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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인니 문화 연구원 [칼럼] Batavia 그리고 Cafe Batav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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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카르타 역사 연구팀
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4,094회 작성일 2022-09-29 1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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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인니문화연구원 자카르타역사연구팀 22번째 칼럼>
 
Batavia 그리고 Cafe Batavia
 
글. 조은아(한인니문화연구원 자카르타역사연구팀장)
 
 
최근 자카르타 아니스 바스웨단Anies Baswedan주지사는 꼬따 뚜아Kota Tua(오래된 도시, 옛 도시)의 지역 명칭을 바타비아Batavia로 변경하겠다고 발표했다. 아니스 주지사는 이 지역의 리모델링 작업을 통해, 자전거와 보행자 전용도로를 활성화 시켜 저공해 구역으로 만들고 과거를 반영하는 미래 도시로 발전시키겠다고 밝혔다.
 
또한 이 지역을 중심으로 근처 해양박물관Maritime Museum의 고질적인 침수 문제 해결과 동쪽 깔리 브사르Kali Besar의 정비, Jl. Lada와 Plaza BEOS 주변의 보행로 설치, 꾸니르Kampung sususn Kunir과 똥꼴Kampung sususn Tongkol, 아쿠아리움Kampung Aquarium 지역의 정비 등 바타비아를 중심으로 한 6각형 모양의 마켓을 형성시키겠다는 포부를 전했다.
 
MRT 자카르타와 바타비아의 통합 교통 시스템을 완성을 목표로 이미 2020년 Harmoni-mangga Besar 구간 건설 계약을 마쳤고, 두 번째 단계로 자카르타 남쪽에서 안쫄Ancol 까지의 연결을 진행할 것이며, 자카르타 남쪽에서 북쪽, 동쪽에서 서쪽으로 이어지는 라인, 파트마와띠Fatmawati에서 따만 미니Taman mini 연결 구간 등 모두 2028년까지 완성을 목표로 진행 중이라고 설명했다.
 
자카르타 주의회에서는 바타비아로 공식 명칭을 바꾸는 데 반대의견도 있다. ‘Batavia’란 과거 식민지 시대에 사용했던 명칭이라는 이유에서다. ‘Batavia’란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 (이사 VOC)가 자야카르타 왕자를 무릎 꿇리고 이 지역을 점령하면서 350여년 식민시대를 대신했던 이름임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아니스 주지사가 “바타비아 지역은 역사가 가득한 곳이다. 이곳에 오는 것은 과거뿐만 아니라 미래를 지향하는 것이기도 하다”고 말하던 그 자리에는 주인도네시아 일본 대사가 함께해 도시 발전 공사에 아니스 주지사와 함께 할 것이라고 했다.
 
뉴스를 보고 있자니 문득 파타힐라 광장이 그리워졌다.
 
▲파타힐라 광장과 카페 바타비아(사진=자카르타역사연구팀) 
 
 
Batavia 탄생 그리고 사라짐...
 
1611년 VOC는 자야카르타에 무역 사무소 건설을 핑계로 석조를 기초로 한 목조 주택을 지을 수 있는 건설 허가를 받는다. 그런 다음 그들은 Ciliwung 강 동쪽 강어귀 근처에 약 1.5 헥타르의 땅을 임대해 사무실, 창고 및 거주지를 짓고 본관의 이름을 나쏘 하우스Nassau Huis라고 지었다.
 
얀 코엔Jan Pieterszoon Coen이 총독이 되었을 때(1618-1623) 그는 Nassau Huis와 같은 구조인 모리셔스 하우스Mauritius Huis를 건설하고 여러 개의 대포가 배치된 높은 돌담을 쌓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그들이 빌린 지역을 둘러싸고 7미터 높이의 성벽을 두르고 견고한 요새로 만들어 자야카르타를 인수할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무역을 하자’라는 빌미로, 목조 건물 허가를 받아 건물을 짓고, 성벽을 두르고, 온러스트에 무역을 위한 선박 수리소와 조선소, 병원 등을 지으며 그들은 철저하기 정복을 준비했다.
 
