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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인니 문화 연구원 [칼럼10] 1740년 화교 학살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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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카르타 역사 연구팀
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13,559회 작성일 2021-04-21 1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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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40년 화교 학살 사건
 
정윤희 /  한인니문화연구원 부원장
 
“ 바타비아 운하바닥이 시체들로 가득했기 때문에 물에 젖지 않고도 건널수 있었다  
 
<자료출처 ceknricek.com- 바타비아 화교학살 / 반 르우펜(Van Leupen) 그림의 한 부분1768 >
 
250여년 전의 화교 학살은 1740년 10월부터 벌어진 사건으로 VOC(네덜란드 동인도 회사)가 그 주동자였다. 화교 10,000여명이 사망하고 VOC 군대 500여명이 사망하는 유혈 사태를 일으켰다.
 
화교 학살의 배경
인도네시아를 점령한 VOC는 자신들 손 아래의 동남아시아의 여러 무역 항구 중에 특히 바타비아의 개발에 매우 적극적이었다. 18세기 초 VOC는 광산과 고무,사탕 수수 농장 등에서 일 할 중국 노동자들을 바타비아로 대거 이주 시킨다. 이들 화교 노동자들은 바타비아 성 안으로 들어갈 수는 없었지만 토착민들과는 다른 부지런함과 영특함으로 빠르게 재산을 축적하기 시작한다. 특히 중국과의 무역에 불법적으로 관여하면서 상권을 장악하고, 정치 계급 이외의 다양한 분야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면서 경제적 지배층이자 실질적 부유층으로 성장한다. 바타비아의 성 밖은 잘 사는 화교촌과 현지인 빈민촌으로 구분되어 도시 구조 자체가 변화되었다. 이에 대해 VOC의 계급층들은 위기감을 느끼고 화교 수를 제한하려 했지만 화교들은 이미 그들끼리 똘똘 뭉쳐 영향력을 키운 상태라 쉽지 않았다.
 
1720년대 중반부터 바타비아에서 설탕이 과잉생산되기 시작하고 브라질과의 수출 경쟁으로 설탕 수출가격이 하락하고 거기에 커피 수출까지 빨간불이 켜지면서 많은 실직자들이 생겨난다. 설상가상 1730년대 말라리아 전염병으로 바타비아의 경제 상황이 최악으로 치닫으면서 지배하는 자들에 대한 현지인들의 부정적인 감정은 극에 달하게 된다. 1740년대에 들어서면서 설탕 가격은 1720년대의 반 가격까지 떨어지고 바타비아의 경제는 총체적인 어려움에 빠지고 만다.
 
<당시 VOC의 바타비아 총독, 아드리안 발케니어(AdrianValckenier 1737~1741)>
 
당시 VOC의 바타비아 총독, 아드리안 발케니어(AdrianValckenier 1737~1741)는 바타비아의 총체적난국을 탈출할 방법으로 화교를 지목한다. 1740년 7월, 발케니어는 화교들에게 거주 허가 서류를 등록하도록 법을 정하고 거주증 없이 일하는 화교 노동자들을 찾아내 지금의 스리랑카인 실론(Ceylon)과 남아프리카의 다른 네덜란드 식민 농장으로 보내기로 결정한다. 그리고 부유한 화교들에게는 부정 부패의 추가비공식 추징금을 내렸고 납세를 거부하면 그들 역시추방하겠다고 위협했다. 하지만 화교들 사이에선 VOC가 화교들을 배에 싣고 떠나 자바해에 던져버린다는 소문이 돌았다. 실제로 토마스 스탬포드 래플스(Thomas Stamford Raffles)의 ‘자바의 역사’라는 저서에 따르면 많은 화교 노동자들이 추방되어 바타비아를 떠났지만 목적지에는 도착하지 못하고 망망대해에서 버려졌고 일부는 배위에서 반란을 시도하다가 사망했다는 기록이 있다. 부패한 VOC의 관리들은 부유한 화교들을 타깃으로 핑계를 만들어 그들의 재산을 빼앗고 추방인 목록에 이름을 올렸다. 화교들은 불안할 수 밖에 없었다. 허가증은 VOC의 핑계였을 뿐, 언제든 누구든 VOC의 눈밖에 나는 순간 바다에 수장될 위기에 처한 것이었다. 그들의 두려움은 점점 VOC를 향한 반감으로 끓어오른다.
 
