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기고란 영화 <하얼빈> 리뷰
페이지 정보
본문
영화 <하얼빈> 리뷰
배동선
2025년 1월 2일(목) 모이 플릭스 영화관에서
<하얼빈>을 봤다.
평일 4만 루피아. 환산하면 약 3,500원. 본국 영화제작사에 살짝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암살>, <밀정> 같은
식민지시대 독립투사들의 영화를 볼 때마다 새삼 느끼는 것은 독립운동은 보통의 사람들이 웬만한 결기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란 것이다. 평시라면 어쩌면 표시도 나지 않았던 그들의 큰 마음과 인성, 포용력, 거대한 용기, 꺾이지 않는 마음 같은 것이 가장 극악한 환경 속에서
가장 아름답고 숭고하게 펼쳐졌다.
잘린 한 마디의 손가락, 이토 히로부미 척결, 사형수로서
감옥에서 지내던 기간 동안 결코 변치 않던 애국심과 결기, 그런 단편적인 것으로만 알고 있던 안중근
의사를 보다 입체적으로 만날 수 있었던 <하얼빈>은
일부 평론가들이 지적하는 몇 가지 단점들에도 불구하고 충분히 재미있었고 의미 깊었다.
방생과 용서
쟁쟁한 평론가들이 다들 이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했으니 난 좀 다른 측면을 말하고 싶다.
방생이란 붙잡은 생명을 놓아주는 것이다. 놓아주는 생명체가 무엇을 했는지 또는 안했는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그게 동물일 수도, 인간일 수도 있다.
용서란 용서의 대상이 뭔가 했거나 하지 않은 것 자체, 또는 그 결과와 파국을 내가 감수하는
것이다. 사로잡은 적군의 팔을 하나 자르고 풀어주거나 사형받아 마땅한 자를 무기징역으로 감형하는 것은
용서라 하기 어렵다. 내가 조금 봐주겠지만 네 죄값을 받으라 하는 식의 감형은 용서가 아니라 딜이거나
판결이다. 진정한 용서란 필연적으로 방생을 포함한다.
<하얼빈> 영화 속에서 안중근은 두 번의 용서를 한다. 그리고 용서란 용서받는 자를 결코 개과천선시키지 못한다는 것을 웅변적으로 보여준다. 그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용서란 용서하는 사람에게 벌어지는 마음의 움직임이다. 그것은 그에게만 작용하여 상대방을 방생하는 결과적 행동으로 이어진다. 그러니 용서받는 사람 입장에서는 아무런 마음의 움직임도 전제되지 않은 상태에서 몸의 구속이 풀리는 셈이다.
그래서 호랑이를 풀어주면 그 호랑이는 호랑이의 삶을 계속 살아가게 되고 토끼를 풀어주면 토끼로 살아가게 된다. 그들이 무슨 잘못을 하였든 용서해준다고 해서 호랑이가 순한 양이 되고 토끼가 용맹스러운 멧돼지가 되는 게 아니란
것이다.
그래서 영화 속 모리 다쓰오 소좌는 용서받고 방생된 후에도 모리 다쓰오로 살아가게 되고 진정으로 용서받은 김상현도 본래의 김상현의
삶을 살게 된다.
그런 걸 많이 보지 않았던가? 가장 대표적인 일로, 김대중이
전두환을 용서해 주었더니 그가 개과천선하던가? 그냥 전두환으로 살다 죽었을 뿐이다. 그 용서의 결심으로 위대해진 것은 김대중일 뿐이고 그의 용서가 전두환을 전혀 회개 시키지 못했다.
용서란, 그 파국으로 벌어지는 일을 용서한 자가 전적으로 책임지고 감수해야 하는 것이다.
▲서슬 퍼렇던 시절 전두환
<하얼빈>에서도 잘못된 용서로 인해 독립군은 돌이킬 수 없는 파국을 몇 번이나
맞는다.
그래서 용서란 결국 용서하는 개인 또는 그에 합의한 단체만이 오롯이 스스로 그 파국을 감당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 파국이 자기 이외의 다른 사람에 미친다면 그것은 용서가 아니고 월권이 된다.
대인배 김대중 대통령은 전두환을 사면하여 그의 위대함과 숭고함을 더했지만 그로 인해 광주를 비롯한 수많은 개인들과 단체들이 결과적으로
모욕당하고 고통받고 명예를 회복하지 못했다. 아직도 북한 개입설이나 광수 같은 단어들을 입에 담는 이들이
나오는 것도 엄밀히 따지고 보면 다 그 사면 때문이다. 그보다 더한 짓을 했던 전두환도 용서받았으니
겁날 게 없는 것이다.
