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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인니 문화 연구원 [334-335회 문화탐방후기]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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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탐방기
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6,712회 작성일 2020-01-30 15:17

본문

< 한인니문화연구원 334~335회 문화탐방-인도네시아 한인 100년사 기획탐방 5 >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사공 경 / 한인 100년사 수석 집필위원 

프롤로그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렀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김춘수의 「꽃」이라는 시다. 나는 여기 ‘꽃’의 자리에 ‘역사’를 대신 쓰려 한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렀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역사가 되었다.”
 
우리가 암바라와 고려독립당 투쟁현장과 돌아갈 곳 없는 위안부들의 아픔이 서린 현장을 찾아, 그들의 이름을 불러보고, 기록하는 것이 곧 역사를 만드는 일이다. 그런 관점에서 이번 100년사 탐방은 역사를 쓰는 의미 있는 일이 될 것이다.
 
1. 고려독립청년당의 독립투쟁 현장과 망국의 한이 서린 위안소
 
스마랑 소재 스모워노(sumowono) 보병훈련장, 취사장에서 1944년 12월 29 밤 11시에 고려독립청년당이 결성되었다. 이억관(가명 이활ㆍ33) 등 조선인 포로감시원 10명은 흰 천에 혈서로 이름을 쓰고 당가(黨歌)를 불렀다. ‘반만 년 역사에 빛이 나련다. 충의의 군병아 돌격해라. 피 흘린 선배들의, 분사한 동지들의 원한을 풀어주자, 창을 겨눠라(1절).~~ 우리는 고려독립청년당원 해방의 선봉이다. 피를 흘려라.‘ ‘아세아의 강도 제국주의 일본에 항거하는 폭탄아가 되라’ 등의 강령도 발표하고, 불발탄이 되었지만 연합군 포로 수송선 탈취 거사 계획도 세웠다. 이후 당원은 26명이 된다.
 
암바라와 (Ambarawa)
중부 자바의 스마랑과 살라띠까 (Salatiga)시 사이에 위치한 도시로 행정상 스마랑시에 속한다. 식민지 시대부터 암바라와는 족자와 마글랑(Magelang) 지역을 연결하는 중요한 철도 허브였다. 스마랑-암바라와-마글랑 (Semarang-Ambarawa-Magelang) 노선은 1977년까지도 운영되었으며 철도박물관도 있다.
 
암바라와는 제2차세계대전 당시인 일본 점령기간에는 최대 15,000명의 유럽인이 수용된 포로수용소가 있던 곳이다. 일본의 항복과 인도네시아 독립선언에 이어 1945년 11월20일 ~12월15일까지 암바라와 주변에서 인도네시아군과 영국군 사이의 전투가 벌어졌던 곳이기도 하다. 연합군과 NICA 부대가 암바라와와 마글랑에 있는 네덜란드 포로들을 석방시키고 인도네시아군을 무장해제 시키기 시작하면서 지역 주민들은 분노했고 연합군과의 관계는 파멸에 이른다. 그 결과 암바라와 전투가 벌어진다.
 
<한국일보 고찬유 기자 제공>
 
암바라와 의거
1945년 1월 4~6일 3일간 중부자바 암바라와 일대에서 조선인 포로감시원으로 와서 고려독립청년당원이 된 민영학(당시 28) 손양섭(24) 노병한(25) 3의사(義士)가 일본군 10여 명을 사살한 뒤 모두 자결한 항일 의거다.
 
1945년 1월 4일, 오후 3시쯤 일본군이 자바포로수용소 스마랑분소 제2분견소로 쓰던 암바라와의 성요셉성당에서 출발한 트럭이 8~9㎞ 정도 갔을 때, 고려독립당 혈맹당원인 손양섭 의사가 운전병에게 총을 겨누며 성당 옆 무기고로 가서 민영학, 노병한 의사와 함께 총 네 자루와 총탄 2천 발을 탈취한다. 무기고는 현재 오토바이 주차장으로 사용되고 있다.
 
오후 5시 분견소장(대위) 관사(현 농업학교사무실)를 습격했다. 일본군은 대규모 지원 병력을 급파한다. 1월 5일 민영학 의사가 자결한 옥수수 밭에는 푸르디푸른 벼가 자라고 있었다. 남은 두 의사는 시내로 돌아가 의거를 계속했다고 전해진다. 1월 6일 위생자재창고에서 자결한 손양섭, 노병한 의사는 어깨동무를 하고 있었다.
 