1619년 5월 30일 이 요새의 기슭에서 VOC는 자신들에게 무역을 허가한 자야카르타를 공격하여 궁전과 거의 모든 건물을 불태웠다. 반 목조 건물에서 시작한 그들은 마침내 도시 전체를 장악했다. 처음에 Coen은 이 도시의 이름을 뉴 홀랜디아Nieuwe Hollandia(새로운 네덜란드)로 지정하고 싶었지만 네덜란드의 De Heeren Zeventien은 Batavians를 기념하여 이 도시의 이름을 Batavia로 지정하기로 결정했다 .
 
‘바타비아Batavia’ 라는 이름은 네덜란드의 용감한 옛 부족명이었다. 기원전 1세기 후반부터 AD 3세기까지 로마인들이 Batavia 라고 불렀던, 현재 네덜란드 라인강 삼각주 주변에 살던 고대 게르만 부족인 Batavi 부족에서 따온 이름이다.
 
16세기 네덜란드 사람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고대 이야기와 기원 신화에는 바타비 부족들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합스부르크 군주국(지금의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하기 위해 싸웠던 80여년(1567년~1648년 독립전쟁) 동안 자신들은 신화 속에 등장하는 바타비 민족을 닮아 용감하고 근면하고 불굴의 의지를 가졌다고 믿게 되었다.
 
사실, 1795년부터 1806년까지 네덜란드 지역에 존재했던 단명한 그들의 ‘바타비아 공화국’도 있었다. 하지만 그보다 훨씬 앞선 1619년, 지구 반대편 어느 섬나라에 작은 항구 하나를 식민지화 하면서 자신들의 고대 신화에 등장하는 용감한 민족 Batavi의 이름을 가져왔다. 그리고 이 지역의 주민들을 오랑 브따위Orang Betawi로 불렀다. 자신들의 독립을 향한 뜨거운 피의 근원이라 믿었던 자신들의 조상 부족의 이름을 자신들이 점령한 식민지에 사용했던 것이다.
 
1621년 3월 4일, Stad Batavia ‘바타비아 시’ 정부가 구성되었다. 자야카르타는 철저히 사라졌고 그들만의 새 건축물과 창고 등을 짓고 해자, 철조망, 튼튼한 기둥 그리고 요새로 도시를 전체를 둘러쌌다. 1650년까지 도시 건설은 계속되었으며 Batavia시는 처음 정복했을 때보다 3배나 확장되었다.
 
하지만 본국과 바타비아와의 거리는 너무도 멀었다. 80여년간의 독립 전쟁을 마치고 곧이어 1652년 제1차 ~ 1784년 제4차 영란전쟁(영국과 네덜란드간의 전쟁)으로 네덜란드의 국력은 많이 피폐해졌고 특히 해상 교역에 있어 우위를 잃었다.
 
이로 인해 해상 무역으로 나라의 자금을 뒷받침하던 VOC는 동인도의 거의 모든 교역소에서 영국에 의해 무역의 길이 막혔고, 심지어 1797년에는 영국 해군에 의해 바타비아 항구조차 봉쇄당하고 만다. 그리고 1799년 파산하여 국영화된다.1800년, 네덜란드는 그 자리에 ‘네덜란드령 동인도 바타비아’로 네덜란드 정부 직접 통치하에 두게 된다.
 
전쟁의 승리로 기가 바짝 오른 영국은 바타비아만에 있던 온러스트섬의 조선소 등을 파괴하고 바타비아를 손아귀에 넣게 되는 순간을 꿈꿨지만, 네덜란드는 불굴의 바타비 민족 정신으로 바타비아 만큼은 끝까지 지켜내고 만다. 그들의 바타비 정신은 19세기, 수마트라섬, 자와섬, 보르네오섬, 소순다 열도, 술라웨시섬, 말루쿠 제도, 파푸아섬 등 인도네시아에 위치한 여러 섬들을 식민지화 하였으며 20세기 초반에는 거의 모든 인도네시아 지역이 ‘네덜란드령 동인도’가 되어버렸다.
 
