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사트리아 데와: 가똣까차> 관람을 위한 사전지식 (2/2) > 자유기고란

본문 바로가기

팝업레이어 알림

팝업레이어 알림이 없습니다.
사이트 내 전체검색

자유기고란 영화 <사트리아 데와: 가똣까차> 관람을 위한 사전지식 (2/2)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17,639회 작성일 2022-06-19 00:00

본문

영화 <사트리아 데와: 가똣까차> 관람을 위한 사전지식 (2/2)
 
배동선 

최강의 신
 
▲자바의 와양 그림자극 속의 가똣까차

자바 와양 그림자극에서는 탯줄을 자른 후 나라다는 떠뚜카를 신들의 세계인 까향안(kahyangan)으로 데려갔는데 마침 그곳은 뜨라벨라수켓 왕국(Kerajaan Trabelasuket) 의 스끼뿌 재상(Patih Sekipu)으로부터 공격을 받고 있었다.
 
스끼뿌 재상은 원래 깔라쁘라코나(Kalapracona) 국왕이 여신 바타리 수프라바(Batari Supraba)에게 청혼하기 위해 사절로 온 것인데 청혼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신들과 전쟁을 벌인 것이다. 떠뚜카가 스끼뿌를 맞아 싸웠다. 탯줄을 막 뗀 아기가? 아무튼 뛰어난 도술을 사용하는 재상에게 연신 공격을 받았지만 맞으면 맞을수록 떠뚜카는 더욱 큰 힘을 응집하며 스끼뿌에게 달려 들었다.

끝내 떠뚜카를 쓰러뜨리지 못한 스끼뿌는 체면을 잃었지만 떠뚜카 역시 스끼뿌를 이기지 못했다. 나라다는 떠뚜카를 데려다가 짠드라디무카(Candradimuka) 화산에 던져 넣은 후 까향안의 모든 신들이 자신들의 성유물 무기들을 화산 속에 쏟아 넣어 떠뚜카를 강화시키려 했다. 그러자 얼마 후 떠뚜카가 성인 남성의 모습으로 변해 화산 분화구 위로 모습을 드러냈다. 신들이 던져 넣은 무기들은 모두 녹아 그의 몸속에 흡수되어 그와 하나가 되어 있었다. 그런 후 다시 스끼뿌와 맞붙은 떠뚜카는 날카로운 송곳니로 스끼뿌를 물어뜯어 죽여 버렸다.

그때 크리슈나와 빤다와 가문의 사람들이 모두 까향안에 들어가 모든 신들과 함께 승리를 축하하는데 뜬금없이 크리슈나가 떠뚜카의 날카로운 송곳니를 잘라내며 거인족의 잔혹한 심성을 다시는 사용하지 말라고 명했다. 만약 떠뚜카가 그 송곳니를 그대로 가지고 있었다면 훗날 대전쟁에서 더욱 큰 활약을 했을지도 모른다는 측면에서 크리슈나 신은 분명 떠뚜카의 편이 아니었다. 아르주나를 수호하는 크리슈나는 왠지 떠뚜카에게 우호적이지 않았지만 신의 마음은 인간이나 거인들이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한편 최고신 바타라 구루는 떠뚜카의 공을 치하해 바수난다 모자(Caping Basunanda), 안트라쿠수마 가슴받이(Kotang Antrakusuma) 갑옷, 빠다카차르마 가죽신(Terompah Padakacarma) 등 일련의 전투용 성유물 복장을 하사했다. 떠뚜카는 이때부터 가똣까차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 복장을 차려 입은 가똣까차는 하늘을 날 수 있게 되었고 그 길로 곧바로 뜨라벨라수켓 왕국으로 날아가 깔라프라코나 국왕을 죽였다.
 
▲바수난다 모자(위), 안트라쿠수마 가슴받이(왼쪽)과 빠다카차르마 가죽신(오른쪽)
 

혼인
마하바라타 서사에서는 가똣까차가 용들의 왕국 공주인 알리아와티(Ahilawati)와 결혼하여 바르바리카( Barbarika)라는 아들을 낳는다. 하지만 자바 와양 그림자극에서는 아르주나의 딸 뻐르기와(Pergiwa) 즉 자신의 사촌과 결혼하는 것으로 나온다.