공교롭게도 민 의사가 숨진 옥수수 밭과 고 정서운(1924~2004) 할머니 등 조선처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13명이 머물던 암바라와 성 앞에 위치한 위안소에서 500m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
 
 
<민영학 의사가 자결한 옥수수밭>
 
암바라와 성과 위안소
암바라와 성은 1834-1845년에 세워졌으며 1865년 큰 지진으로 건물의 일부가 파괴되었다. 1927년에 교도소로 사용되다가 일본군 점령 당시인 1942-1945년에는 빌렘 교도소, 군 막사가 있었고, 부속 건물로 위안소, 위안부병원이 있었다. 1945년 이후에는 TKR 본부 (안보 군), 1950년 이후에는 교도소와 군대 막사로 사용하고 있다.
 
<암바라와 성>
 
<화장실로 변한 위안소>
 
짐승우리보다 못한 위안부들의 처소를 보고 우리는 이방인처럼 서 있었다. 위안소는 충격적이지만 있는 그대로의 진실을 드러내고 있었다. 인권유린에 대해 침묵하는 것은 소름끼치는 인간의 직무를 유기하는 것이 분명하지만, 인류보편적인 가치인 인권, 평등, 정의를 외치는 일이 얼마나 공허한 일인지를 깨닫는다. 죽음에 대한 공포와 삶의 무상함이 가득한 이 위안소에 조선처녀 13명이 끌려와서 3명은 가혹한 생활을 견디지 못해 죽고, 3~4명은 방공호에 생매장되고, 6~7명 정도 살아남았다고 한다.

아난따 뚜르 프라무디아가 쓴 『인도네시아의 ‘위안부’ 이야기』 (원제: 일본 군부압제하의 처녀들)이라는 책도 떠올랐다. 절규하다 못해 침묵으로 밖에 말할 수 없는 무겁고 아픈 이름 위안부. 줄을 서서 기다리는 일본 병사, 하루에도 30명~50명에게 처참하게 강간당하고 성병에 걸리고 임신하는 소녀들. 강간당하지 않으려고 저항하다가, 낙태하기 위해 아편에 중독 당했던 그들. ‘황군 병사에게 주는 선물,’ ‘위생공중변소’로 취급되었던 이름. 생존, 인간존엄과는 너무도 먼 거리에 있었다.
 
< 인도네시아 한인 문화탐방단이 19일 70여년 전 조선 소녀가 끌려왔던 중부자바주 암바라와의
일본군 위안소를 찾았다. 방 한 칸은 화장실로 변했다 (사진=한국일보 고찬유 기자 제공) >
 
2. 역사의 도시 스마랑 유적지
 
삼포공(Sam Poo Kong)으로 알려진 정화사원: 스마랑에서 가장 오래된 중국 사원으로. 중국 무슬림 탐험가 정화 (Sanbao, 산바오1371-1435)가 설립하였다. 정화제독은 1405~1433년 동안 7차 원정을 하였으며 7차 모두 인도네시아를 거쳐 갔다. 정화의 대원정으로 동남아에 화교가 자리 잡는 계기가 되었다.
1405년에 시작된 첫 항해는 약 28,000명의 승무원이 317 함대로 나누어 탔다. 콜럼부스 함대보다 87년이나 앞선 대항해였다. 그의 함대는 아라비아, 브루나이, 동 아프리카, 인도, 말레이 군도 및 시암을 방문하였다. 정화의 일부 함대가 미국을 발견했다고 믿는 설도 있다. 왜냐하면 1492년 아메리카를 발견한 콜럼부스의 손에 이미 지도가 쥐어져 있었다고 한다. 정화제독은 금, 은, 도자기 및 실크를 선물로 주었고, 타조, 얼룩말, 낙타, 상아, 기린을 선물로 받았다고 한다. 그는 중국과 동남아시아 해역을 오랫동안 괴롭힌 해적들을 진압하기도 했다. 그는 1435년 마지막 항해 중에 사망했으며, 중국에 무덤이 있지만 비어 있다. 그는 바다에 묻혔지만 일부 역사가는 아마도 스마랑에 묻혔을 것이라고 믿는다.
 
1704년 사원은 산사태로 무너지기도 했고 혁명기간과 1960대에는 정치적불안적으로 방치되기도 했으나 그때마다 개조를 거쳐 오늘에 이른다. 특히 2005년 정화제독 600년 탐험을 기념하여 ‘돌아온 정화’라는 표어를 내세우며 중국은 노를 저어 세찬 물결을 다시 항해하겠다는 마음으로 혁신적인 개조를 한다. 16x16 미터 (52 x 52 피트)였던 사원은 개조 후 34x34 미터가 된다.
 
< 정화(삼포공)사원>
 
천개의 문 (Lawang Sewu): 스마랑의 랜드마크로 네덜란드 동인도 철도 회사의 본부였다. 이 건물은 유령의 집으로 유명하지만 스마랑시 정부는 그 이미지를 바꾸려고 노력하고 있다. "천개의 문"은 수많은 문과 고급스러운 디자인에서 유래되었다. 건물에는 약 600개의 큰 창문이 있다. 한 건물 앞에는 인도네시아 독립 전쟁 중 사망 한 직원 5명의 기념비가 있다.
 
