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인니 문화 연구원 [칼럼 1] ‘자카르타 역사 연구팀’ 출범에 부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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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카르타 역사 연구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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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인회 한인니문화연구원 자카르타 역사 연구팀 ①
‘자카르타 역사 연구팀’ 출범에 부쳐
사공경 (한인니문화연구원장)
한 역사가는 말했습니다. “과거를 알려고 하지 않는 자는 자기 자신을 알 자격도 없다.” 자카르타에 발 딛고 사는 저 스스로에게 물어봅니다. 너는 자카르타를 얼마나 알고 있느냐고. 자카르타의 역사, 문화, 예술에 대한 이해와 감상은 이 도시를 삶의 터전으로 삼고 있는 우리들의 의무입니다.
역사가 없는 도시는 뿌리가 없다
자카르타(옛, 바타비아)는 17세기부터 18세기 중반까지 ‘동양의 진주’라 불릴 만큼 도시 계획이 잘되고 아름다운 도시였습니다. 자바해는 물론 인도양의 무역항 역할을 하던 자카르타는 세계적인 항구 도시로서의 면모를 갖추어 왔습니다.
이곳에서 문화적, 인종적, 종교적 배경이 다른 이들이 수 세기에 걸쳐 수많은 교류와 왕래를 해왔습니다. 현재 자카르타 거주민들 중 대다수는 자카르타 원주민인 브따위 족이 아닌 인도네시아 다른 섬이나 다양한 국가로부터 온 이민자들입니다. 그들은 피부색과 언어가 서로 달라도 친근하게 어울려왔으며 이 도시 위에서 다양한 국적의 2세들이 태어나고 성장해 왔습니다.
▲ 1780년경 네덜란드 동인도의 수도 바타비아, 현재 북부 자카르타 (출처: 위키피디아)
1990년대 초반 이후 줄곧 옛 도시 ‘꼬따 뚜아(Kota Tua)’에 대한 연구는 저에게는 오랜 숙원이었습니다. 자카르타에 사는 우리가 언젠가 꼭 해야 할 일이라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수 백 년의 역사를 안은 채 허물어지고 버려진 자카르타의 옛 건물들의 자취를 따라가고, 그곳에 새겨진 흐느끼는 이야기를 꺼내어 들려주는 일은 가슴 뛰는 일이었습니다. 역사적, 건축학적 가치를 지닌 오래되고 아름다운 유적지는 그 어떤 석학들의 논문이나 학자들의 분석보다 더 친근하고 구체적이며, 자카르타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생각해왔기 때문입니다.
저는 1997년부터 14년간 자카르타에서 교사로 근무하면서 이 땅에서 외국인으로 살아가는 한국 학생들에게 무엇을 가르칠까 고민했습니다. 한국 역사는 당연히 알아야 하겠지만, 너희들이 몸담고 있는 이 땅의 역사와 문화를 외면해선 안 된다고 늘 말해왔습니다.
‘존재한다’라는 뜻의 영어 ‘exist’는 ‘밖에 서 있다’라는 뜻입니다. 새롭고 낯선 곳에 서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존재감을 느끼고 되고, 그것으로 우리는 정체성을 재확인하게 됩니다.
누군가 사랑하고 싶을 때 꼬따 뚜아에 갔다
1990년에 자카르타에 도착했습니다. 그때 우리 교민들은 바틱과 한약을 사려면 글로독에 갔습니다. 뭐가 그리 무서웠을까. 꼭 몇 명이 같이 다녔습니다. 복잡한 글로독에서 한약, 말린 해삼 등을 사서 돌아갈 때, 눈앞에 ‘카페 바타비아’라고 적힌 녹색 차양이 보이고, 양쪽에 와양박물관과 역사박물관이 보이는 차도를 지나야 했습니다. 2004(~2006)년 파타힐라 광장을 확장하면서 와양박물관과 역사박물관 사이의 차도와 카페 바타비아 앞의 좁은 도로는 없어졌습니다. 당시는 번잡하고 구질구질한 거리였습니다. (2차 확장공사, 2014~2015)
순다 끌라빠 지역도 같이 가고자 하는 사람들이 거의 없었습니다. 특히 항구 쪽 뱃사람들은 사납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자카르타의 출발지가 순다 끌라빠라는데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잠깐 내려 보자고 해도 모두들 여기는 위험한 곳이니 빨리 통과해야 한다고 말했으며, 실제로 주차할 곳도 마땅치 않았습니다.