그는 뻐르기와와 혼인하기에 앞서 자신의 경쟁자인 코라와(Korawa) 가문 두르요다나(Duryodana)의 아들 락스마나 만드라쿠마라(Laksmana Mandrakumara)를 먼저 제압하는 쉽지 않은 과업을 수행해야 했다.

뻐르기와와 혼인한 가똣까차는 사시끼라나(Sasikirana)라는 아들을 낳았는데 그는 훗날 아르주나의 손자 또는 아비마뉴의 아들인 뿌라부 빠리끄싯(Prabu Parikesit)의 치세 중 벌어진 하스티나뿌라(Hastinapura) 전쟁에 총사령관으로 참전하는 인물이 된다. 하지만 또 다른 버전에서는 가똣까차가 뻐르기와 외에도 수리야와티(Suryawati), 숨빠니와티(Sumpaniwat)라는 두 명의 아내를 더 얻게 되고 그들에게서 각각 수리야까차(Suryakaca), 자야숨뻬나(Jayasumpena)라는 아들을 낳는다.


쁘링간다니 왕 (Raja Pringgandani)
자바 전승 속의 가똣까차는 인간과 거인의 혼종으로 묘사되지만 그의 어머니는 일반 미개한 숲 속의 거인이 아니라 쁘링간다니 왕국 쁘라부 뜨렘보코(Prabu Tremboko) 왕의 공주로 묘사된다.
뜨렘보코 왕은 상쿠니(Sangkuni)의 참소를 들은 모든 빤다와 가문 사람들의 우두머리 빤두(Pandu)의 손에 죽임을 당했다. 이에 뜨렘보코 왕의 장남인 아림바가 왕위를 물려받지만 모든 빤다와 사람들이 아마르타 왕국(Kerajaan Amarta) 왕국을 세울 당시 비마세나, 즉 가똣까차의 아버지 손에 죽게 된다. 그리하여 쁘링간다니 왕국의 왕위는 그 비마세나와 혼인하게 되는 아림비 공주에게 돌아갔다. 말하자면 아림비 공주는 부왕을 죽인 원수와 혼인한 셈이다. 아무튼 그 왕위가 이제 성인이 된 그들의 아들, 즉 가똣까차에게 돌아가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아림비에게는 브라야덴타(Brajadenta), 브라야무스티(Brajamusti), 브라야라마단(Brajalamadan), 브라야위깔파(Brajawikalpa), 깔라븐다나(Kalabendana) 등 다섯 명의 동생이 있었다. 그들 중 브라야덴타는 쁘링간다니 왕국의 재상이 되어 까사뜨리안 글라가띠누누(Kasatrian Glagahtinunu)에 처소를 얻었다.
 
그때 하스티나 왕국의 상쿠니가 그를 찾아와 쁘링간다니 왕국의 왕위는 사실 가똣까차가 아니라 브라야덴타에게 돌아가야 한다고 속삭이며 반란을 부추겼다. 그러자 가똣까차가 왕위에 오른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에 브라야덴타가 반란을 일으켰다. 그의 동생 브라야무스티는 가똣까차의 편에 서서 브라야덴타와 맞섰고 두 거인은 전투 중 함께 동귀어진한다. 두 사람의 영혼은 가똣까차의 양손에 각각 흡수되어 가똣까차의 도력은 더욱 높아졌다.

이후 가똣까차는 둘째 삼촌인 브라야라마단을 재상으로 기용하고 빠티 쁘라바끼스와(Patih Prabakiswa)라는 칭호를 주었다.

마하바라타 버전 속 가똣까차의 죽음
 
▲쿠룩셔르타 전쟁에서 아버지를 지키기 위해 전차를 모는 가똣까차. 기타 프레스(Geeta Press)가 출간한 마하바라타 서사에 포함된 삽화,

가똣까차의 죽음은 마하바라타 제7권인 드로나파르와(Dronaparwa)의 가똣까차바다파르와(Ghattotkacabadhaparwa)에 나온다. 그는 쿠룩셔르타 전쟁 14일차에 죽는 것으로 묘사된다.

이 대전쟁은 빤다와 가문과 꼬라와 가문 사이의 골육상쟁이다. 거인 가똣까차는 밤이 되면 더욱 큰 힘을 발휘하는 특성을 지녔다. 꼬라와 가문의 자야드라타가 아르주나의 손에 죽었을 때 이미 황혼이 내리고 있었으므로 전투는 중단되었어야 했는데 가똣까차가 전장에서 야영지로 돌아가던 길에 꼬라와의 군대의 기습을 받았다. 하지만 가똣까차는 밤이 깊어 갈수록 더욱 가공할 힘을 발휘하는 체질을 타고 나 수많은 꼬라와 병사들이 그의 손에 목숨을 잃었다.