스마랑 5전투 (Pertempuran Lima Hari): 1945년 10월 14~19일 무기인도를 요구하는 스마랑 지역 민병대와 이를 거부하는 현지주둔 일본군과의 협상 결렬되자 부녀자를 포함한 일본 민간인들을 무차별적으로 체포하여 블루형무소에 감금 후 집단 학살한 스마랑 참극사건이다. 일본군이 증파되면서 현지인 2000명이상의 인도네시아인, 일본인 460명이 희생된다.
1953년 5월20일 수카르노 대통령은 이때 희생된 인도네시아 청소년 독립투쟁 기념비, Tugu Muda를 건립한다. 또한 일본인들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 1998년 10월 14일 희생자 유족회 와 참전자 협회가 진혼비, Tugu Ketenangan Jiwa (Chinkon no Hi)를 건립한다.
 
3. 국가는 진실을 기억할 의무가 있다. 

스마랑 5일 전투의 다른 기억을 다큐멘터리처럼 기념비로, 진혼비로 생생하게 살려내고 있다. 라왕 세우에도 독립투쟁 때 희생된 기념비가 정화장군의 위엄이 그대로 서린 잘 보존 개조된 정화 사원에 오면 정화의 북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희생된 조선인 위안부소녀와 고려독립청년당의 진혼비나 표지석이나 입간판이라도 서 있었더라면 가슴에 떠다니는 우리의 아픔이 덜했을까. 정서운 할머니의 말이 떠오른다. “조국이 힘이 없어 끌려간 것인데, 부끄러우려면 우리를 끌고 간 일본이, 그리고 조국이 부끄러워야지. 나는 부끄러울 것이 없습니다.”
우리들의 젊은 그대들은 인도네시아 현대사에 과연 무엇이었는가. 그리고 야만적인 전쟁의 광기 속에서 조선인 소녀들이 성노예로 끌려가 강간을 당하고 있을 때 조국은 그들에게 과연 무엇이었는가. 국가는 진실을 기억할 의무가 있다. 

성요셉성당의 종소리가 탐방 시에도 젊은 그들을 위해 울렸다. 그날 암바라와 의거 때처럼. 암바라와 성은 침묵의 증인이 되어 조선인 소녀들의 처절한 삶을 어두운 역사를 품고 있었다. 탐방 내내 죽은 역사에 바치는 ‘레퀴엠’ 이 흐르고 있었다.
 
<암바라와 의거가 시작된 성요셉성당>

4. 역사의 진보

자랑스러운 역사든 부끄러운 역사든 과거를 있는 그대로 후세에 가르쳐야 한다고. 기억하고 기록해야 한다고 외치며 열띤 논쟁을 하며 아파했던 탐방 회원들의 이름을 불러봅니다.
한인100년사 위원장, 총괄, 편집·집필 위원들 ㅡ김문환선생님, 박재한 한인회장, 신성철 대표, 채인숙 작가, 조연숙 편집장ㅡ, 최미리 연구원부원장, 최경희 서울대아시아연구소 선임연구원, 김민성 스프링필드11학년생, 그리고 현지에서 많은 도움을 주신 김소웅 전스마랑한인회장, 이명호㈜AMM상무, 장영민 웅아란가나안신학대학교수, 인도네시아여교사, 안나양, 그리고 몇 번이나 다녀왔던 암바라와 현장을 함께 하고 새벽에 다른 취재 현장으로 달려가던 한국일보 고찬유 기자, 특히 암바라와 유적지를 열정적으로 설명해 주던 이태복 시인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한국에서도 ‘위안부’ ‘강제징용’ 문제를 둘러싼 지식인들의 ‘담론’ 공방과 ‘정치적’ 해석은 진실과 역사인식을 놓치지 않기 위해 진행되고 있다. 그날 우리 탐방회원들은 역사의 진실에 다가가고 전쟁의 고통과 여성의 피해는 인권과 평화 문제로 자각되어야 한다는 역사의 진보에 이르렀다. 그리고 표지석을 세워 위안부 여성들의 아픔을, 고려독립청년당의 정신을 잊지 않고 올바른 역사인식을 정비하는 새로운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결론에 이르렀다.

에필로그
문정희 시인의 시, 「겨울사랑」처럼. “눈송이처럼 너에게 가고 싶다. 머뭇거리지 말고 서성대지 말고 숨기지 말고 그냥 네 처절한 생에 뛰어들어 따스한 겨울이 되고 싶다.” 따스한 100년이 되고 싶다. 새로운 100년이 되고 싶다.
역사를 대하는 엄중함으로.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의미가 되고 싶다.”
 
*참고자료: 김문환 『적도에 뿌리내린 한국인의 혼』
 한국일보 고찬유 기자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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