충돌 그리고 대학살
1740년 9월, 절망적인 화교들은 도시 성벽 밖에 하나 둘씩 모여들기 시작했다. 10월 1일, 화교들이 무장을 하고 전쟁 준비를 하고 있다는 정보는 발케니어에게 눈엣가시였던 화교들을 없앨수 있는 그럴싸한 명분이 되었다. 움직임을 예의주시하던 발케니어는 화교들이 조금이라도 반란의 여지가 보일 경우 강력하게 처단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그리고 작은 충돌에서 VOC 병사가 사망하자 발케니어는 즉시 2개 부대를 동쪽과 서쪽 성벽으로 나눠 배치시킨다.
 
10월 7일, 화교 노동자들이 중심이 되어 제당소를 약탈 후 불태우고, 니호콩이 이끄는 부대가 오늘날의 자카르타 자띠느가라(Jatinegara)와 따나 아방(Tanah Abang) 지역에서50여명의 VOC 병사들을 살해한다. VOC는 계엄령을 내리고 11개 대대의 병사들을 화교촌에 투입해 본격적인 학살을 시작한다. 10월 8일, 땅그랑(Tanggerang)과 버까시(Bekasi) 두 지역에서 1만 여명의 화교들이 VOC 군대를 향해 맹공격을 펼쳤으나 오히려 1,800여명의 사망자를 냈다.
 
VOC는 무기 소지 수색 명령을 내리고 도시의 모든 화교들의 집을 뒤지기 시작하면서 도시 전체가 초긴장 상태에 빠지게 된다. 국적을 막론하고 일반 시민, 선원, 군인, 노예들까지 거리로 몰려들었다. 전 화교촌의 집, 상점으로 쳐들어가 강탈하고 남녀노소 구분없이 살해했다.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었던 화교들은 현지인들도 공격했다. 살인 및 강간 기타 흉악한 행위들을 저지른 화교들에 대한 반격으로 현지인들도 화교촌이었던 깔리 버사르(Kali Beasr) 지역에 화교 소유의 집과 상점 그리고 공장 등을 공격하고 불 태우기 시작하고 이러한 충돌이 반복되면서 사상자는 늘어갔다.
 
VOC의 부대는 화교촌을 향해 대포를 발포했고 화교들은 자살을 택하거나 운하에서 배로 탈출을 시도하다가 발각되어 살해되기도 하였다. 심지어 화교 병원의 환자들뿐 아니라 시청 감옥에 수감되어 있던 죄수들까지 처형했다. 그들이 반란이나 화재 발생에 관여하는 것이 불가능 했음에도 불구하고 시청 뒷마당에서 도살되었다. 거의 모든 화교들의 집과 상점들이 불에 탔고 도시 안의 화교인들을 VOC 기병대의 총기,단검, 도끼, 몽둥이 등으로 살해당하여 운하에 던져졌다. 그 수가 얼마나 많은지 헤아릴 수 없었으며 발에 물을 적시지 않고도 운하를 왕래할 수 있었다고 전해진다. 도시는 그야말로 아비규환이었다.
 
발케니어 총독은 10월 22일 전투의 종식을 위해 모든 사건의 원인을 화교 반란군에게 넘겼다. 사태진화를 위해 반란군 수장에게 현상금을 걸고 나머지 화교들을 사면하였지만 화교들을 사냥하는 일이 계속되었다. 이 학살로 인해 발케니어는 나중에 공직에서 물러나 네덜란드로 귀국하는 길에 체포되어 사형선고를 받았고 오랜기간 재심을 기다리다 1751년 옥사하고 만다.
 
<자료출처 ceknricek.com- 아비규환의 바타비아 / 반 르우펜(Van Leupen),1768 >
 
G.B. 쉬와르첸(Schwartzen)은 1751년 쓴 그의 저서 ‘라이즈 인 오스트 인디언(Reise in Ost-Indien)’에 아래와 같은 내용을 썼다. 이 책의 내용들은 몇몇 목격자의 진술과 더불어 실화일 가능성을 뒷받침하고 있다.
 
‘처음에는 여성과 아이들은 살해하지 않았다. 선원들은 화교인들의 문을 강제로 열어 거주자들을 죽이고 그들의 소지품을 강탈하는 것으로 시작했다. 오전 9시가 되자 발케니어 총독은 도시로 들어가 모든 화교들을 살해하라고 명령했다. 그리고 나서 도살이 시작되었다. 목수들은 문과 창문을 부수기 위해 도끼를 가져왔다. 총기를 소지한 사람들이 안으로 들어가 화교들을 쐈다.
 