▲순다 끌라빠 항 (사진=사공경)
몇 년 뒤, 혼자 옛 도시에 갔습니다. 웅장하고 튼튼해 보이는 역사박물관은 다른 세상 같았고, 시간의 흔적을 고스란히 보듬은 카페 바타비아에는 1800년대의 낭만이 숨 쉬고 있었습니다. 순다 끌라빠 항에는 몇 세기 동안 사용했던 범선 삐니시가 그림처럼 정박해 있었습니다. 그날을 나는 잊지 못합니다. 삐걱거리는 나무다리 위를 달려서 나에게 안기던 수상가옥의 아이들. 물속에 그림자를 빠뜨리고 있는 집들. 집 그림자 속으로 스티로폼으로 만든 배를 타고 잠겨드는 아이들, 저 멀리 바다에 묶여 있던 배들, 한 겹 망사로 짜여진 영혼의 빨래가 펄럭이던 그곳을. (지금은 루아르 바땅 수상가옥들이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루아르 바땅 (사진=사공경)
그동안 숱한 어려움 속에서도 335회의 문화탐방이 진행되었습니다. 그 문화탐방의 첫 번째 장소가 꼬따 뚜아였습니다. 1999년 4월 16일이었습니다. 꼬따 뚜아, 100번은 더 가지 않았을까. 가끔 제 아이들에게 이야기합니다. 엄마 죽으면 꼬따 뚜아에 묻어달라고. 언제나 그곳에는 무지개가 걸려 있었으니까, 영혼의 젖줄이 흐르고 있었으니까.
누군가 사랑하고 싶을 때 꼬따 뚜아에 갔습니다. 그곳에는 민초들의 아픔이 있고 역사의 바람이 불었습니다. 시대의 향기와 민족의식의 색깔이 있었습니다. 삶의 물결과 영롱한 과거의 신비들이 나를 따사롭게 감싸주던 옛 도시. 마음이 무너질 때 저는 그곳에 갔습니다. 몇 세기의 소멸의 시간이 문화의 아름다운 나신을 보여주는 그곳으로 달려갔습니다.
오늘도 옛 건물들이 늘어선 파타힐라 광장에서 이곳을 흘러간 수많은 사람들을 생각합니다. 꼬따 뚜아의 한 모퉁이에서 외국인들에게 마냥 친절하기 만한 순박한 인도네시아인들의 천성을 새삼 들여다봅니다. 빼앗기는 줄 모르고 함께 살아보려 했던 착한 민족은 수 백 년을 잔인하게 착취당하면서도 내 조국의 깃발을 되찾기 위해 스콜처럼 부서지며 이 땅을 지켰습니다. 그래서 외국인으로 살아가고 있는 저는 이 도시에 미안하고, 아픔을 견디어 낸 인도네시아인들이 살고 있는 자카르타가 아름답습니다. 그리고 우리와 같은 아픔을 겪은 그들이 측은하고 사랑스럽습니다.
▲ 구 시청, 파타힐라 광장(사진=사공경)
긴 역사를 지닌 자카르타는 각자의 마음속에서 스토리를 덧칠하면 더욱 의미 있는 도시로 만들어집니다. 새롭게 출범하게 되는 한인니문화연구원의 ‘자카르타 역사 연구팀’은 자카르타의 출발점인 순다 끌라빠 항구(Pelabuhan Sunda Kelapa), 전망대(Menara Syahbandar), 동인도 회사의 창고였던 해양박물관(Museum Bahari), 루아르 바땅 마을(Kampung Luar Batang), 동인도 회사의 조선소(VOC Shipyard), 올라가지 않는 도개교(Jembatan Pasar Ayam), 잘란 깔리 브사르(Jalan Kali Besar)에 있는 오래된 집들, 빨간 상점(Toko Merah), 지금은 없어진 어시장(Pasar Ikan)터, 그리고 옛 도시인 파타힐라(Fatahilah) 광장, 역사박물관, 미술 및 도자기박물관, 와양박물관, 꼬따 역(Stasiun Kota), 시온 교회(Gereja Sion) 등의 이야기를 전하려고 합니다.
연구팀은 너무나 오랜 시간 짓밟히고 찢기며 달려온 자카르타의 발자취를 더듬어 보고, 숨겨진 보물과 같은 그리움을, 자유의 위해 투쟁한 이야기를 들려주려고 합니다. 그동안 자카르타를 연구한 사람들은 주로 유럽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정복하고 착취한 땅이었지만, 땀방울 맺히도록 이 땅의 모습을 글로 그림으로 남겨 놓았습니다. 어느 독일인 역사가는 아버지와 아들이 대를 이어 평생을 자카르타의 역사 연구에 바치고 최근 생을 마감했습니다. 우리도 자카르타의 역사 연구에 미약하나마 동참하려고 합니다.
영어, 인니어로 적혀진 사료들과 국내외 발표된 논문 및 저서들을 분석하고, 현장을 발로 탐방하며 인도네시아인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사진에 담아 기록으로 남기겠습니다. 정기칼럼으로 그 결과물을 여러분에게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땅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이고 책임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참고문헌: 『Historical Sites of Jakarta』 by Adolf Heuken S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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