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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저항과 비운의 상징: 피트 에르베르펠트(Pieter Erberve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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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카르타 역사 연구팀 작성자 편집부 작성일 2022-09-05 11:19 조회 4,269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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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과 비운의 상징: 피트 에르베르펠트(Pieter Erberveld)
 
사공경(한인니문화연구원장)

▲역사박물관(Museum Sejarah)안뜰에 있는 Pieter Erberveld 비문(사진,사공경)
 

그를 처음 만난 날을 나는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90년대 말이었다. Kota Tua에 있는 역사박물관(구 시청)에서였다.박물관 안뜰 후문 출입구 쪽에 2미터 높이의 직사각형 벽이 있었고, 그 위에 있는 돌로 만든세로가 긴 직사각형의 큰 묘비는 비장해 보였다.
 
안내인은 이 세상에서 가장 참혹하게 죽임을 당한 자, 피터 에르베르펠트(Pieter Erberveld, 이하 Pieter)의 비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튼튼한 말에 사지가 묶였으며, 말들은 네 방향으로 달려갔고, 피부가 갈가리 찢어져 온 몸이 흩어지는 죽음을 맞이했다고 한다. 이 참혹한 역사를 아는지 모르는지 안뜰의 나무그늘 아래로 닭과 오리가 한가롭게 거닐고 있었다.
 
그날 이후 Pieter는 나에게 불면(不眠)의 이름이 되었다.
비문의 복제품은 비문 위에 Pieter의 해골이 꽂혀 있는 원래의 모습으로 현재의 Tanah Abang에 있는 묘비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 Museum Taman Prasasti(묘비박물관)에 있는 Pieter Erberveld 비문(사진,사공경)

묘비에는 네덜란드어와 자바어로 이렇게 적혀 있다.
 
‘배신자 Pieter Erberveld의 처벌에 대한 혐오스러운 기억으로. 이제 누구도 결코 이곳에 건축이나, 나무로 작업을 하거나, 벽돌을 쌓거나, 나무 심는 일은 허용되지 않을 것이다. Batavia, 1722년 4월 14일’
 
이 비문은 건물 금지령이 적힌 기념물로는 전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기 때문에 중요한 사료가 되었다.
 
Pieter Erberveld, 그는 누구인가?
그는 1722년에 무슨 이유로 그러한 처벌을 받았을까? 도대체 어떤 큰 잘못을 저질렀단 말인가?
Pieter는 1660년(?)에 부유한 독일인 아버지와 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독일의 Elberfeld에서 태어났으며, 비록 자신의 이름을 쓸 수 없었으나, 존경받는 지주이자 Batavia(네덜란드 식민기의 자카르타 명칭)의 기병대장이었다. 군대에서 은퇴하고 Mangga Dua에서 시작한 동물가죽사업(제혁업)은 성공적이었다.

이미 많은 유산을 상속받은 Pieter는 아버지에 이어 제혁업을 운영하는 부유한 사업가였다. 그는 유라시아인으로 'Indos'(인도네시아, 유럽, 아시아)의 큰 그룹에 속했다. 당시 백인 여성이 부족했으므로 많은 유럽 남성들은 현지인 혹은 아시아계 여인들을 현지처로 두었다. 종종 발리 출신의 예쁜 노예 소녀도 있었다. 대부분 현지처는 정당한 대접을 받지 못했으나, 그들의 자녀들 중 일부는 사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 중심에 피터가 있었다. 그는 가정교육을 잘받은 반듯한 청년으로 성장했다. Pieter는 인도네시아 브따위(Betawi)족 소녀와 결혼하여 Aletta라는 딸을 얻었다.
 
독일계 자바인이었으나 스스로 자바인이라고 생각했던 Pieter는 아시아계 여자들의 처우 개선과 인도네시아인들의 복지를 위해 노력했다. 젊은 Pieter는 Batavia 주변 지역 주민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었으며, 항상 인도네시아인들 편에 섰다. 심지어 그는 동부 자바에서 VOC(세계 최초의 주식회사인 네덜란드 동인도무역회사)에 맞서 싸웠던 노예 Untung Suropati의 아들들과 연락을 취하기도 했다.

네덜란드에게 빼앗긴 Batavia를 인도네시아 사람들에게 되돌려 주어야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Banten의 술탄과도 밀접한 관계였고 Banten 사람들을 많이 도왔다. 그러므로 Pieter는 차차 VOC의 시기와 미움을 받기 시작했다.
 
