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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회 <인도네시아 이야기>일반부 최우수상 /아직도 나는 배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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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탐방기 작성자 편집부 작성일 2021-10-27 17:00 조회 19,187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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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회 <인도네시아 이야기>일반부 최우수상 재인도네시아한인회장상
 
아직도 나는 배우고 있다
(Karangan)Saya Masih Belajar
 
오선희(주부, 발리)
 
 
88 올림픽 지날 즈음 우리 가족은 남편의 의류수출 사업을 위해 고향을 떠나 인도네시아 자카르타로 보금자리를 옮겼다. 거의 3년이 지났을 때 유럽인들의 취향에 맞는 옷을 수출하기 위해 발리로 사업장을 옮기게 되었다. 바다와 햇볕을 무척이나 좋아했던 남편은 발리 동쪽 사누르 해변부근에 청기와가 예쁘던 아늑한 집을 마련했다. 그이는 발리가 지상 낙원인양 행복해했고 우리는 이곳에서 여생을 함께 보내기로 약속했다. 아들과 우리 세 가족은 즐겁고 여유로운 삶에 만족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발리 정착 10여 년, 남편은 간경화증으로 몇 년을 고생하다 나와의 약속을 저버리고, 사랑만 받고 살아온 나와 아들을 낯설은 이 땅에 두고 59세의 아직은 이별이 이른 나이에 하늘나라로 떠났다. 벌써 14년이 지난 일이다. 아들은 이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지금은 가정을 이루고 손자도 안겨 주었고 사업도 든든히 일구어 안정된 가장 역할을 잘 감당하며 살아가고 있다.
 
나는 선택의 여지없이 발리에 남게 됐지만 이곳에서의 생활에 적응도 잘하고 만족하며 감사한 마음으로 살고 있다. 푸른 바다, 계절 없는 초록의 나무들과 형형색색의 꽃들이 주는 풍요로움이 있고 정다운 친구들이 많이 있기에 좋다. 또한 매년 시시때때로 한국에서 방문하는 가족들과 친지들을 맞이하는 기쁨도 있기에 즐겁다. 이제는 발리아줌마, 발리동생 그리고 발리할머니로 불리며 살아가고 있다.

 남편이 있을 때부터 우리 집 일을 돕는 마음이 곱고 성실한 발리인 도우미가 있었는데, 밤마다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는 모습을 보았다. 시일이 제법 지난 후 조심스레 물었더니 고향집에 있는 어린 여동생이 그의 나이 한살이 막 지나면서부터 12년이 지난 그때까지 피부병을 앓고 있었는데, 그 정도가 심하므로 동생을 본 사람들은 땅에 침을 뱉기도 하고 두려워하며 피하기에 어린 동생은 줄곧 집에서만 지낸다고 했다. 아주 몹쓸 피부병에 걸린 동생을 늘 생각하며 언니는 눈물을 흘리며 불쌍히 여기고 있었다. 그 얘기를 들은 날 밤 그 동생이 나의 꿈에 나타났다. 참으로 역겨운 모습이었다. 온 몸이 울퉁불퉁한 종기로 가득하여 흡사 괴물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 아이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나는 괴물 같은 그 아이에게서 도망치다 넘어지며 놀라 잠에서 깼다.

 다음날 아침, 나는 도우미에게 고향집에 있는 동생을 보러 가자고 했다. 나는 내가 왜 그 아이를 만나고 싶어 하는지 그 이유도 모른 채 시골로 향하고 있었다. 우리는 시골에 도착하여 그의 가족과 여동생을 만났는데 놀랍게도 그 아이는 내가 꿈에서 본 그 아이와 거의 동일한 모습이었다. 다만 꿈에서는 보지도 느끼지도 못했던 온 몸에 흐르고 있는 피고름에서 나는 썩은 냄새가 진동했다. 냄새의 놀램을 감추려는 나에게 그 아이는 내가 세상에서 여태 보지 못했던 아주 부끄럽고 수줍은 미소를 지으며 나에게 손을 내밀며 인사를 건넸다. 미소를 지을 때 마다 얼굴의 수많은 종기는 모두 일그러져 그야말로 괴물의 형상과도 같았다. 나는 이미 그 아이를 꿈에서 보았기에 두려움 없이 그 아이의 손을 잡고 울퉁불퉁한 머리를 쓰다듬고 있었지만 내 마음 구석구석에는 도무지 잘 표현할 수 없는 참담함과 함께 밀려드는 왠지 모를 미안함과 안타까움으로 가득했다.
 
