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기고란 영화 <죽음의 철도(Kereta Berdara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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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죽음의 철도(Kereta Berdarah)>
배동선
원제 <Kereta
Berdarah>는 ‘피 흘리는 열차’라는
뜻이지만 넷플릭스에 오른 <The Train of Death>라는 영문제목을 기준해 <죽음의 열차>로 번역했다. 넷플릭스엔 아직 한국어 자막이 없다.
최근 <꾼띨아낙> 연작과 다누르 유니버스의
프랜차이즈 영화들 몇 편 등 공포영화로 이름높은 리잘 만토파니 감독, 인도네시아 메이저 영화제작사 반열에
올라선 MVP 픽쳐스, 영화계를 주름잡는 MD 픽쳐스 인도계 펀자비 가문의 라암 펀자비 제작자 등 쟁쟁한 사람들이 만든 이 영화는 나름 CG와 특수분장에 상당한 공을 들였지만 어디선가 보고 들은 괴담과 공포영화들을 짜집기한 듯한 느낌이다.
간신히 100만 관객을 달성했지만 말 그대로 턱걸이.
100만27명이 이 영화를 본 것으로 나타난다. 그
스물 일곱 명에게 감사해야 하는 영화.
시놉시스
줄거리는 이렇다.
오랜 시간 암투병을 하다가 수술에 실패해 마지막 희망마저 버린 여주 뿌르나마(하나 말라산
분)는 그 사실을 숨기고 오히려 완치되었다고 속여 동생 끔방(자라
레올라 분)에게 마지막 좋은 추억을 남겨주기 위해 함께 상카라(Sangkara)
지역 휴양지로 향하는 기차에 오른다. 해당 지역 지자체가 철도와 휴양지 공사를 막 마쳐
이제 첫 운행을 하는 다섯 량짜리 열차가 이 영화의 무대다.
공사 과정에서 상당수의 인부들이 죽거나 실종되었는데 공사를 주관한 지자체는 나몰라라 하고 있다는 설정이다. 군수 바라(Bara) 역은
<무용수마을의 대학생봉사활동> 속 오지 마을의 이장, <사탄의 숭배자2: 커뮤니언>의
우스탓 역 등 감초 조연으로 선한 역과 악역을 넘나드는 끼끼 나렌드라(Kiki Narendra)가 연기했다.
그외의 배우들은 대체로 낯선 편인데 철도 공사판에서 실종된 남편의 행방을 묻는 람라Ramla) 역의
뿌뜨리 아유디야는 바로 앞서 리뷰한 <꾸양(Kuyang)>(2024)에서
흑마술사 미나 우웨 역으로 나왔다. 꽤 독특한 분위기의 여배우이지만 이 영화에서는 그녀를 잘 활용하지
못했다.
▲군수와 투자자들. 왼쪽 두 번째가 바라 군수를 연기한 끼끼 나렌드라 배우
목적지까지 가려면 다섯 개의 터널을 지나야 하는데 터널을 하나 지날 때마다 맨 뒤부터 열차가 한 량씩 마물들에게 점령되어 터널 안이
분리된다. 결국 목적지에 도착하기 전 열차의 모든 객차가 복수심에 가득 찬 마물들에게 점령될 판. 승객들은 마물들과도 싸워야 하지만 승객들이 목숨을 잃는 상황 속에서도 철도와 휴양지의 이권을 지키려는 부패한
관료의 탐욕과도 싸워야 한다.
데자뷰
이 영화를 보면서 세 편의 영화가 떠오르는데 그중 하나는 <설국열차>(2013)다.
<설국열차>는 맨 뒤쪽 객실열차의 서민들이 반란을 일으켜 앞쪽 객차의 귀족들을
중심으로 구축된 열차 내의 지배구조를 뒤집는다는 내용.
물론 <죽음의 열차>가 그런 심오한 철학까지 담진 않았지만 뒤쪽 4번, 5번 두 개의 객차에는 서민들이, 2번 VIP 객차에는 부자들, 1번
VVIP 객차는 관료와 투자자들을 위해 소파와 댄스장까지 마련된 곳이며 식당차인 3번 칸조차
서민들을 위한 매점과 부자들을 위한 고급 식당차로 나뉘어져 있다. 감독은 계급 간의 단절과 차별을 보여주려
한 것 같지만 그리 성공적이지 못했다.
터널을 지날 때마다 마물들이 나타나는 것은 <부산행>(2016)에서
열차 속 좀비들이 터널에 들어서면 꼼짝 못하게 되는 것을 반대로 벤치마킹한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긴
터널을 지나면서 객차가 한 칸 한 칸 마물들에게 먹힌다는 설정은 흥미롭긴 하지만 왜 아무 잘못도 없는 사람들이 그 열차를 탔다는 이유만으로 잔혹한
죽음을 맞아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설득력이 부족하다. 최소한 <파묘>에서 ‘일본 귀신은 가까이 가면 아무 이유없이 아무나 다 죽인다’는 식의 성격 설명이라도 있어야 하지 않았을까?
앞서 언급한 뿌뜨리 아유디아 배우의 람라(Ramla)라는 흔치 않은 이름도 어딘가 넷플릭스
오리지널 <지금 우리 학교는>의 최남라의 이름에서
가져온 것이란 인상이 강하다. 순전히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죽음의 열차> 속 람라와 <지금 우리 학교는>의 남라
사람들이 한 그루 나무가 되어버리는 것도 어디선가 많이 보았던 장면이어서 식상했지만 CG가
제법 자연스러웠다는 점만은 인정하고 가기로 한다.
