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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인니 문화 연구원 [칼럼11] 아물 수 없는 상처: 바타비아 시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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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카르타 역사 연구팀
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9,123회 작성일 2021-06-23 2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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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물 수 없는 상처: 바타비아 시청
 
조인정(와세다 대학교 대학원 )
 
식민지 시대, 법은 권력을 지닌 자들에게는 힘을 휘두르는 수단이었지만 힘이 없는 자들에게는 무용지물이었다. 법을 어긴 죄수자들과 억울하게 잡혀간 시민들에게 행해지는 권력자들의 폭력에 죽임을 당하는 그들의 모습은 어느 곳에서나 자주 맞닥뜨리는 일상의 한 부분이었다. 그들의 날카로운 비명소리와 권력자들의 비인간적인 가혹행위를 목격하는 시민들은 더 이상 감정에 동요하지 않았다. 배긴 굳은살에 무디어진 통증으로 동정심과 애석함은 그들의 마음에서 점점 멀어져 갔다. 법의 레이더에서 묵묵히 할 일을 하며 하루하루 생을 이어 나가는 것, 그 것이 17세기 네덜란드령 동인도회사 식민 치하에 살아가던 바타비아 시민들의 처절한 현실이었다.
 
법과 권력이 실재하던 공간, 잔혹한 형벌의 울부짖음이 반복되던 공간, 그곳은 옛 바타비아의 중심에 위치한 ‘시청 (City Hall, Stadhuis)’ 이었다. 시청은 당시 혼인신고, 고아복지 등 바타비아 운영에 필수적인 다양한 기관들이 종합해 있었는데, 그 중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던 기관은 민사·형사재판을 담당했던 치안법원(Bench of Magistrates)과 사법재판소(Court of Justice), 그리고 그 재판에 따른 형벌을 감행했던 교도소였다. 이후 이어질 본문에서는 각 기관의 역할 혹은 이에 얽힌 이야기를 소개하고자 한다.
 
▲ Jacob Van Meurs 작 <City hall of Batavia in> (1682)’ (출처Columbia.edu)
(1627년 Jan Pieterszoon Coen총독의 명령에 따라 Nieuwe Markt(현 Taman Fatahillah)에 2대 시청을 건축)
 
치안 법원: 권력이 정의를 이기는
 
식민지 정부의 직접적 영향을 받던 치안법원의 공직자들은 식민 중앙정부에서 임명되었다. 그들은 동인도 회사와 공직자들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했고, 반면 시민들이 목소리를 내고 정책에 참여하는 참여민주주의를 배척했다. 당연히 법원은 독립된 국가기관으로서의 이상적 기능을 상실했다. 그리고 정의는 권력 앞에서 무력하게 무릎을 꿇었다. 법원 공직자들은 각종 가혹한 고문으로 시민들의 거짓 자백을 이끌어 냈다. 당시(17세기)에는 자백을 받아 내지 못하면 용의자를 처벌할 수 없었기 때문에 무자비하고 잔인한 고문을 행했던 것이다.
 
도르래를 이용한 고문은 당시 시청에서 행했던 잔인한 고문 방법 중에 하나였다. 도르래 고문은 용의자의 몸을 잡아 위아래로 늘려 고통을 주는 방법이었는데, 손은 밧줄에 묶여져 도르래 기둥 위까지 들려 올려졌고 발에는 무거운 돌이 묶여졌다. 하지만 이러한 고문에도 자백을 받아내지 못했을 경우, 법원에서는 그의 발에 묶인 돌의 개수를 더 늘려 그가 죽음에 이를 만큼의 고통을 느끼도록 했다. 물론 자백한 후에도 고통스러운 형벌은 이어졌다. 가장 최고의 형벌은 역시 사형이었다. 실제로 바타비아에서 형벌은 일 년에 약 10건씩 발생했는데, 이는 바타비아의 지배국인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에서 벌어지는 총 사형 수의 2배에 해당되었다.
 
사형은 보통 시청 광장에서 벌어졌는데, 재판관이 시청의 가장 높은 층에서 고문하는 장면을 직접 바라보고 있는 상태에서 행해졌다. 다른 엄중한 형에 처한 자들은 보통 강제노역에 동원되었는데, 그들은 몸을 지지거나 귀를 자르는 등의 고문에서 피할 날 없는 비인간적인 노동환경에서 일을 해야 했다. 반면, 가벼운 형에 처한 자들은 벌금을 지불하거나, 임금이 삭감되거나, 혹은 철창에 갇혀 다른 이들의 조롱을 받아야 했다. 결국 고문과 형벌은 둘 다 육체적·정신적 고통이라는 동일한 결과에 닿았던 것이다.
 