이웃이 뚱뚱한 돼지를 소유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그것을 집으로 가져가고 싶었다. 목수들이 그것을 보고 나를 때리고 먼저 주인을 죽이라고 돼지를 빼앗았다. 나는 권총이 없었기 때문에 깡통을 잡고 종종 저녁을 같이 먹었던 이웃을 그가 죽을 때까지 때렸다. 동료 한명은 그것을 즐기는 보였지만 다른 명은 어쩔 없이 그렇게 했다. 왜냐하면 우두머리 목수가 앞에 서서 나를 지켜보았기 때문이다. 남자를 죽인 후, 나는 방에 가서 총알이 장전된 권총을 발견했다. 나는 그것을 들고 밖으로 나가 무작위로 살인을 시작했다. 명, 명을 죽인 후부터는 개를 죽이는 것처럼 화교인을 죽이는 것에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고 도살할 있었다.
 
오후 1시, 화교들의 도시가 불타고 있었다. 그들은 우리 손에 넘겨지기 보다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을 택했다. VOC그들만의 병원을 가지고 있었다. 우리는 명의 맹인을 제외한 모든 환자들을 죽이라는 명령을 받았다. 시청에는 200명의 죄수들이 있었는데 탄약을 아끼기 위해 칼로 찔러 죽였다. 10월13일에 화재가 멈추고 도시에는 화교들이 남아 있지 않았다. 모든 도로와 골목은 시체로 가득 있었다. 운하도 시체로 가득 있었다.
 
<자료출처 jaybodyinside.blogspot.com / IndoCropCircles.wordpress.com>
 
당시 화교들의 니호콩 대장은 본토 수도 베이징에 바타비아에서 일어난 ‘학살과 반란’에 대해 보고했으나, ‘청나라 제 6대 황제 ‘건륭제(1735-1796)’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보수적이었던 건륭제는 해외에 거주하는 중국인들은 ‘세상의 중심인 중국’ 에서 조상의 묘를 지켜야 하는 임무를 다하지 않는 사람으로 간주하고 외국에서 태어난 사람들은 다른 ‘이방인들’ 과 같은 존재로 여겨 그들의 운명에 대해 신경 쓰지 않았다.
<니호콩 대장>
 
마침내 11월 2일 찌레본(Cirebon) 술탄 왕국과 반뜬(Banten) 술탄 왕국이 출정을 오면서 VOC와 현지인들 그리고 화교 간의 전쟁은 끝을 맺는다. 살아남은 화교들은 땅그랑 지역으로 도망쳤고 마침내 VOC는 휴전 명령을 내렸으나 그 후에도 작은 전쟁들은 2년 가까이 이어졌다.
 
사건 이후 그리고
1740년 10월의 대학살은 바타비아에서만 화교1만여명의 사망, 화교 소유의 가옥 7백 여채가 약탈 당하거나 불탔다. 대학살의 여파는 다른 자바 북부 해안 도시로도 퍼져 나가 1741년에는 스마랑, 수라바야 등에서도 화교 학살이 발발했다. 중부 자바로 탈출한 화교들은, 당시 빠꾸부워노(Pakubuwono)가 이끄는 마타람 왕족 (Mataram Sultanate)의 도움을 받아 VOC 교역소를 계속 공격하기도 한다. 이후 화교들은 빠꾸부워노와 손잡고 마타람에서 VOC를 완전히 축출하고자 했던 자바전쟁(1741~1743)을 일으키게 된다.
 
충돌이 끝난 후, 흩어졌던 화교들은 서서히 바타비아로 돌아오기 시작한다. VOC는 화교들에게 오늘날의 글로독(Glodok) 지역인 차이나타운 안에서만 생활하게 하고 바타비아 남쪽 성벽 근처의 화교 집들을 불태우고 그곳에 대포를 설치하고 그 성벽 위에서 글로독 지역을 감시했다. 화교들은 거주지역을 나오기 위해서는 통행권을 발부 받아야만 했다. 그렇게 모든 것은 화교의 패배로 끝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들은 결코 패배하지 않았다.
 
네덜란드 식민지 역사상 가장 유혈적 충돌 중 하나로 꼽히는 1740년 10월의 피비린내 나는 화교 대학살 이후 VOC는 인도네시아에서 떠나는 그날까지 화교들을 예의주시했으나 화교는 2021년도인 지금도 여전히 인도네시아의 경제의 주축으로, 전세계의 경제를 꽉 쥔 세력 중 하나로 성장하고 있다.
 
 
*감수 - 조은아
*사진 출처- 구글
*참고문헌 및 번역
-『Historical Sites of Jakarta』 by Adolf Heuken SJ/2007년
- Asaljeplak.com
- Ceknricek.com
- Jaybodyinside.blogspo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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