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기고란 2021년 작품상 수상 <복사기(Penyalin Cahaya)>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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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작품상 수상 <복사기(Penyalin Cahaya)> 리뷰
배동선 작가
원제 <Penyalin
Cahaya>, 영문 제목은 <photocopier>, 그래서 한국엔 <복사기>라는 제목으로 소개된 인도네시아 영화가 2021년 인도네시아 영화제(FFI 2021)에서 작품상을 비롯해
감독상, 남우주연상, 남우조연상, 각본상, 영상상, 촬영상, 음향상, 음악상, 주제가상, 의상상 등 12개 부문12개
부문을 석권할 때 현지 영화계에서도 ‘이게 도대체 뭐야?’ 라고
생각한 이들이 적지 않았을 것 같다.
이 영화가 비록 2021년 10월 8일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처음 소개되어 2021년 영화로 분류되었지만
실제로 대중에게 공개된 것은 2022년 1월 13일이었으므로 사실은 2022년 영화여야 한다. 그랬다면 2022년 인도네시아 영화제를 휩쓴 <예전, 지금 그리고 그때(Before,
Now & Then (Nana)>, <그리움은 복수처럼 반드시 되갚는 것(Seperti
Dendam, Rindui Harus Dibayar Tuntas)> 같은 쟁쟁한 예술영화들과 경쟁해야 했을 것이며 수상부문은
크게 줄었을 것이다.
더욱이 이 영화로 인해 아직도 코로나 팬데믹이 창궐하던 2021년 힘겨운 제작과정을 거쳐
세상에 나온 다른 영화들의 수상기회 상당히 제한되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2021년에 워낙 좋은 영화들이 미미했으므로 오죽하면 2022년 영화를
가불해 가져와 2021년도 상들을 몰아주었을까 싶기도 하다. 아무튼
영화제에 참석한 영화인들 태반이 본 적도 없는 영화가 그해 시상식을 압도했다.
또 하나의 논점은 이 영화가 극장 개봉용이 아니라 넷플릭스 오리지널 작품이어서 OTT에서만
서비스되었다는 점이다. 이 역시 코로나 팬데믹 시대에만 벌어질 수 있었던 진풍경으로 여겨졌지만 2022년 작품상을 받은 <예전, 지금 그리고 그때> 역시 프라임비디오 오리지널 작품이었음을
상기하면 인도네시아 영화제는 2021년을 기점으로 어떤 질적인 변화가 일어난 것이라 생각해 볼 수 있다.
실제로 <복사기> 영화를 보면 시나리오나
각색, 연출 등 많은 부분에서 충분히 상을 받을 만한 작품임을 공감할 수 있다. 인물들이 입체적이고 개성이 뚜렷하며 스토리 전개도 박진감과 팽팽한 긴장감이 대단하다.
단지 캠퍼스 복사가게를 지키는 아민(Amin) 역의 치코 꾸르니아완(Chicco Kurniawan)이 남우주연상을 받은 것만은 납득하기 어렵다. 그를
이 영화의 남자주인공이라고 보기도 어렵고 그보다 좋은 연기를 보인 따릭(Tariq) 역의 제롬 꾸르니아(Jerome Kurnia), 라마(Rama) 역의 기울리오 빠렝꾸안(Giulio Parengkuan) 같은 배우들이 있기 때문이다.
1992년생 우레가스 바누테자 감독은 <쁘렌작(Prenjak)>, <옷장(Lemantun)>, <이 도시에 미친 놈은 없다(Tak Ada yang Gila di Kota Ini)>같은 흥미로운 단편영화들을 찍은 유능한 감독이고 <복사기>는 그의 첫 장편영화 데뷔작인데 제대로 대형사고를 치며 인도네시아 영화계에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이 영화는 세니나 샤왈리타 시나몬(Shenina Syawalita Cinnammon)이 분한 여주인공 수리야니가 무대공연 동아리 파티에서 만취한 상태에서 찍어 SNS에 올린 사진 때문에 학생 품위유지에 대한 윤리규정을 어겼다는 이유로 장학금 혜택을 박탈당하면서 시작된다.