그러자 꼬라와군에서 알람부사(Alambusa)라는 거인이 나와 가똣까차를 대적했다. 알람부사는 가똣까차의 사촌 즉 아루주나의 아들인 이라완을 죽인 꼬라와군의 영웅이었으나 가똣까차와는 전혀 상대가 되지 않았다. 가똣까차는 알람부사를 맹렬히 공격해 마침내 죽인 후 거기서 끝내지 않고 그의 시신을 들어올려 땅바닥에 패대기치기를 수십 번, 시신이 완전히 박살 나 너덜거릴 때까지 계속했다. 꼬라와군 사령관 두르요다나도 그 처참한 모습에 가똣까차를 마주보기조차 두려워했다.

그래서 두르요다나는 카르나에게 나라다 신이 준 성유물 무기 바사비샥티(Vasavishakti – 와양 그림자극에서는 앞서 언급한 꼰따위자야, 또는 꼰타(Konta)라는 이름의 성유물. 칼집이 있었으니 아마도 도검류 무기였던 것으로 추정)를 사용해 거인 가똣까차와 싸우라고 내몰았다.

카르나는 단 한 번밖에 쓸 수 없는 그 성유물 무기를 아르주나를 죽이는 데에 사용하려 아끼고 있었으므로 처음엔 두르요다나의 명령을 거부했다. 그러나 가똣까차를 제거해야만 한다는 강박관념에 계속 밀어붙인 두르요다나의 강요에 떠밀린 카르나는 결국 성유물 무기를 가똣까차에게 던졌다. 그 무기를 피하지 못하고 죽게 될 것을 직감한 가똣까차는 단 번에 가장 많은 적군을 죽일 수 있는 방법을 떠올렸다. 그는 자신의 몸을 순식간에 수십 배로 부풀렸고 카르나가 던진 무기에 꿰뚫려 죽는 순간 무너지듯 쓰러지면서 자신의 몸으로 수천 명의 꼬라와군 병사들을 깔아 뭉갰다. 빤다와군은 가똣까차의 죽음에 큰 충격을 받았다.

그의 죽음에 미소를 짓는 것은 크리슈나 신뿐이었다. 카르나가 이미 성유물 무기를 사용해 버렸으므로 이제 꼬라와군에겐 아르쥬나를 죽일 방법이 더 이상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크리슈나에겐 아르주나만이 중요했다.
 
▲마하바라타 서사 속 가똣까차의 죽음. 마라나라야나다타 아스트리(Ramanarayanadatta Astri) 작품


자바 와양 그림자극 버젼
마하바라타 서사의 꾸룩셔르타 대전쟁은 자바 와양 그림자극에서는 바라타유다(Baratayuda) 전쟁이라고 일컬어진다. 이 이야기의 좀 더 발전된 형태가 까디리 왕국 시대인 1157년에 쓰여진 까까윈 바라타유다(Kakawin Bharatayuddha) 편에 나타난다.
 
여기서 가똣까차는 아르주나의 아들이자 자신과는 사촌인 아비마뉴와 아주 가까운 사이로 묘사된다. 아비마뉴는 우타리와 결혼하게 되는데 가똣까차의 막내삼촌인 깔라븐다나 (Kalabendana)가 찾아와 아비마뉴를 데리고 본가로 돌아가려 하다가 실패했다. 어머니 쪽 삼촌이 아버지 쪽 사촌 일에 지나치게 간여하며 선을 넘었다고 생각한 가똣까차는 크게 분개하여 깔라븐다나의 머리를 한 차례 때렸는데 힘조절에 실패해 본의 아니게 삼촌이 그 자리에서 즉사하고 말았다.

바라타유다 전쟁이 벌어진 후 그렇게 사랑했던 사촌 아비마뉴가 전쟁 13일차 되던 날 꼬라와군에게 처참하게 살해되자 14일차 되던 날 아르주나는 적장 두르요다나의 처남 자야드라타의 목을 베어 아들의 복수를 했다. 그러자 그날 밤 두르요다나는 카르나를 시켜 빤다와군 야영지를 급습하게 했다. 그것은 해가 지면 전투를 멈춘다는 암묵적인 전장의 룰을 어긴 작전이었다.

