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회 열린강좌 후기] 조선 도자기, 동아시아와 유럽을 깨우치다 > 한인니 문화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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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인니 문화 연구원 [67회 열린강좌 후기] 조선 도자기, 동아시아와 유럽을 깨우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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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탐방기
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6,156회 작성일 2020-01-24 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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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인회한인니문화연구원 67회 열린강좌 후기 >

조선 도자기, 동아시아와 유럽을 깨우치다
 
차정민 (JIKS 중 졸업. 민족사관고등학교 2학년)
 
2020년 1월 18일 한인니문화연구원에서 권영주 고전문학박사의 “한중일 도자기 전쟁과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라는 강좌가 열렸다. 이번 주제를 통해 서로가 새롭게 역사에 대해 배우는 시간을 가졌다. 선생은 YK 교육 개발원 원장, 부산초량왜관 연구회 학술 이사이며, 2019 신지식인으로 선정(역사.문학 전담 해설)되기도 했다. 현재 방통대 고전문학 강의를 하고 있으며 다수의 인문학 강의를 진행하고 있다.
 
우선 일본이라는 나라에 대한 자세한 탐구가 이루어졌다. 우리나라가 현대에 갖추고 있는 교육 시스템의 여러 요소들이 일본의 것을 기반으로 세워진 것들이 적지 않다는 점으로 강의를 시작하게 되었다. 일본의 야마구치 현에 속해 있는 하기라는 4만의 작은 어촌 마을에 요시다쇼인이 설립한 '쇼카손주쿠'라는 작은 서당(세계유산으로 지정)에서 이토 히로부미와 메이지 유신의 주역들을 모두 길러 냈다. 이곳 하기 출신들이 메이지유신을 일으켜 근대화로 간다. 이곳의 교육방식은 철저한 토론식 수업이었다. 시험도 없었고 지행합일을 가르쳤다. 즉, ‘청출어람, 교학상장, 줄탁동시’ 가 이곳 서당에서 영향을 받은 것임을 알게 됐다. 이는, 일본이 당시 대외적 상황 및 개방 교류의 중요성 등을 깨우치고 세계적 정세에 맞게 살아온 것을 나타낸다.
 
 
 
일본 근대화의 기반이 조선 도자기
 
도자기 이야기를 해보자. 일본의 경우 임진왜란 당시, 조선의 도자기를 모조리 훔쳐오고 도공들도 모두 납치했다. 일본에 간 이삼평을 비롯한 여러 조선도공들의 도움으로 결국 일본은 도자기 기술을 꽃 피웠고 히라도 국제무역항에 위치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지사를 통해 유럽으로 일본 도자기 즉, 조선의 도공이 만든 도자기를 팔기 시작한다.
 
히라도에는 아예 조선인 도공을 위한 도공 마을이 있었다. 이삼평, 심당길, 이작광, 이경, 백파선 등의 조선 도공들은 일본에 도자기를 발전시킨다. 쇄국으로 일관하던 조선은 숙종 때 부산 초량왜관에 도자기 공방을 무료로 세워주고 80년간 도자기에 사용할 흙을 포함한 모든 재료와 도공까지 제공해주어 일본이 마음껏 도자기를 만들어 본국으로 가져가고 그것으로 큰 돈을 벌 수 있도록 도와주는 한심한 일까지 했다. ‘도자기의 가치’ 뿐만 아니라 ‘예술가의 혼’ 조차 몰랐었다. 이삼평의 아리타 도자기는 네덜란드 무역선을 타고 인도네시아 자카르타를 경유하여 터키 이스탄불에 도착하여 유럽 전역으로 퍼졌다. 일본은 큰 돈으로 부강해진다.
 
히라도항을 한 눈에 조망할 수 있는 히라도성.
이곳 성주에 의해 조선인 80명이 끌려왔다.
 