빗나간 과녁
열차에서 벌어지는 사건은 대개 거기 탄 다양한 승객들이 품고 있는 개개인의
사연과 어우러져 상승효과를 일으키며 클라이맥스를 향해 달려가는 것이 보통인데 앞에 예를 든 <설국열차>, <부산행>이 그렇고 <오리엔트 특급살인(Murder of The Oriendt
Express)>(1974), 제이크 질렌할의 <소스코드>(2010)가 그런 전형을 따른다.
<죽음의 열차>에도 그런 시도가 엿보인다. 마지막
자매여행을 떠나는 말기 암환자 언니와 틴에이저 여동생, 탐욕스러운 군수와 정의로운 정치인, 귀족생활을 즐기는 부자 투자자들, 정의와 탐욕 경계선의 선 기관사, 회사와 승객 사이에 선 나약한 승무원들, 오만한 부자 승객, 빵빵한 돈가방을 들고 도피행각을 기도하는 연인 등.
하지만 서로의 접점이 전혀 없는 개인사를 가지고서도 둘도 없는 케미를 이루는 <부산행>의 공유와 마동석, 서로를 버릴 수 없어 결국 비참한 최후를 공유하고 마는 최우석과 소희 등과는 달리 <죽음의 열차> 속 등장인물들은 자기들만의 이야기를 조금도
확장하거나 진전시키지 못한다.
승객들이 이야기를 전개 시키지 못하니 그 책임이 죄 없는 귀신들에게 전가된다. 그러니 터널의
어둠 속에서 나타나 객차를 하나하나 접수하는 그들은 승객들의 정신을 지배하기도 하고 감염시키고 때로는 머리를 터트리고 온몸을 으깨며 호러 고어쇼를
연출하지만 그런 열연에도 불구하고 끊어진 스토리가 제대로 이어져 붙지 않았다.
철도와 터널 공사 중에 많은 이들이 죽거나 실종되어 그 가족들이 상카라 역에서도 시위를 벌이고 람라는 열차에 올라타 책임자와 대면하려는
영화 초반의 분위기는 이제 열차가 출발하고 나면 그 희생자들의 처절한 복수가 시작될 것이란 예측을 하게 만든다.
하지만 정작 열차를 공격하는 것은 희생자들의 원혼이 아니라 철도 개발로 숲이 황폐해지면서 자기
터전을 잃은 숲 속 마물들이다. 관객의 예측을 뒤엎고 뒤통수를 치는 것은 훌륭한 시도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스토리를 대놓고 말아먹어 버리면 어쩌자는 것일까?
스토리의 전개가 ‘권력자 vs 서민 피해자’ 구도로 시작된 영화가 후반부에 접어들면서 ‘주거 환경 파괴에 분노해
복수하는 마물 vs 파괴의 주범 인간’ 구도가 되면서 권선징악의
호러영화가 환경보호영화로 탈바꿈한다.
감독은 이 영화를 통해 자기가 무슨 말을 하려 했던 것인지 완전히 잊어버린 것처럼 보인다. 물론
그렇게 물어보면 다 의도한 것이라고 답하겠지만.
마물들
2번 객차를 공격하는 장면에서 등장한 마물들 중에 익숙한 얼굴이 있어 놀랍고도 반가웠다.
사진으로는 분명히 나와 있지 않지만 저건 저팔계를 모티브로 삼은 것이 분명해 보였다. 한편
배역상 라뚜 진(ratu jin), 즉 마물들의 여왕은 하반신이 덤불로 되어있고 상체에도 줄기 또는
뿌리로 보이는 조직으로 뒤덮여 있어 식물 계통의 마물, 우리로 치면 산신 같은 존재인 셈이다.
진(jin 또는 dzinn)은 귀신이라기보다는
인간이나 일반 고등생물들과는 전혀 호환되지 않는 생존방식을 가진 존재로 서로 선을 넘지만 않으면 아무 문제없지만 그 선이 무너지는 순간 파국을
맞게 되는데 대개의 경우 인간들이 철저히 파괴되는 결말을 맞는다. 그래서 이들을 ‘마물’이라 표현하는 것이므로 이 영화는 엄밀히 귀신영화가 아니다. 귀신이 나오지 않으니 말이다.
그리고 눈썰미 좋은 관객들은 금방 눈치채겠지만 이 영화엔 이슬람적 요소가 완전히 배제되어 있다. 히잡을
쓴 여인이나 알꾸란의 구절들, 이슬람을 떠올리게 할 만한 요소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게 요즘 인도네시아 호러 영화들이 언제 자기들에게 덧씌워질지 모를 ‘신성모독’의 혐의를 피하기 위해 취하는 방식 중 하나다.
하지만 그 선택은 한계가 뚜렷하다. 역대 로컬영화 흥행 상위를 기록한 호러영화 <무용수마을의 대학생봉사활동>이나 <사탄의 숭배자> 연작 조차도 숄랏 장면 등 이슬람적 요소를
영화 곳곳에 배치했다. 그게 어쩌면 <끼블랏(Kiblat)>의 경우처럼 영화상영 자체를 막는 ‘신성모독’의 혐의로 돌아올지 모르지만 영화는 상업의 세계.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이다.
이 영화는 로 리스크. 그래도 100만 관객
넘었으니 하이 리턴? (끝)
▲아무리 그래도 여주 자매는 소개해 줘야지.
왼쪽이 주인공 뿌르나마 역의 하나 말라산, 오른쪽이 동생 끔방 역의 아역배우 출신 자라 레올라
*배동선 작가
- 2018년 ’수카르노와 인도네시아 현대사’ 저자
- 2019년 소설 '막스 하벨라르' 공동 번역
- 2022년 '판데르베익호의 침몰'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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