1905년 4월 1일, 네덜란드 정부 통치의 Stad Batavia는 Gemeente Batavia(지역 자치 도시)로 변경되었다. 즉, 정부 차원의 관리에서 자율적으로 시 정부의 평의회가 중앙 정부와 별도의 자금 관리을 관리, 사용할 수 있도록 자치 도시 시스템으로 전환하게 된다. 그러나 1935년 1월 8일, Stad Gemeente Batavia로 다시 변경되었다.
 
1942년 일제 강점 이후 일본군은 자신들이 이곳을 점령했다는 것을 세계에 알리기 위해 ‘바타비아’라는 이름을 ‘자카르타’로 바꾸었다. ‘바타비아’는 그렇게 사라지고 일제에 의해 ‘자카르타’가 되었다.
 
그리고 1945년 8월 17일 일본이 물러간 이후에 네덜란드는 여전히 자카르타의 소유권을 주장했지만 3년여의 인도네시아 독립 전쟁 끝에 1949년 12월 27일, 마침내 인도네시아의 독립과 주권을 인정하게 된다.
 
 
그리고 남은 카페 ‘바타비아’
 
사라진 바타비아의 심장부는 역시 파타힐라 광장이었다.
 
파타힐라 광장은 늘 활기가 넘친다. 허접하지만 화려한 색상으로 눈을 현혹시키는 연 장사와 색색의 리본과 꽃은 장식한 자전거를 대여해 주는 곳이 제일 눈에 띈다. 거리 악사들의 음악과 춤추는 사람들, 외국인 관광객들의 필수 방문 코스가 된지 오래다.
 
파타힐라 광장(사진=자카르타역사연구팀)
 
하지만 그곳은 식민시절 가장 잔혹했던 역사의 중심부였고, 거의 매일 죄수들의 기도 소리와 형벌을 받는 자들의 고통스런 비명으로 가득했던 곳이었다. 분명 식민지 시절 가장 처절했던 역사의 기록이고, 형벌과 처형이 이뤄졌던 자리다.
 
우리나라의 경우, 아픈 역사를 빨리 지우고 새 건물을 지어 올리기 바쁘지만 바타비아 만큼은 그대로 보존된 그 위에 즐거움과 화려함 등 식민지 시대를 상상할 수도 없는 단어들을 얹어 놓았다. 물론 식민 이전의 상황도 서로 다르지만 식민 시대 이후 지배자였던 자들의 뒷처리 태도가 분명 달랐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그 광장을 오롯히 내려다 보이는 곳은 지금의 역사 박물관의 정면 창문과 건너편에 자리한 ‘카페 바타비아’다.
 
‘카페 바타비아’Cafe Batavia 건물은 1830년에 지어졌다. 이 파타힐라 광장 안에서 자카르타 역사박물관으로 재탄생한 바타비아 구 시청 건물에 이어 두 번째로 오래된 건물이다. (광장의 다른 건물들은 지진과 전쟁 등 각기의 이유로 형체를 남지 않을 정도로 부서졌다가 20세기에 재건축된 건물들이다.)
 
▲카페 바타비아 (사진=자카르타역사연구팀)
 
2층 건물인 이곳은 1층에는 바, 공연장, 라운지 공간이 있으며 흡연석이다. 이 바의 이름은 ‘Winston Churchill’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 총리였던 윈스터 처칠의 대형 사진이 걸려있다). 1996년 Newsweek International 선정, ‘세계 최고의 바’로 꼽힌 바 이기도 하며 이후 카페는 여러 매체를 통해 소개되었고 여러 번 ‘최고의 바’ ‘최고의 레스토랑’ ‘세계 100대 카페’로 선정되었다.
 