그의 아버지는 DUKUN (점쟁이 무당) 인데 동네의 병자들을 주술이나 약초, 기름, 이상한 동물의 뼈 같은 기구들을 사용해 환자들을 치료하며 생계를 이어 가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정작 자신의 아이는 고칠 수 없다고 했다. 주술인 아버지의 혼탁하고 오묘한 모습이 그 아이를 더욱 불쌍하게 만드는 것 같았다.

우연히 아이의 눈 속을 가만히 바라보니 그 안에 아름다움이 있었다. 맑은 영혼을 가진 눈이었다. 비록 몸은 엉망이지만 맑은 눈을 가진 그 아이를 나는 도와주고 싶었다. 무슨 용기에서 인지 남편의 허락도 없이 나는 그 아이를 집에 데려오고자 아이 부모의 허락을 받아냈고 함께 집으로 돌아온 우리를 묵묵히 맞이하는 남편과 아들에게서 안도와 감사를 느꼈다.
 
다음날부터 우리는 발리에서 가장 큰 국립병원 피부과를 찾아가 담당 의사를 만났다. 하지만 이 아이는 이미 수 차례 내원했던 기록이 있었고 피부과의 모든 의사가 알고 있던 유명한 환자였다.
그날 만난 담당의사는 내게 아이가 앓고 있는 병명이 ‘몰로스컴’ 이라 했고 그 당시엔 치료약이 없어 수술로만 가능한 피부병이라고 했다.
 
이 병은 비위생적인 환경에서 발생한 균이 어린아이의 몸에 기생을 시작해 점차 번지고 퍼져 겉으로 종기 모양을 하고 살 속으로는 깊이 뿌리를 내리는 병으로서, 아이는 이미 고치기 힘들 정도의 크고 작은 2000여개의 종기가 온 몸에 고루 퍼져 있는 상태였다.
 
치료하려면 오직 메스로 종기 주위 네 군데를 찢어 핀셋으로 그 주변을 힘껏 누르면 겉에 돌출된 종기의 크기보다 더 큰 브로콜리 모양의 하얀 뿌리가 드러나는데, 피부 깊숙이 송송 박힌 그것을 하나하나 뽑아 낼 때 마다 힘도 들지만 아이가 겪는 고통은 극심한 수준이라 했다. 그 많은 종기들을 일일이 뽑아 내기에는 수술시간이 오래 걸려 하루 2-3개 이상 제거하기 힘들고, 늘 환자들로 북적이는 국립병원의 사정상 의사 선생님들도 사실상 포기한 상태라며 솔직한 속내를 말해 주었다.
 
 
나는 의사선생님께 간청했다. 내가 의사가 아니기에 칼을 사용할 수 없지만, 만일 작은 종기들을 제거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있다면 알려 달라고 떼를 썼다. 나의 간절함이 통했는지 의사는 종기 주위를 메스 대신 주사바늘로 흠집을 낸 후 핀셋을 사용하여 뿌리까지 뽑은 후 소독하고 거즈로 덮으면 된다고 알려 주었고, 우리는 감사의 인사를 남기고 기쁜 마음으로 집에 돌아왔다.

아이와 나는 그 날 이후 1년 반 동안 상상도 못했던 끔찍한 사투를 벌이기 시작했다. 마취도 않은 생살을 바늘로 뜯어 벌리고, 핀셋으로 종기 주위를 누르고 당기며 깊이 박힌 브로콜리를 뽑아내는 일은, 매일 매일이 비명과 눈물로 가득한 잔인한 전쟁터 같았다. 그럼에도 시간이 갈수록 아이는 적응해 갔고 피고름 냄새는 더 이상 나를 자극하지 못했다.
 
날로 잔인하고 용감해진 나는 중간 사이즈의 종기에도 겁 없이 손을 대기 시작했고, 감사하게도 종기를 제거한 모든 곳이 염증 하나 생긴 곳 없이 잘 아물며, 새살이 나오자 아이의 예쁜 미소도 살아났다. 남편과 아들, 도우미, 온 가족이 함께 응원하며 아이의 인내심에 혀를 내두르며 칭찬에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결국 손가락 두 마디 정도 크기의 무섭고 두꺼운 큰 종기 20여개만 남았을 때 우리는 다시 의사를 찾아 남아있는 큰 종기들의 수술을 부탁했다. 아이의 달라진 모습과 그간의 오랜 사투를 전해들은 의사는 무척 놀라워하며 한동안 말없이 아이와 나를 번갈아 보았다. 마음 착한 의사는 곧 미소를 띠며 수술 스케줄을 잡아 보겠다고 했고, 이후 세 달 반에 걸친 힘겨운 수술 끝에 드디어 2000여개 넘던 모든 종기가 제거되었고, 우리는 기쁜 마음으로 아이를 고향 부모님 품에 돌려보낼 수 있었다.
 