그녀가 자신이 함정에 빠졌음을 증명하기 위해
오랜 친구이자 교내 복사집을 운영하는 아민(치코 꾸르니아완)의
도움을 받아 동아리 친구들의 핸드폰과 랩톱을 해킹해 증거자료들을 수집한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동아리는 물론 교내에서 동료학생에게 약물이 든 음료를 줘 정신을 잃게 한 후 나체 사진을 찍거나 성추행을 한 범죄사실을
밝혀내지만 마땅히 피해학생들을 도와야 할 학교당국은 오히려 피해자들을 궁지로 내몰고 돈과 권력에 위협을 받은 피해자가 오히려 공개사과해야 하는
상황에 처한다. 천신만고 끝에 모든 상황을 뒤집을 강력한 증거를 확보하지만 힘을 등에 업은 가해자는
더욱 피해자들을 가혹하게 압박한다.
대략 이렇게 전개되는 <복사기>는
지성의 전당이라 하는 대학교에서 벌어지는 금권의 횡포, 여성과 힘없는 이들이 당하는 성폭력과 착취, 몸부림칠수록 더욱 수렁으로 빠져드는 힘없는 군상들, 그리고 집안에서는
군림하지만 사회의 금권에 너무 쉽게 무릎 꿇으면서 가족들에게도 항복을 강요하는 가부장적 사회 속 우리들의 아버지,
그럼에도 끝까지 노력하고 저항하는 몇몇 사람들이 결과적으로 변화를 이끌어내는 모습을 유려한 시나리오 속에 담았다.
중견 배우들의 연기도 눈에 띈다. 특히 여주인공을 도울 듯 말하며 증거를 모아오라 시키고
나중에 가해자에게 피해자들을 팔아먹는 전산학과 교수 룩만 로사디(Rukman)는 많은 영화에서 중요한
조연으로 나왔는데 최근 리뷰한 영화들 중에선 공포영화 <이낭>의
친철한 산토소 부부 중 이중인격 킬러 성향의 아구스 산토소를 연기하기도 했다. 뭔가 깊은 심계를 가진
듯한 표정연기가 일품이다.
영화에서는 넷카(Netcar)라고 불리는 그랩 같은 온라인택시 기사 부르하누딘을 분한 란둥
시마뚜빵(Landung Simatupang)의 연기도 대단하다고 느낀 것은 그가 출연하는 불과 몇 개의
장면들 중 처음 차량 차고에서 수리야니가 문제의 사진을 찍히던 사건 당일의 알리바이를 말하던 부분에는 영락없이 정말 아무 문제없는 친절한 고령의
운전기사처럼 보였는데 그가 사건에 연루된 정황이 깊어지는 후반부에선 점점 음침한 표정을 유감없이 보여주며 영화의 분위기를 이끌었다. 1951년생인 란둥은 1998년에 영화배우로 데뷔해 여러 영화에
조연과 단역으로 참여했다.
가장 의외의 캐스팅은 라마의 아버지이자 부유하고 통 큰 예술가로 나오는 야얀 루히안(Yayan
Ruhian)이다. 그는 인도네시아에서 제작된 거의 모든 무술액션영화에 등장하다가 심지어 <존윅 3>에도 출연한 액션 전문배우다. 그렇다고 정극을 못할 리 없지만 그가 이 영화에 등장하면서 심한 인지부조화를 느꼈다. 그것도 감독이 의도했던 것일까?
이 영화의 강점은 서사의 흐름이 유려하다는 건데 결국 시나리오가 탄탄하다는 얘기다. 막판에 가해자가 연막을 뿌리며 나타나 피해자들이 어렵게 찾아낸 증거를 말살하는 장면은 스토리 전개상 좀 과하다 싶지만 돈과 권력이 서민들에게 어떻게 작용하는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다는 측면에서 나쁜 연출은 아니었다.
좋은 영화란 모든 부분들이 실력으로나 운빨로나 손발이 착착 맞았기 때문에 만들어지는 것인데 특히 배우들의 연기도 자연스럽고 실감났다. 무엇보다도, 두말할 나위 없는 부분이지만 서사 전반을 끌어가는 여주인공 세니나의 연기력이 빛났다. 1999년생 어린 여배우였고 내가 이 친구를 처음 본 것은 2019년작 <흑마술의 여왕(Ratu Ilmu Hitam)>에서 복수심에 불타는 여성 주술사의 딸로 나온 것이었다. <복사기>는 그로부터 불과 2년 후의 작품인데 그 사이 이 여배우가 이룬 성장이 느껴지는 작품이었다.
내 점수는 85점.
한번 찾아볼 것을 권할 만하다.
*배동선 작가
- 2018년 ’수카르노와 인도네시아 현대사’ 저자
- 2019년 소설 '막스 하벨라르' 공동 번역
- 2022년 '판데르베익호의 침몰'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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