사법재판소: 어린 남녀의 짓밟힌 사랑
 
시청은 청춘 남녀의 한이 서려 있는 짓밟힌 사랑이야기가 얽힌 가슴 아픈 곳으로도 유명하다. 그 사랑 이야기의 전말을 이렇다. 식민정부에서 서열이 높은 군인들은 네덜란드에서 바타비아로 자신의 아내와 아이들을 데리고 올 수 있었으나, 서열이 낮은 군인들은 이에 해당되지 않았다. 따라서 낮은 직급의 군인들은 식민지 여성들과 잠자리를 가지며 성욕을 해소하고, 그들과 결혼을 했으며, 첩을 두기도 했다. 네덜란드 군인과 인도네시아 여인의 혼혈이었던 17세의 어린 사관생도였던 피에터(Pieter J. Cortenhoeff)는 멋진 외모로 많은 여성들의 가슴을 설레게 했으며, 그 중에는 13살 여자 아이 사라(Sara Specx)도 있었다. 인도 추기회의(Council of the Indies)의 명예 회원이었던 그녀의 아버지는 업무상 잠시 네덜란드로 떠나야 했고, 그는 신뢰가 두터운 동료이자 두 차례(4대: 1619 ~1623, 6대: 1627~1629 )나 동인도 회사의 총독이었던 코엔(Jan Pieterszoon Coen)에게 그가 다시 돌아올 때까지 딸을 보살펴 줄 것을 부탁했다. 코엔은 사라를 자신의 성에서 머물도록 허락했다.
 
피에터와 사라 두 젊은 남녀는 사랑에 빠졌다. 사라는 코엔의 집에 피에터를 몰래 들어오게 했고 그들은 잠자리를 함께 하며 늦은 밤까지 열렬한 사랑을 나누었다. 코엔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그들은 경비원들에게 몰래 뇌물을 주었고 그들의 뜨거운 사랑은 비밀리에 행해졌다. 여느 밤과 다름없이 요새의 방에서 사랑을 나누고 있던 둘은 술에 잔뜩 취해 실수를 저질렀다. 월경 중이었던 사라의 옷에 피가 묻은 것을 코엔의 친구가 보게 되어 두 사람의 비밀스러운 사랑이 발각되었던 것이다. 코엔은 자신의 집에서 자신의 권위와 명성을 떨어뜨리는 파렴치한 일이 일어난 것에 노발대발했고 둘을 엄중한 형벌에 처하도록 명했다.
 
▲ 코엔의 친구에 의해 사라와 피에터의 비밀스러운 사랑은 세상에 알려졌다. (출처 Tiberis Yeimo)
 
1629년 6월 6일, 파릇파릇한 청춘의 나이에 피에터는 사법재판소의 판결로 시청 광장에서 참수당하며 생을 마감했다. 수백명의 사람들이 모여 있던 그 곳에 그의 잘린 머리는 굴러 떨어졌다. 광장으로 끌려간 사라는 피에터의 앞에 세워졌고 그가 참수당하는 모습을 직접 봐야했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사라는 반쯤 벌거벗겨져 공개적으로 채찍질을 당했다. 이러한 잔인한 형벌을 가하지 않고 ‘사면할 권리’를 적용해 두 사람을 용서할 수도 있었지만 코엔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렇게 사랑의 불씨는 처참하게 꺼졌다.
 
▲ 시청 광장에서 바타비아 시민들 앞에서 사형을 감행하는 모습. (출처 VOI)
▲ 1710 년 건축된 3번째 시청. College van Schepenen (시의회) 및 Raad van Justitie (사법기관),
바타비아 시의 주요 교도소로도 사용되었다. 참고로 1870년에 시청 동쪽에 네덜란드 사법기관
(현 미술도자기박물관)이 세워지기 전까지 시청은 바타비아의 최고 법원의 기능을 담당했다.
 