그러니 가시밭길을 마다치 않던 사람들이 어느 시점에, 얘기치 않은 대목에서 쉽게 변절하기도
한다. 그 중엔 김상현처럼 초심으로 돌아오는 이들도 있을 것이나 대부분은 돌아오지 못했다. 이름만 대면 알만한, 과거 학생운동, 민주화운동, 노조운동에 열을 올리며 이름을 떨쳤던 이들 중에 얼마나
많은 이들이 변절해 내란의 당에 또아리를 틀고 썪어가며 악취를 풍기고 있는지 우린 역사를 통해, 최근엔
지난 비상계엄 후 몇 주간을 지내면서 실시간으로 보고 있는 중이다.
‘용서’는 그것이 숭고할수록 더욱 깊고 어두운 그림자를 품는다.
모리 다쓰오처럼.
전두환처럼.
좋은 영화?
영화 리뷰를 전두환으로 도배할 수는 없지만 1980년대를 살았던 사람에게 5공의 그림자는 짙은 군화발처럼 남았다.
1986년 소위 계급을 달고 임관할 당시 빠른 군번과 함께 육군참모총장상을 받았다. 당시
육군참모총장은 박희도 장군. 12.12 사태 당시 1공수
여단장으로 전두환 편에 섰던 반란 주역이었다. 그 상이 그땐 그리도 자랑스러웠다.
자대에 가보니 당시 전두환 대통령 사진이 붙어 있었다. 1987년 또 다른 반란 주역 노태우가
대통령이 되면서 멸공관 입구 대통령 사진을 바꾸려고 전두환 사진을 내리는데 인근 부대 하사관들, 특히
백발 성성한 상사들이 달려와 우리 장군님 사진을 떼면 안된다고 난리를 죽였다. 대통령이 바뀌었으니 사진을
바꾸는 건 당연한 일이었는데 말이다. 어쩌면 그들이 오늘날 태극기 부대의 원조쯤 될 것 같다.
난 1980년대에 군생활 한 것이 부끄럽거나 치욕적이라 생각하진 않는다. 그렇다고 1980년 광주에서 시민군에게 총을 쏴대진 않았지만 1980년대에 그 반란 주역들 밑에서 군생활을 그것도 장교로 한 것에 대해 마냥 자랑스럽지만은 않다. 부역하지 않았으나 반항하지도 않았다. 그냥 그 시절을 살아냈을 뿐이다.
그래서 난 양칠성을 폄하하고 싶지 않고 이번 12.3 사태 속 국회를 침탈한 707특임대 장사병들을 욕하고 싶지도 않다. 다 같은 입장이었을 것이란
생각이 들어서다.
그래서, 난 직접적 피해자가 아니므로 용서할 입장에 있지도 않다. 용서할 사람들은 따로 있다.
그리고 결국은 그들의 대표, 즉
정치적으로 선출된 사람에게 용서의 권리가 위임될 것이다. 그간 역대 대통령들이 사면을 남발했던 것처럼
올해 선출될 대통령도 내란 수괴를 사면하려 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하얼빈>은 더욱 깊은 울림을
준다.
용서를 받은 모리 다쓰오가 모리 다쓰오답게 살았고 전두환이 전두환스럽게 살았던 것처럼 이번 내란 수괴도 용서를 받으면 아무런 죄책감도
없이 계속 내란 수괴답게 살 것이다. 그는 김상현이 아니다. 그런
재목이 못된다.
용서의 파국을 다른 사람들이 감당해야 한다면 용서해서는 안된다. 그 파국을 전국민이 겪어야
하는 것이라면 더더욱 부당하다. 그런 용서는 숭고한 게 아니다.
이 영화, 공감 포인트가 좀 이상했을까?
*배동선 작가
- 2018년 ’수카르노와 인도네시아 현대사’ 저자
- 2019년 소설 '막스 하벨라르' 공동 번역
- 2022년 '판데르베익호의 침몰' 번역
- 이전글<섀도우의 13 (The Shadow Strays)> 후기 25.01.13
- 다음글인도네시아 독립전쟁에 참전한 한국인들을 연구한 인도네시아 역사단체 Historika Indonesia 이야기 24.12.31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