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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기고란 수카르노 반역혐의 폐기와 명예회복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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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18,380회 작성일 2022-11-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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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카르노 반역혐의 폐기와 명예회복의 의미
 
배동선 작가
 
11월 7일(월)쯤부터 조코 위도도 대통령이 수카르노 초대대통령이 공산당 인사들을 옹호했다는 혐의를 벗었음을 재확인했다는 기사들이 여러 매체의 지면을 채웠습니다.

기사 내용을 간략하게 요약하자면 이렇습니다.

조코 위도도 대통령은 임시국민자문의회(MPRS)의 1967년 결정문 폐기를 재확인했다. 해당 결정문에는 인도네시아 공화국 초대대통령 수카르노가 G30S, 또는 9.30 사태라고 부르는 1965년 공산당 쿠데타 당시 공산당 측 인물들을 비호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즉 수카르노가 국가 반역행위에 가담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해당 결정문은 그로부터 36년 후 Tap MPR Nomor I/MPR/2003, 즉 2003년 국민자문의회의의 또 다른 결정문에 의해 폐기되었다. 조코위 대통령은 이 사실을 재확인한 것이다.

인도네시아 정부는 1986년 수카르노를 ‘선언영웅(pahlawan proklamator)으로 추대했고 2012년에는 국가영웅 반열에 올렸다. ‘국가영웅으로 추대되었다는 것은 국가반역행위를 하지 않았다는 기본 조건을 충족시켰다는 의미’라고 조코위 대통령이 강조했다.


인도네시아 역사, 특히 현대사에 관심없는 사람들에게는 도무지 뭔 얘기인지 모를 이 기사가 사실 상당한 역사적 배경에 대한 설명을 필요로 합니다. 그러니 이 글을 몇 명이나 읽을지 나중에 조회수를 살펴보면 인도네시아 문화와 역사에 대해 글을 쓰는 전업작가로서의 내 생계와 미래도 대충 점쳐볼 수 있겠습니다ㅠ

1965년 10월 1일 새벽에 벌어졌지만 그 하루 전날 날짜인 ‘9.30 사태’로 알려진 유혈사태는 수카르노의 친위쿠데타 또는 공산당 쿠데타로 알려져 있습니다.
 
공산당 세력이 군부 내의 반공 장성들을 축출할 목적으로 시작된 이 사건은 수하르토 당시 육군전략사령관 주도로 불과 며칠 만에 진압되었습니다. 하지만 루방부아야에서 참혹하게 살해되어 유기된 장성들 시신이 속속 수습되면서 폭발한 국민적 분노가 1965-1966년 기간 동안 벌어진 이른바 ‘인도네시아 대학살’이란 결과를 낳습니다.
 
전국적으로 잔혹한 공산당 사냥이 벌어져 당시 인도네시아 공산당(PKI) 당원과 지지자들은 물론 중국공산당이 배후에 있다는 소문에 따라 화교들이 대거 학살당하는 사태가 벌어진 겁니다. 이때 공산당과 아무런 관계없는 이들도 개인적인 감정, 즉 시기, 질투, 원한, 채무 때문에 공산당으로 몰렸는데 이때 죽은 이들이 최소 50만 명에서 최대 300만 명으로 추산됩니다.

9.30 사태가 공산당 친위쿠데타라고 알려진 것은 쿠데타 당일 아침 수카르노 대통령이 하필 쿠데타 진영 본진이라 할 수 있는 할림 공군기지에 들어가 정책지시를 내리고 있었다는 점, 마침 같은 시기에 공산당(PKI) 당수 DN 아이딧도 그곳에 있었다는 점, 밤 사이 습격받아 살해되거나 납치된 장성들은 당시 벌어지고 있던 말레이시아의 전쟁, 즉 인도네시아 군내 공산당 성향의 군인들이 주축이 되어 영연방군과 교전을 벌인 말레이시아 대결정책에서 전쟁수행에 소극적이던 육군사령부 핵심인물들이었던 점, 쿠데타군 지휘부에 말레이시아와의 전쟁을 진두지휘하던 수빠르죠 준장이 있었다는 점, 쿠데타 당일 납치살해사건에 동원된 주축부대가 짜크라비라와 대통령 경호부대였다는 점 등을 기반해 추론하고 재구성하여 내려진 결론입니다.