이 일이 있은 후 어디에서 누구로부터 소문을 전해 들었는지 우리 집에는 각종 피부병 환자, 불치병 환자와 가족들이 몰려오기 시작했는데, 남편과 사별한 이후에도 끊임없이 가난한 사람들의 행렬은 이어졌다. 급기야 나는 거동이 불편한 환자들의 출장치료를 위해 가가호호 방문하기 시작했다. 큰 가방을 준비해서 그 안에 피부연고, 거즈, 소독약, 진통제, 소염제, 소화제,해열제 등 가벼운 약들과 함께 체온계 혈압계 등을 넣고 다녔다.
 
신분증조차 제대로 갖고 있지 않은, 외지에서 온 판자촌 빈민들은 논 근처 조그만 땅을 세 얻어 무허가로 판자 집을 지었다. 이들은 길에서 잘 보이지 않는 곳에 보금자리를 틀고 살았는데 판자촌 대부분이 논 근처였기에 조금만 땅을 파도 쉽게 물을 얻을 수는 있었으나, 농약 섞인 지표수를 생활식수로 사용했고, 더욱 큰 문제는 우물 가까이 위치한 화장실이었는데, 땅만 파고 가마니로 대충 둘러 문을 삼고 있었다.
 
생활하수조차 아무 곳에나 버렸기에 오폐수가 모두 식수로 우러나올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이로 인해 피부뿐 아니라 장기에도 손상이 있으리라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다. 마침내 피부병과 여러 가지 질병에 시달리는 주원인을 발견한 나는 몇몇 판자촌을 돌며 그들에게 그나마 위생적인 화장실과 우물을 그들 거주지 양쪽 끝에다 마련해 주었다.

그 애달픈 동네들 중 내 마음을 가장 아프게 한곳은 6개의 방이 서로 마주보게 지어진 12개 방의 판자촌 이었는데, 입구 첫 번째 1호방은 하루 24시간 언제든 찾아오는 남자들에게서 적은 화대를 받으며 일하는 여인들의 일터였고, 그 방과 붙어 있는 2. 3호 방은 그들의 거주지였다. 너무나 어색한 것은 일반 가정의 어린 자녀들이 이 좁고 좁은 공동체 안에서 부모와 함께 살아가고 있는 모습이었다.

어린 아이들이 난잡한 소음과 낯선 이들의 방문을 외면하며 함께 지내고 있는 참담한 모습에 나는 기가 막혀 입이 벌어졌다. 분노인지 슬픔인지 모를 묘한 감정을 느끼며 이후 매일 그곳을 방문해 그들과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는데, 아이들을 위해 준비한 간식을 나눠 주고, 미소로 정을 나누며 판자촌 사람들과 친분을 쌓아갔다. 낯선 남자들은 어린아이들의 눈길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남정네들의 출입이 심한 날이면 나는 아이들을 데리고 논두렁에 가서 노래도 하고 송사리도 잡고 놀았다.

그마저 한계를 느끼던 어느 날 포주가 나의 집을 방문했다. 이유는 경찰이 급습하여 여자들을 조사한 후 버스터미널로 데려가 각자의 고향으로 가는 버스에 태워 추방했기에 더 이상 장사를 할 수 없다며 내게 그 장소 모두를 저렴한 가격에 매입해 달라고 요구했다. 나는 그의 부탁대로 그곳을 구입해 환경을 바꾸고, 청결과 위생을 위주로 교육을 시작했다.
 
사람들의 의식은 조금씩 개선되며 형편들도 점차로 나아졌다. 시간이 많이 흘러 그 당시의 꼬마들은 어느새 어른이 되었고 더 나은 곳으로 이주하여 가정도 꾸리며 살고 있다. 그곳에 여전히 살고 있는 가정은 몇 안 되지만 이제는 비루함을 벗어나게 되었고, 공동체는 새 가족들로 채워져갔다. 이제는 가족과 같은 그들은 머리가 하얗게 변한 나를 ‘옴마’ 라고 부른다.
 
