로 주로 사용된다. 영화 속에서는 두꾼이 검은 닭을 이용하는데 십중팔구 이 검은 닭은 벼슬부터 발, 내장까지 새까만 찌마니 닭을 뜻한다. 찌마니 닭은 피까지도 검어
주술에 많이 사용되는데 한 마리에 수백 만원을 호가하기도 한다. 물론 이 영화에선 제작비 때문에 진짜
찌마니 닭을 썼을 리 없다.
그런데 문헌에서 확인되는 바나스빠티 저주술은 영화 속 내용과는 사뭇 다르다. 보통은 암탉이
처음 낳은 달걀이 매개체로 사용된다. 이 달걀에 대고 죽이고 싶은 대상을 저주하는 주문을 외운 다음
불꽃 위에서 그 달걀을 터뜨리면 그 속에서 불덩어리 모습을 한 바나스빠티가 튀어나와 곧장 저주의 대상에게 날아간다고 한다. 바나스빠티 산뗏저주를 맞은 사람은 결코 죽음을 피할 수 없는데 오직 저주를 시전한 사람만이 그 저주를 무효화시킬
수 있다고 알려져 있다.
대략 이런 내용을 알면 크게 막히는 부분 없이 술술 영화를 볼 수 있다.
극복하지 못한 과제들
1편 <수잔나는 무덤 속에서 숨쉰다>와 2편 <수잔나: 말람
줌앗 끌리원>은 모두 소라야 인터시네 필름스에서 만들었다. 하지만
이들은 서로 내용이 연결되지 않는 전혀 별개의 영화들이다.
흥행성적도 나쁘지 않아 1편은 2018년에 335만 명 관객이 들어 로컬영화 흥행순위 2위를 달렸고 2편은 219만 명이 들어 2023년
흥행순위 8위를 달렸다.
1편의 로키 소라야 감독이나 2편의 군뚜르 수하르얀토 감독은 모두 호러영화 전문 감독으로
통하지만 타율이 그리 좋은 편은 아니다. 이 두 영화 역시 마찬가지다.
특히 시나리오의 한계가 분명히 보인다. 밋밋하고 단순할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당한 성적을 낸 것은 순전히 루나 마야라는 여배우가 가지고 있는 화제성과 흥행성 때문이다. 하지만 루나 마야가 원작의 수잔나와 비슷한 분장과 분위기를 보일 수 있었을지 몰라도 이 배역에 딱 맞는 배우가
아니라는 당연한 사실을 감독이 애써 외면하고 있다는 느낌을 영화 러닝타임 내내 느꼈다.
2020년 12월 한국일보 인터뷰 기사는 루나 마야를
‘2004년 데뷔한 인도네시아 국민 여배우’라고 소개한다.
1983년생인 그녀는 영화배우뿐 아니라 가수, 모델, 프레젠터
등 다양한 연예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수많은 영화와 드라마, 뮤직비디오를 찍고 여려 편의 싱글 앨범도
냈다. 그런데 그녀를 가장 유명하게 만든 것은 아니러니하게도 2010년
터진 섹스비디오 사건이었다. 2006-2007년 사이에 찍힌 두 건의 섹스비디오는 모두 당시 유명 밴드
피터팬(지금은 노아 Noah로 개명)의 보컬 아리엘의 성관계 장면을 담고 있었는데 그중 하나는 루나 마야, 또
다른 하나는 아쩨 출신 모델 쭛 따리(Cut Tari)를 상대로 하고 있었다.
당시 엄청난 사회적 파장을 몰고 온 이 사건으로 인도네시아에서 루나 마야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게 되었는데 아리엘은 동영상을 다른
사람에게 보여준 사실이 확인되어 유죄를 받고 실형을 산 반면 루나 마야는 피해자로 분류되면서 법적 조치를 피했고 오히려 아리엘과의 의리를 보이며
대중의 호감을 얻어 영화와 음악에서 계속 승승장구했다. 당시 그녀는
20대 중반으로 극강의 미모를 자랑하고 있었다.
문제는 <수잔나: 말람 줌앗 끌리원>에서 토호 부자에게 첩이 되어 끌려가는 수잔나, 또는 1편의 신혼부부 새댁을 연기하던 2018년과 2023년의 루나 마야는 이미 30대 후반-40대로 접어드는 중년이었다는 것이다. 그녀는 여전히 아름다웠지만
그 역을 소화하기엔 나이든 티가 역력했다.
더욱이 상대 수리야 역의 아흐맛 메간타라는 1996년생으로 이제 막 20대 중반을 넘어서 13년 터울의 루나 마야에겐 거의 조카뻘이 되는데
두 사람이 죽고 못사는 연인으로 나오는 것이 시각적으로 위화감을 불러 일으켰다. 하지만 그래서인지 순델볼롱이
된 모습은 묘하게 더욱 실감났다.
아흐맛 메간타라는 인도네시아 역사상 최다 관객을 들인 <무용수마을의 대학생봉사활동(KKN di Desa Penari)>에도 숲속 뱀의 귀신에게 홀리는 남학생 비마 역을 소화했다.
▲<무용수마을의 대학생봉사활동>에 출연한 아흐맛 메간타라
하지만 역시 가장 심각하고도 고질적인 부분은 엉성한 시나리오의 문제다.
세계관이나 인물설정이 치밀하지 못하니 그렇지 않아도 신뢰성 떨어지는 귀신영화의 퀄리티가 한없이 떨어져 버렸다.
전에 리뷰했던 <망꾸지워> 역시 그리
잘 만든 영화라 볼 수 없지만 거기서는 지성이란 한 톨도 남아 있지 않고 오직 자기 피붙이를 보호해야 한다는 강박적 모성애만이 본성으로 남은 꾼띨아낙
귀신을 보여주었다. 뇌도, 신경체계도 없는 귀신이 합리적, 이성적 판단을 하지 못하고 오직 단 하나의 ‘본능’에 의해서만 움직인다는 것은 꽤 신뢰가 가는 설정이다.
하지만 <수잔나> 영화 속 순델볼롱
귀신이 생전의 애인 수리야와 함께 마을 자경단 격인 한십(Pertahanan Sipil) 대원들까지
포섭해 미션 임파서블 같은 침투작전을 벌이는 모습은 좀 어이가 없다.
이 정도의 시나리오를 가진 영화가 연간 흥행순위 2위 또는 8위를 차지한다는 것은 그만큼 좋은 시나리오가 많지 않음을 반증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정적이고 감성적인 드라마
장르의 좋은 영화들보다 유명한 배우가 귀신으로 분해 등장하는 대체로 허접한 영화에 더 많은 관객이 드는 인도네시아 영화시장의 현실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배동선 작가
- 2018년 ’수카르노와 인도네시아 현대사’ 저자
- 2019년 소설 '막스 하벨라르' 공동 번역
- 2022년 '판데르베익호의 침몰'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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