야간기습에 놀란 빤다와군은 가똣까차를 내보내 적군을 맞았다. 가똣까차를 선봉에 내보낸 이유는 그가 착용한 안트라쿠수마 가슴받이 갑옷이 빛을 발해 한밤중의 전장을 환하게 밝힐 수 있었기 때문이다. 가똣까차는 적장 름부사(Lembusa)를 처치하지만 같은 시간 그의 삼촌 브라야라마단과 브라야위깔파가 적장 름부수라와 름부사나에게 목숨을 잃었다.

가똣까차도 이제 성유물 무기 꼰타위자야를 가진 적장 카르나와 맞서 싸우며 위기를 맞았다. 가똣까차는 천 개의 자기 분신을 만들어 카르나를 혼란하게 만들었지만 바타라 수리야 신의 가호를 받은 카르나는 가똣까차의 본체를 포착하여 꼰타위자야를 던졌다. 가똣까차는 하늘 높이 날아올라 꼰따위자야를 피하려 했지만 어디선가 깔라븐다나 삼촌의 혼령이 나타나 꼰따위자야 창을 붙잡고 가똣까차를 뒤쫓으며 가똣까차의 목숨이 그날 밤으로 끝날 것이란 까향안의 결정을 전했다. 그 운명을 피할 수 없을 것이라 직감한 가똣까차는 자신의 시신으로 더 많은 적군을 죽일 수 있게 해달라고 요구했고 깔라분다나는 이를 수락하면서 가똣까차의 탯줄을 끊었던 그 칼집의 칼로 가똣까차의 배꼽을 깊숙이 찔렀다. 가똣까차의 뱃속에서 그 칼은 이미 그의 몸속에 흡수되어 녹아든 칼집과 마찬가지로 흡수되었지만 동시의 가똣까차의 목숨을 빼앗았다.

가똣까차의 숨이 끊어지자 깔라븐다나의 혼령은 가똣까차의 시신을 카르나에게 힘껏 내던졌다. 카르나는 급히 몸을 날려 피했으나 가똣까차의 시신와 충돌한 그의 전차가 박살나면서 그 파편이 사방으로 튀어 그 근처에 있던 꼬라와 군을 전멸시켰다.
 
▲쿠룩셰르타 전투에서 카르나에게 쇄도하는 가똣까차
 

현대문화 속의 가똣까차
가똣까차는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인도네시아 대중문화 속에서 매우 사랑받는 캐릭터이고 까까윈 바라타유다부터 음뿌 스다(Empu Sedah), 음뿌 빠눌루(Empu Panuluh)에 이르기까지 자바와 발리에서 독자적인 스토리 전개를 보이기도 했다.

자바 그림자극에서는 ‘철사 힘줄과 무쇠 근육의 기사’라는 이미지의 수퍼히어로로 그려졌다. 발리에서 가똣까차는 신으로 여겨져 많은 그림과 석상들이 만들어졌는데 꾸타 거리 중앙통에도 ‘빠뚱 사뜨리아 가똣까차’란 이름의 동상이 서있다.
▲발리 꾸타 거리의 가똣까차 동상 (Patung Satria Gatotkaca)

가똣까차는 음악, 연극, 만화, 영화에도 자주 등장했다.

2022년 6월 개봉된 영화 <사트리아 데와: 가똣까차(Satria Dewa: Gatotkaca)>는 사트리아 데와 유니버스의 첫 번째 영화다. 가똣까차는 모바일 게임 ‘모바일 레전드: 뱅뱅(Mobile Legends: Bang Bang)에도 등장하며 SCTV에서는 2005년 8월 21일부터 11월 13일까지 13개 드라마 에피소드로 방영했다. MD 엔터테인먼트에서 제작했다. 2010년 3월에도 루나 자야 필름스와 MNC 픽쳐스에서 제작한 연속극이 MNC TV에서 방영되었고 2017년 4월에도 루나 자야 필름스, 베로니카 픽쳐스, ANTV 픽쳐스에서 제작한 또 다른 가똣까챠 드라마가 ANTV를 통해 방영되었다.
 
▲콧수염을 강조한 가똣까차의 헬멧. 정말 깬다.
 
 
*배동선 작가
- 2019년 소설 '막스 하벨라르' 공동 번역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Copyright © PT. Inko Sinar Media.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