서울 평창동에 살았던 나는 바다를 좋아했던 남편과는 달리 산을 좋아한다. 몇 년 전 현지인 친구의 도움으로 아궁산 아래 자리한 저렴하고 넓은 대지를 얻어 작은 집을 지었다. 내가 늘 꿈꾸어 오던 일이었다. COVID-19팬데믹으로 인해, 가끔 들르던 산집에서 맑은 공기를 마시며 생활하다 보니 전원생활이 좋아 아예 눌러 살게 되었다.
 
지금 발리는 이 역병으로 인해, 세계 최고의 관광 휴양지로 북적이던 때와는 달리, 거리와 해변은 한산하다. 오래전 발리에 폭탄테러가 발생했을 적에도 이렇게 거리가 음산했던 적은 없었다. 지금처럼 사람을 만나기를 두려워하지도 않았었고 거리는 다시 북적이는 예전 모습을 되찾았었다.
 
국제공항이 장기간 폐쇄되고 연간 오천만 명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기자, 수많은 호텔과 상점들이 문을 닫았고, 상권이 집중된 곳은 그야말로 유령의 집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친근감을 주던 변두리의 예쁘고 조그만 가게들도 사정은 마찬가지, 하나 둘 문을 닫아가는 모습이 안타까워 나의 마음마저 울적해진다. 게다가 주변 친구들의 사업장이 줄도산 하게 되어 귀향을 하거나 문을 닫고서 언제 다시 올지 모르는 좋은 날을 기대하며 신음하는 동일한 처지에 놓인 우리들은 서로가 어떤 위로의 말조차 할 수 없어 더욱 가슴 아프다.
 
이러한 여러 가지 이유로 나는 이방인으로서 100퍼센트 힌두인들이 살고 있는, 해발 800미터 오지 산골에서 살아가게 되었다. 이곳의 의식주는 우리나라 7-80년대와 같이 고루하다. PDAM(Perusahaan Daerah Air Minum, 국영 지역상수도사업회사)의 관리 부실로 하루 한 시간만 가동되는 펌프는 고장도 잦다. 그나마 우기에는 비가 많은 곳인지라 동네 꼬마 녀석들은 비가 오면 비로소 목욕을 한다. 나 역시 물을 받을 수 있는 모든 그릇들을 꺼내 줄을 세우고 빗물을 받아 목욕과 빨래를 하고 식수로도 사용한다. 청정지역의 혜택일까 빗물이 깨끗하고 맛이 달다.

아궁은 산 전체가 화산 그 자체이기도 하지만 몇 년 전 발생했던 큰 화산폭발로 많은 화산재가 쌓여 토양이 무척 윤택하다. 초목은 무성하고 울창하며, 밭농사로만 생계를 유지하는 이들은 비료를 따로 쓸 필요가 없다. 하지만 천수에 주로 의존하다 보니 건기에는 좀 더 힘든 삶을 살아야 하고, 지구 온난화 탓인지 변덕을 부리는 날씨 탓에 지금은 종자선택에도 애를 먹고 있는 산촌의 현실이다.
 
특히 COVID-19팬데믹으로 인해 시내의 큰 장터, 호텔, 식당 등지에 보내던 야채와 힌두제사용 꽃 등이 판로를 잃어 아이들의 끼니를 거르는 일까지 생기게 되었다. 초등학생 정도면 누구나 밭농사 거들기와 소여물을 구해오는 것이 그들의 몫이다. 아이들은 왜소한 체격에 아침저녁 16-20°로 떨어지는 기온 때문에 콧물을 달고 살지만 다행히도 주변에 흔한 약초와 열매, 저절로 유기농인 자연산 허브와 야채들을 먹고 자란 덕분에 대부분이 건강하다. 하지만 한참 먹을 나이에 끼니를 거르는 것이 마음에 걸려 나는 하루 한 끼를 아이들과 함께 하기로 결정했다.

허브에 관심이 많은 나에게 아이들은 지천에 널 부러진 잡초들의 이름과 효능을 알려 주었고, 나무와 열매들의 이름과 잎의 효능들도 가르쳐 주었다. 만날수록 아이들의 자연에 대한 지혜와 지식에 감탄했고, 어린 나이에도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법을 잘 알고 있는 단순하지만 행복하고 강한 그들이 참으로 대견스럽고 사랑스러웠다.
 
아이들은 주변 밭에서 나오는, 시내와는 비교할 수 없는 싱싱하고 저렴한 가격의 야채, 과일을 살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고마운 녀석들에게 나는 작은 농장을 만들어 주었다. 아이들과 함께 메기, 닭, 오리, 거위 그리고 칠면조도 키우며 싱싱한 알들을 먹을 수 있게 되어 모두가 행복하다.
 