1708년에 VOC는 Pieter가 소유한 수백 헥타르의 토지를 몰수했다. 이때도 인도네시아인들은 Pieter편이었다. 그러나 일반 대중의 지지에도 불구하고 VOC는 여전히 독일계 주인의 땅을 차지할 것을 주장했다. Joan van Hoorn(1704-1709)총독은 그를 석방하는 대신 Pieter에게 아주 많은 벌금을 VOC에 바칠 것을 요구하기도 한다.
 
1721년에 또 VOC는 Pieter의 재산을 이유 없이 몰수했다. 그해 크리스마스 전야에 Pinangsia에 있는 중국인 소유의 폭죽 공장이 폭발하고 조선소가 불탔다. VOC는 이것이 Pieter의 소동이라고 의심했다.
 
당시 총독이었던 Henricus Zwaardecroon(1718~1725)는 Pieter가 살았던 포르투갈 교회(Gereja Sion) 동쪽의 모든 땅을 가지려고 했다. 무자비하기로 유명한 Zwaardecroon은 자신의 집과 정원을 팔고 싶지 않은 Pieter를 없애 버리고 싶었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은 Pieter와 VOC는 더욱 긴장 관계를 유지하게 만든 반면, 인도네시아인들은 Pieter에게 일어난 사건에 큰 공감을 느끼고 같이 VOC에 분노했다. Pieter는 현지인들의 집을 자주 방문하고, 후에 ‘찢어진 피부’(Pecah Kulit) 마을로 알려진 지역인 그의 집에서 종종 모임을 가졌다. 그 만남은 그들에게 용기를 주었다.
 
그는 이슬람 국가를 건설할 목적으로 수천 명의 자바인과 함께 반란을 계획했다는 혐의를 받는다. 네덜란드인에 대한 원한과 증오가 많았던 그는 Banten의 귀족 Raden Ateng Kartadriya(이하 Kartadriya)를 포함한 그의 충성스러운 추종자 23명과 함께 VOC에 대한 반란을 계획했다. 그는 봉기를 계획하면서 그의 추종자들에게 살아남을 행운의 부적으로 작은 동판과 비밀자금을 나눠주었다.
 
1721년말과 1722년초 기간을 거사일로 잡았다. Kartadriya는 Batavia 주변 시골을 다스리고, Pieter는 도시의 수장인 Tuan Goesti가 되어 정의의 가치를 높이 들고 VOC의 횡포로부터 인도네시아인들을 구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들의 섣부른 계획은 노예의 배신으로 총독에게 발각되었다. 또 다른 자료에 의하면 Pieter가 인도네시아를 위해 자신의 대의를 지지해달라고 Banten의 술탄에게 요청했는데, 술탄은 Pieter와 Kartadriya가 이후 큰 영향력을 미칠까 두려워 총독에게 알려주었다고 한다.
 
1721년 12월 31일, Kartadriya가 Pieter의 집을 방문했다. 그들이 새로운 사업 구상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데 갑자기 문이 부서지며 열렸다. 12명의 VOC 군인이 즉시 Pieter와 Kartadriya를 끌고 갔다.
 
‘Batavia의 검은 4월’
반란 혐의 피고인 23명(세 명은 여성)은 모두 비밀 재판을 받았다. VOC는 그가 자바인 왕족 Kartadriya와 함께 Batavia의 모든 네덜란드 주민을 죽일 계획을 오래전부터 세웠다고 주장했다. VOC는 시청 남쪽 들판에서 피고인들의 등을 십자가에 묶고, 오른손을 자르고, 팔을 묶고, 다리와 가슴살을 도려낸 채 복역시켰다.
 
체포된 지 약 4개월 후 고위 공무원 위원회(Collage van Heemradeen Schepenen)는Pieter와 그의 추종자들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당연히 여러 번의 잔인한 고문도 있었다. 1722년 4월 22일 VOC는 Pieter, Kartadriya, 인도네시아인 추종자들, 모두 23명을 보안상 시청(현 역사박물관) 앞의 공개 처형장이 아닌 성 남쪽의 Gallow 's Field라 불리는 곳에서 처형하였다. 처형된자들은 모두 무슬림이었다.
 