그 해 바타비아에 콜레라가 유행했는데, 그 때문에 코엔은 9월 21일 갑작스럽게 생을 마감했다. 바로 이틀 후 사라의 아버지는 바타비아로 돌아왔지만 딸에게 무자비한 벌과 공개적인 수치를 준 코엔에 반감을 가지고 그의 임종에도 찾지 않았다. 그리고 그 뒤 사라의 아버지는 코엔의 뒤를 이어 동인도회사의 새로운 총독으로 부임했다. 그는 코엔의 편에서 사라에서 엄벌을 내리도록 판결했던 판사들을 교회에서의 만찬에 참석하지 못하게 하는 등 그들과 완전히 선을 긋고 바타비아를 이끌었다. 그 후 사라는 1632년 5월에 개신교 목사 게이올그(Georg Candidus)와 결혼했고 1635년에 대만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교도소: 죽음에 이르는 어둠의 구덩이
 
시청에서는 채찍질을 당하는 노예들의 비명소리 또한 끊임없이 이어졌다. 시청 1층의 양쪽 끝은 교도소였는데 그 안은 한 번에 300명 이상의 수감자들로 가득했다. 수감자들 대부분은 사소한 죄를 저지르고 주인에게서 쫓겨난 노예들이었는데 그들 대다수는 사슬에 묶여 수감되었다가 채찍형벌을 받았다. 구금자들 중에는 노예 뿐 아니라 위험한 행동을 하는 정신질환을 앓는 이들도 포함되었다. 또한 시청 바로 뒤에는 1층짜리 교도소가 있었는데, 사비를 지불한 수감자들은 이곳의 독방에서 수감생활을 보낼 수 있었다.
 
최악의 교도소는 지금도 그대로 남아 있는 지하에 있는 감옥이었다. 그 곳은 낮고 습해 거의 환기가 되지 않아 “폐기장과 어둠의 구덩이”라고 일컬어질 정도였다. 환경이 얼마나 비위생적이었는지 재판 또는 판결을 기다리는 동안 투옥된 사람들은 재판관을 만나러 감옥을 나오기 전에 사망하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1845년 조사에 따르면 총 수감자의 85퍼센트가 티푸스, 콜레라 등에 감염되거나 과밀 수용으로 인해 사망에 이르렀다고 한다. 또한 그들은 항상 질 낮은 음식을 제공받으며 근근이 연명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딱 하루 정부가 그들을 위해5 레이크스다알더(rijksdaalder) (당시의 은화)를 써 준비한 근사한 식단이 있었는데 이 날은 그들의 사형일 바로 전 날이었다.
 
▲ 어둠의 구덩이로 일컬어지던 지하 감옥. (출처 Yosia Margaretta)
 
어둠과 빛이 공존하는
 
1974년 이래 자카르타 역사박물관으로 모습을 바꾼 옛 시청은 여전히 파타힐라 광장 남측에 우두커니 서 있다. 하지만 더 이상 이 곳은 지배층의 무력탄압과 식민지인들의 사회 불평등으로 인한 고통의 울부짖음이 서려 있는 곳이 아니다. 지배층의 지배와 명성, 그리고 엄격한 규율에 얽매인 사랑만이 허용되는 공간도 아니다. 21세기 현재, 식민지 어둠의 장막은 걷혔고 파타힐라 광장은 인도네시아 인들의 문화 휴식 공간으로 변화하였다.
 
광장에는 분홍·파랑·노랑 화려한 색의 모자를 쓰고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 기타를 치고 노래하는 사람들, 코스프레를 하고 관광객을 맞는 사람들, 길거리 음식을 사 먹는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노랫소리와 웃음소리로 가득하다. 이곳을 거닐다보면 왁자지껄한 분위기에 사로잡혀 이곳이 과거에 아픔과 상처가 존재했던 곳이라고는 전혀 생각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게 행복에 젖어 광장을 즐기며 다니다가도 지하감옥과 같은 역사의 흔적을 마주하면 목이 메이는 서러움과 애잔함이 마음에 스며든다. 어쩌면 이런 슬픈 역사의 상처를 화사한 색상, 밝은 노래, 우스꽝스러운 코스프레로 애써 감추려 하는 거 같아 더욱 깊은 슬픔이 나를 덮치기도 한다. 웃음 뒤 가려진 완전히 아물 수 없는 상처가 있는 곳, 햇빛과 그늘이 공존하는 곳, 그곳이 바로 파타힐라 광장과 시청의 모습이 아닐까 싶다.
 
감수: 사공 경
참고자료:
Adventur, 「Foto Hukuman Gantung dan Hukum Pecah Kulit Zaman Kolonial」 《Adventur》(2016)
Columbia.edu, 「Bataviatownhouse1」 (2017)
Tiberis Yeimo, 「The Term 'Nose Masher' Started From This Tragic Love Story Of A Couple In Batavia」《Paragram》 (2020)
VOI, 「The Beheaded and The Tragedy Of Love Behind The Term 'Masher'」《VOI》 (2020)
VOI, 「When Watching The Death Penalty, It Becomes A Batavian People's Spectacle」《VOI》 (2020)
Yosia Margaretta, 「Rasakan Atmosfer Berbeda di Penjara Bawah Tanah Museum Fatahillah」Wartakota》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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