건기인 요즈음 나는 아이들을 차에 가득 태우고, 산에서 내려오는 물 맑은 강에 데려가 강변에 무성한 깡꿍을 뜯으며 멱도 감고, 빨래도 하며 질리도록 물놀이를 하다 해가 뉘엿해야 아쉬움 가득 안고 집으로 돌아온다. 물이 귀한 곳에 사는 꼬마들 인지라 물에서 놀다 보면 모두가 집에 가는 것을 잊을 정도이다. 이렇게 산골의 짧은 하루는 빨리도 지나간다.

끝이 보일 것 같지 않은 역병은 변이에 변이를 더하며 극성을 부리고 있지만 나는 매일 아침 구름 속에 있다가 잠깐 얼굴을 보여주는 아궁산의 장엄함에 감탄하며 고개 숙여 기도한다. 같은 산이건만 매일 다른 모습을 보여주니 참으로 경이롭다.

일찍이도 일어나 부지런히 지저귀는 온갖 새들과 아침을 여는 닭들의 회치는 소리는 이제 정겹기만 하다. 점심식사를 마친 아이들은 오후의 햇볕 속에 떼로 날아다니는 메뚜기와 잠자리를 잡아 농장의 새 모이로 주겠다고 마당을 누비며 깔깔거린다. 밤이면 밤마다 진하게 울어 대는 풀벌레 소리에 섞여 여기저기 반짝이는 반딧불 들은, 나를 심란한 세상으로부터 해방시켜 주고 있음을 느낀다. 자연은 아무리 바라보아도 새롭고 지루하지 않아 좋다. 아이들은 단순하고 잘 웃어서 좋다. 그들은 배가 좀 고파도, 며칠 씻지 못해도, 또 힘에 좀 버거운 집안일을 도울 때도 여전히 잘 웃는다.
 
지루하지 않은 자연의 얼굴들이다. 단조로운 듯 바쁜 하루하루 산속의 생활이, 외롭지 않고 오히려 행복 하다고 느낄 수 있는 것은 나이 탓일까? 독서를 즐길 수 있는 한가로운 시간, 아이들과 함께 하는 즐거운 오찬, 그 가운데 그들의 단순함과 웃음을 배우고, 자연이 주는 풍요로움과 바람이 오고 가는 길을 배워가는 나의 눈과 귀는 날로 더욱 새로워지고 있다.

아~ 벌써 노을을 머금고 붉어졌던 해는 아궁산을 넘어갔다.
까아만 하늘에 무수한 별들 마냥, 지나간 시간들을 회상하며 나만의 사색에 잠겨보는 여유롭고 아름다운 밤이다.
 
<수상소감/오선희(주부, 발리) >
안녕하세요.
먼저 제 부족한 글에도 불구하고 귀한 상을 주신 주최측과 심사위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저는 오래전부터 늘 가슴 뭉클한 순간들을 만나면 그 추억을 글로 표현해 간직하고자 손이 가는 대로 그렇게 시를 써 왔습니다. 그러다 저희 교회 목사님의 권유로 본 공모전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공모전 첫 시도 인지라 어떤 주제로 글을 써야 할지 생각하다가 항상 내 삶 속에서 늘 먼저 생각나고 내 맘 깊이 기억하는 또 여전히 현재 진행형인 내 삶의 얘기를 있는 그대로 진솔하게 적어 보기로 했습니다.
 
스스로를 위해 시를 써 왔던 때와는 다르게 다른 분들에게 읽혀질 글이라는 생각에 오랜 시간 동안 반복해 글을 다듬어 가다 보니 탈고에 제법 많은 시간과 정성을 쏟으며 글 쓰는 재미를 느끼게 되었습니다. 반면 내 마음이 글로써 다른 이들에게 전달된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닌 것을 깨닫고 여러 날을 끙끙대기도 했습니다.
 
결국, 적지 않은 나이에 글쓰기에 도전했던 솔직한 저의 마음은 내 글이 남에게 읽힌다는 부담감으로 인해 “창피만 당하지 말기를” 기도하며 글 속에서 가식을 걷어내 가는 과정을 통해 프로 작가님들의 마음도 조금 헤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예상하지 못한 큰 상을 받게 되어 진심으로 기쁘고 행복합니다. 이 상은 팬데믹으로 인해 우울하고 착잡하던 저의 삶과 마음에 큰 위로의 선물이 되었습니다.
 
다시 한번 진심 어린 감사의 마음을 전하며 모든 분들이 건강하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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