처형은 이례적이고 매우 잔인한 방식으로 집행되었다. 그들의 머리는 참수되었고 몸은 네개의 기본 위치에 있던 네 마리의 말에 묶였다. 말을 끌어당기는 순간 몸과 피부는 네 방향으로 나뉘었다. 그런 다음 그들의 머리는 도시 밖의 어딘가에 있는 기둥에 꽂혔다. 시신은 새들의 먹이감이 되었다.
 
▲1885년경, Batavia의 Macaraeg(현: Jl. Jayakarta)에 있는 Piter Erbervelt에 대한 묘비(출처:Tropenmuseum)
 
 
그들이 사지가 찢기는 죽음을 당했기 때문에 오늘날에도 이 마을은 Pecah Kulit(찢어진 피부) 마을이라고 불리고 있다. 마을 옆에 Ciliwung 강의 지류가 있는데, 이곳 사람들은 Kali Pecah Kulit(찢어진 피부 강) 또는 Kali Tangki(저항의 강)라고 불렀다.
 
처음 대량 처형이 있은 지 며칠 후 30명의 추종자들이 또다시 처형되었다. 처형은 Pieter의 집 근처인 Pecah Kulit 마을에서 이루어졌다고 한다.
 
인도네시아에서는 처형되기 전날 가족이 면회하는 전통이 있다. 그의 아내는 거의 실신하다시피 했기 때문에 Pieter의 딸 Aletta는 혼자서 아버지를 면회했다. 처형 당일에는 그의 아내와 딸이 함께 했다. 처형장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죄수는 교수대로 끌려갔다. 아내와 딸은 교수대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땅에 무릎을 꿇는 일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당시 Pieter의 나이는 59세(62?)이었다.
 
브따위 사람(자카르타 사람)들은 VOC의 잔혹함에 분노와 슬픔으로 치를 떨었지만, Pieter를 영웅으로 기억하며 경의를 표하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역사학자 Hendi Johari는 저서 『Zaman Perang』(전쟁의 시대)에서 이 사건을 ‘Batavia의 검은 4월’로 표현했다.
 
허위가 어떻게 진실이 되는가?
Pieter와 Kartadriya에 대한 죄목은 대부분이 조작되었다. Pieter와 그의 모든 추종자들은 시청의 특별한 방에서 길고 매우 잔인한 고문을 당한 후에 허위로 자백했기 때문이다.
 
C.R. Boxer는 자신의 저서 『Jan Compagnie in War and Peace』에서 Pieter가 자바인을 부추겨 Batavia의 유럽인들을 학살하려했다는 혐의는 거짓이라고 밝혔다.
 
Pieter 비문은 1722년 4월 14일에 세워졌다고 한다. Pieter가 네 등분되어 살해당했던 날은 1722년 4월 22일이다. 실제로 이 사건이 발생하기 8일 전에 이미 비문이 세워졌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이는 법원이 VOC의 압력을 받고 있었고, 모든 것이 오래 전에 계획되어 있었다는 것을 반증한다.
 
또한 야만적인 처형이 있은 지 200년 후, 네덜란드 역사가인 ECGodee Molsbergen(Godee)는 Pieter 사건을 고문의 결과로 얻은 정치적 음모로 가득 찬 유혈 사건이라고 불렀다. Godee는 학식 있고 지적인 Pieter가 준비없이 갑자기 쿠데타를 계획하여 무모하게 행동할리가 없으며, VOC의 경제적 탐욕과 정치적 음모 때문에 발생한 것이라고 결론 내렸다. 
 
VOC의 국가기록보관소 자료(1922-1937)에 따르면, Pieter가 체포된 지 약 3주 후에 국가고위관리위원회에서 23명에 대해 집중 조사를 실시했다. 주요 피고인인 Pieter, Kartadriya 및 Layeek는 조사 과정에서 아무 반란 계획도 없었다고 주장했다.
 
끔찍한 고문에도 불구하고 Kartadriya는 침묵했으나, Layeek는 고문에 못 이겨서 Pieter가 반란을 일으키도록 실제로 그를 설득했고, 반란이 성공하면 Pieter는 왕이나 총독이 될 것이고 그의 지지자들은 반란에 참여한 각자에 따라 보상을 받기로 했다고 허위자백을 했다.
 