자바산 티크나무 계단의 삐걱임을 들으며 위층으로 올라가면 150명을 수용할 수 있는 메인 다이닝 홀인 '그랜드 살롱Grand Salon'이 있다. 건물의 갤러리 부분인 윗층에는 나무 덧문이 달린 대형 창문들이 있어 안으로 따뜻한 햇빛이 가득 들어올 뿐 아니라 그 창을 액자 삼아 늘 파타힐라 광장을 바라볼 수 있다.
 
카페 바타비아 이층에서 바라본 파타힐라 광장과 역사 박물관  (사진=자카르타역사연구팀)
 
이 건물은 당시 네덜란드 고위 관료들의 거주지, 네덜란드 총독의 사무실, 창고 등 다양하게 사용되었다.
1884년경부터 몇 년 동안 건물의 1층은 무역 회사인 E. Dunlop & Co.가 이곳에서 도매 사업을 하였고, 이후 이슬람교도를 주선한 ‘Kongsi Tiga - Kantor Kapal Hadji’(증기선으로 바타비아에서 중동으로 순례자들을 보내던 사업체)의 사무실로도 사용되었다.
 
1991년 건물에는 프랑스인 Paul Hassan에 의해 Paulo Gallery가 열리기도 했었다. 1993년에 호주인 Graham James가 건물을 구입해 2~3년 동안 건물을 복원하고 레스토랑을 열었다.
 
Cafe Batavia는 1930년대를 테마로 고풍스러운 느낌의 바닥, 벽을 가득 메운 액자들과 유럽의 네덜란드가 꿈꿨던 ‘열대의 네덜란드’가 느껴지는 유럽풍 인테리어가 웅장하기까지 하다.
 
▲카페 바타비아 1층의 모습 (사진=자카르타역사연구팀)
 
 
▲카페 바타비아 2층 내부 모습(사진=자카르타역사연구팀) 
 
자카르타가 된 이후 파타힐라의 보존에 힘썼던 Ali Sadikin 자카르타 시장의 초상화를 비롯해 1805년부터 1992년까지의 바타비아의 총독과 시장의 초상화, 이 카페를 다녀간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 등 세계적인 유명인사, 수카르노 전 대통령, 인도네시아 대표 여성 지도자 까르띠니 등 인도네시아 역사에 한 획을 그었던 인물들 등 1,000여점 이상의 사진들이 벽마다 가득 채우고 있다. 모두 주인장의 개인 소장품이다.
 
▲카페 바타비아에 걸린 수많은 사진들(사진=자카르타역사연구팀)
 
 
아니스 주지사의 뉴스를 보면서 카페 바타비아를 떠올린 것은 카페 바타비아야 말로 아니스 주지사가 말한 것처럼, 미래 도시의 과거 상징물 같은 곳이기 때문이다.
 
열대의 네덜란드를 꿈꿨던 지배자들의 생활 그리고 그곳에서 보이는 파타힐라 광장, 화려했던 지배자들의 삶, 그리고 사라지고 혹은 기억된 역사들... 자신들의 독립투지를 부추겼던 ‘바타비’ 민족의 명칭이 이름이 된 식민지 ‘바타비아’, 50여년 동안 사용했던 ‘꼬따 뚜아’에서 다시 식민지 시대의 이름으로 돌아온 ‘바타비아’.
 
그리고 그곳의 이름을 ‘자카르타’로 바꿨던 또 다른 점령자 일본과 재개발하겠다는 아니스 주지사의 ‘꿈의 바타비아’... 모든 것이 아이러니하게 마주치는 곳이다.
 
 
*감수 : 사공경
 
*참고문헌 :
SEA TODAY
Batavia, 1740: menyisir jejak Betawi /Windoro Adi
Kompasiana.com
Gimon CA. Sejarah Indonesia : An Online Timeline of Indonesian History. /gimonca.com
A History of Modern Indonesia since c.1200 Palgrave Macmillan,/ Ricklef MC.
Jalan Jalan Jakarta /사공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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