특히 쿠데타 직전 수카르노 대통령은 육해공-경찰군 외에 북한 노농적위대 성격의 ‘농민군’을 제5의 군대로 신설하려던 참이었고 중국에는 농민군을 무장시킬 개인화기도 주문해 놓은 상태였어요. 공산당이 당시 우연히 연루된 희생자라는 일각의 주장도 있지만 9.30 사태가 공산당이 주도한 쿠데타였음을 가리키는 증거와 증언들이 대체로 공고한 편입니다.

사실 이 9.30 쿠데타가 공산당, 군(민족주의), 이슬람(종교)으로 이루어지는 당시 나사콤 체제의 세 개 축 중 공산당이 군을 공격해 판을 흔들려 했던 사건인지, 정말 수카르노의 종신대통령 지위를 지키려한 친위 쿠데타인지, 말레이시아 대결정책에 소극적인 군수뇌부를 갈아 엎으려 한 수빠르죠 준장 중심 열혈 소장파들의 하극상이었는지 그 성격에 대한 의견은 아직도 계속 제기되고 있습니다.
 
▲군사법정에 출두한 9.30 쿠데타 주역 수빠르죠 준장
 
특히 과연 수카르노가 정말 쿠데타군 측에 힘을 실었느냐가 초유의 관심사였습니다. 실제로 당시 상황은 명색이 쿠데타 진압군인 수하르토 육군전략사령관에겐 매우 곤혹스러웠습니다. 대통령이 쿠데타군 진영에 있었으니 그곳에 처들어가는 순간 자신이 오히려 반란군으로 몰릴 판이었으니까요.
 
하지만 수하르토 측의 최후통첩을 받고 10월 1일 밤 수카르노 일행을 태운 차량이 할림을 빠져나가 보고르궁으로 향하자 전세는 드라마틱하게 뒤집혔고 쿠데타군은 제대로된 항거도 하지 못한 채 단번에 몰락해 버립니다.

그렇다고 수카르노가 이후 곧바로 실각한 것은 아닙니다. 실권을 잡은 수하르토의 군부가 그후 약 1년 반 동안 수카르노의 권력을 하나 둘 빼앗는데 노회한 수카르노가 갖은 수단을 동원해 자신의 자리를 지키려 했지만 9.30 사태 이후 실추된 그의 지지율이 전혀 회복되지 않았고 그의 숨통을 거머쥔 수하르토의 그립이 완강했습니다. 그리고 터진 마지막 결정타가 1967년 3월 Tap MPRS Nomor XXXIII/MPRS/1967 번호의 임시국민자문의회(MPRS) 탄핵 결정문이었어요..

1. 9월 30일 쿠데타를 방조하고 PKI공산당의 국제공산주의 의제를 지지함으로서 헌법을 위반함.
2. 경제문제를 도외시함.
3. 무분별한 여성 편력으로 국가적 ‘도덕성 타락’을 야기함.

해당 결정문은 이런 내용을 담고 있었습니다. 수카르노는 1959년 7월 이후 종신대통령의 지위에 올라 있었지만 이 결정문과 함께 속절없이 대통령궁에서 쫓겨났고 이후 제대로 지병을 치료받지 못해 1970년 6월 세상을 떠날 때까지 처참하고 혹독한 가택유폐를 당하게 됩니다.

국민자문의회(MPR)는 상원격 또는 통일주체국민회의 비슷한 권위주의시대 유산으로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그 MPR 맞습니다. 거기 S(Sementara-임시)가 붙은 것은 MPR가 당시 임시회기를 열어 해당 의제를 의결 처리했다는 뜻이죠.

탄핵 결정문 1항의 ‘9월 30일 쿠데타를 방조하고 PKI공산당의 국제공산주의 의제를 지지함으로써~’ 부분은 수카르노가 국가 이익에 반하는 ‘반역행위’를 했음을 시사하는 대목입니다.
 