임진왜란 뒤에 이에야스 에도막부가 쇄국정책을 펼칠 때에도 일본은 빗장을 완전히 닫은 것은 아니었다. 나가사키 인공섬 데지마에 네덜란드 교역만은 허락했다. 덕분에 이 지역에서는 네덜란드인들의 실용적인 문학책들이 퍼져 나갔고, 난학이 발전해 ‘학문의 자율시대’를 맞는다. 일본 지식인들은 선진 근대문물을 마음껏 받아들인다. 게다가 일본은 세계 제1의 은 생산량을 자랑하는 이와미 은광을 가지고 있는데 이 또한 조선의 회취법 보유기술자 두 명이 넘어가서 세계 최대 은광 볼리비아의 포토시를 제쳤다고 한다. 은을 보유한 일본은 포르투갈 상인과 무역을 통해 철포를 구입하고, 회취법으로 총알을 만든다. 임진왜란 때 일본은 조선인들의 기술로 만든 총알을 사용하는 아이러니에 도달한다.
조선도자기와 난학 그리고 은은 일본을 개혁을 이루고 제국주의의 기반을 탄탄하게 할 자산이 되었다.
 
조선의 도공은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청의 화려한 도자기보다 조선의 소박하고 보면 볼수록 매력이 넘치는 도자기에 푹 빠져 있었다고 한다. 여기서 또 하나 인상적이었던 것은 당시 조선의 도공들을 천민이어서 자신이 만든 도자기에 이름을 새기지 못했지만 일본으로 건너간 조선의 도공들은 이름을 새길 수 있도록 해주고 이름이 없는 이들에게는 이름도 지어주고, 후에 한 지역의 두목이 되도록 사회적 지위도 주었다고 한다. 규슈의 나가사키 사세보시 산골에 ‘마카와치’ 라는 도자기 마을에는 조선도공 이작광 이경의 후손들이 아직까지 모여살고 있다고 한다. 특히 일본의 ‘아리타 도자기’를 만든 조선의 천민 이삼평은 일본백자의 도조로 인정받고 신으로 모셔지고 있다니 놀랍다. 조선 도공들은 납치되었지만, 조선에 있을 때보다 나은 대접을 받고 살았을 것 같다. 실사구시의 학문을 천대했던 조선이 세계적인 기술을 가진 조선의 도공들을 일본에 빼앗긴 것이다. 원통할 뿐이다.
 
도자기의 시조가 된 웅천에서 끌려온 조엔의 손자-도조신사
 

도자기, 책, 은광 그리고 의문점

일본은 결국 조선 도자기로 돈을 많이 벌었고 그것이 근대화를 이뤄낼 때 조선은 어땠는가. 임진왜란의 쓰라린 기록을 적은 징비록, 북학파 박지원이 청에 사절단으로 갔을 때 보고 들은 청의 선진문명에 대해 적은 열하일기와 같이 창고에 가둬두고 국민들에게 읽히지 않은 책들이 많았다. 유교 사상에 대한 집념을 버리지 못한 채, 나라는 상업을 천시하게 되는 좁은 사고방식을 갖추게 되었다. 또한 당시 무역의 기본이었던 은을 조선은 보유하고 있었지만 은광 개발을 금지하는 입장을 유지했다. 세종대왕 당시에는 은을 몰래 채굴하는 자에게는 교수형을 선고하고, 영조 때에는 농업에 방해 요인이 된다는 명목 하에 금지령을 내렸다.
 
나는 이 부분에서 질문을 했다. “성리학적 질서를 기반으로 세운 나라가 바로 조선이고 당시의 현실은 이 사상을 귀족들의 권력을 유지하는 데에 사용하는 도구로 써서 민중을 무식하게 만든 시기였는데, 설사 백성들도 마음껏 책을 읽고 자유롭게 사고할 수 있는 세상이 왔다 하더라도 중국과 같은 강한 강대국의 눈치를 보아야 했다면 과연 일본처럼 조선도 근대화를 할 수 있었을까? 그런 의미에서, 근대화를 이룰 수 있었던 다른 방법은 없었을까?”
 
결론적으로는 정답을 내리기에는 어려운 딜레마였던 것이다. 최근에 벌어진 사드 논란 속에서 대한민국이 어떤 강대국에 의존하고 행동해야 되는지에 대한 피치 못할 고민이 현대에 까지도 이어지는 것처럼 말이다. 결국에는 세상의 정세를 파악하지 못한 나라의 탓이 크다는 의견도 나왔다. 동아시아 3국을 비교하며 17세기 최강국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를 통한 무역을 거친 도자기가 조선 도공이 만들었다는 사실을 일깨워준 소중한 시간이었다. 일본제품으로 팔려 나간 우리 도공들의 얼이 유럽에 일본을 문화강국으로 알리는데 크게 일조하였다. 잊어서는 안 되는 역사임을 우리들은 기억해야 할 것이다.
 
도공 후손들이 만들어 팔고 있는 도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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