Layeek의 자백을 받은 검사는 Pieter와 Kartadriya에게 더 잔인한 고문을 가했다. Pieter는 점점 더 심해지는 고문을 견딜 수 없어 마침내 Kartadriya가 자신을 부추겼다고 허위 자백을 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Pieter는 음모의 증가가 되는 문서는 그의 집의 찬장에 보관된 상자에 숨겨져 있다고 말했다. 반군인 Untung Suropati의 아들과도 편지를 주고받았다고 말했다. Pieter는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너무나 황폐해졌기 때문에 미친 듯한 어조로 Banten의 왕자 12명과 Cirebon의 왕자 13명, 귀족 3명 등 여러 가상의 이름을 언급했다.
 
Pieter와 그의 친구들이 학살된 지 며칠 후에 VOC의 정치적 음모가 더욱 분명해졌다.  첫 정보를 받은 VOC 관계자인 Reykert Heere는 VOC에 보상을 요청했다.  VOC는 그의 직급을 커미셔너에서 최고구매책임자로 올리고 월급을 100길더로 인상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주의 깊은 수색에도 불구하고, Pieter의 집에 있는 오래된 찬장에 있는 상자에서 한 글자의 편지도 발견되지 않았다."라고 Godee교수는 자신의 저서에서 기록했다.

Pieter 묘비는 어디로?
원래 그의 묘비는 포르투갈 교회(Gereja Sion) 부근의 JL. Pangeran Jayakarta에 2세기가 넘도록 있었다고 한다. 네덜란드인은 Pieter살았던 곳에 ‘배신자 Pieter Erberveld를 기억하기 위해서’라고 새긴 기념비를세웠다. 콘크리트와 석고로 세워진 기념비 위에 경고의 표시로 Pieter의 머리를 날카로운 창으로 찔러서 비문 위에 올렸 두었다.
 
일제 점령기 때에 네덜란드 식민지 분위기를 없애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이 비문을 당시 일본군 사령부로 사용하던 현재의 역사박물관으로 옮겼다. 그때 묘비 위의 해골은 손상되었다. 1970년에 JL. Pangeran Jayakarta에 창에 찔린 해골이 있는 원래의 모습으로 복제품을 만들어 세웠다.
 
일본인 방문객조차도 기념비를 방문하기 위해 정기적으로 방문했다고 하는데 그곳에 TOYOTA자동차 쇼룸을 만들기 위해 이 복제품은 1986년 Tanah Abang에 있는 야외박물관인 묘비박물관(Taman Prasasti)으로 옮겨졌다.
 
거의 300년이 지난 지금 이 묘비는 여전히 ​​견고하게 보인다. 다만, 세월이 흘러 옅은 흰색을 띄고 있다. 묘비박물관에 서 있는 기념비 바로 꼭대기에는 창에 꽂힌 Pieter의 해골이 초록 잎들과 하늘을 배경으로 처연히 서 있다. 주위의 천사와 슬피 우는 여인상이 그를 위로하고 있는 듯했다.
 
▲1900-1918년 기간 중 Pieter Erbervelt묘비(출처: Public Domain/National Museum of World Cultures)

역사는 흐르고 있다. 박물관 안뜰 비문에 있는 초록 잎은 오늘도 푸르다. 초록 잎은 변함없이 Pieter를 위로하고 있는 듯하고 화해의 상징 같기도 하다. 묘비 앞에 양 옆으로 서 있는 벽은 Pieter를 보호하는 것 같다. Pieter의 처참한 마음을 감싸고 싶어 하는 인도네시아인들의 마음 같다.
 
Pieter는 오늘도 말한다. ‘내가 사랑한 인도네시아여. 더 이상 식민지배를 당하지 말고 영원히 평화롭기를, 초록 잎으로 다시 만나기를. 나의 갈갈이 찢어진 몸이 평화의 초석이 되기를’
 
네덜란드 식민주의에 대한 저항의 상징인 Pieter는 오늘도 정의와 순결로 우뚝 서 있다. 저 비문처럼. 나는 가슴에 성호를 긋는다.
 
한때는 그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금기시되었던 시절도 있었다. 그러나 이제 그는 전설이 되어 좁은 골목골목에서도 그의 이야기는 메아리 치고 있다.
 
 
참고문헌:
HistoricalSite of Jakarta: Adolf Heuken SJ (2007):
자카르타 박물관노트 :사공 경 (2005)
http://arsipindonesia.com/uncategorized/april-hitam-di-batavia: Hendi Johari
https://news.detik.com/berita/d-5314621/kampung-pecah-kulit-jakar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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