백수십 명의 역사적 인물들이 국가영웅으로 지정된 지 한참 지난 2012년에야 수카르노가 비로소 국가영웅으로 지정된 것도 바로 그 ‘반역행위’ 부분 때문입니다. 국가영웅으로 지정되려면 민족반역행위 전력이 없어야 합니다.
 
▲1967년 3월 12일 임시국민자문의회(PRS)를 통해 대통령 직무대행으로 취임하는 수하르토 장군
 

위의 1967년 3월의 MPRS 결정문, 즉 탄핵결정문을 국민자문의회의(MPR)가 2003년에 공식 폐기했는데도 국가영웅 지정까지 10년이 더 걸린 것은 2003년 당시 대통령이 바로 수카르노의 장녀 메가와티 수카르노뿌트리였기 때문입니다.
 
자기 아버지는 반역행위를 한 적이 없다고 강변하며 딸 메가와티가 현직 대통령으로서 어떤 식으로든 해당 탄핵 결정문 페기 결정에 영향력을 행사했을 거란 추론을 가능케 하는 대목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수카르노에 대한 향수가 전국적으로 일고 있었다 해도 딸이 현직 대통령이던 시절 아버지를 복권시켜 명예회복을 도모한 것에 대해 국민적, 국가적 납득을 얻는 것에 그만한 시간이 더 걸렸던 것입니다.

1986년 수카르노가 모하마드 하타 전 부통령과 함께 ‘선언영웅‘ 칭호를 받은 것은 상대적으로 쉬운 일이었습니다. 그것은 그 두 사람이 독립선언서 초안을 함께 만들고 1945년 8월 17일 낭독행사를 함께 했던, 반박할 수 없는 분명한 역사적 사건을 기념하는 것이었으니까요.

‘조코위 대통령이 수카르노의 공산당 비호 사실을 부인한 2003년 MPR 결정문을 재차 확인했다’는 간단한 문장 속에는 이런 역사와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럼 왜 하필이면 그런 얘기가 2022년 11월 7일 시점에 나온 것일까 생각해 봅니다.

물론 11월 10일 국가영웅의 날을 앞두고 나올 만한 이야기임엔 분명하지만 수많은 국가영웅들을 놔두고 수카르노를, 그것도 수많은 에피소드 중에서도 이미 오래 전에 완결된 수카르노의 반역 사실 폐기 문제를 부각한 것은 왜 그런 걸까요?
 
어쩌면 2024 대선을 앞두고 투쟁민주당 대선후보 선발에 대한 담론이 진행되는 가운데 수카르노의 손녀 뿌안 마하라니 국회의장을 띄우는 과정에서 그녀가 아무런 하자 없는 ‘국가영웅’ 가문이라는 것을 강조하려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여담이지만 메가와티 수카르노뿌트리가 받은 10개의 훈장 중 두 개는 부통령 시절인 2001년 2월, 일곱 개는 와히드 대통령이 탄핵되어 막 대통령직을 승계한 바로 다음 달인 2001년 8월에 받았다는 기록에 주목합니다.
 
국가 훈포장 대상을 정하는 부처가 분명 따로 있겠지만 그 최종 결정권이 대통령에게 있는 만큼 대통령이 되자마자 스스로에게 훈장 일곱 개를 몰아준 점에서 그녀의 일처리 방식을 대충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 그녀가 자신의 대통령 임기 중 기어이 수카르노의 반역 혐의를 MPR 결정문을 통해 벗긴 것이 그리 놀랍지 않습니다.

오히려 역사적 사실이나 의혹을 의회 결정문을 통해 결정하거나 폐기한다는 사실이 꽤 놀랍습니다. 역사를 의회가 그런 식으로 결정한다면 인도네시아 역사학자들은 도대체 무슨 일을 해서 먹고 사는 걸까 하는 생각도 불현듯 들었습니다. (끝)
 
▲메가와티 수카르토뿌트리 서훈 기록(출처: 위키페디아)
 
 
*배동선 작가
- 2019년 소설 '막스 하벨라르' 공동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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