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3] 시간의 강물이 되어 흐르는 도개교 -꼬따 인딴 > 한인니 문화 연구원

본문 바로가기

팝업레이어 알림

팝업레이어 알림이 없습니다.
사이트 내 전체검색

7c5f0da401471120b06cf4764b5dabae_1671380458_6544.png

한인니 문화 연구원 [칼럼 3] 시간의 강물이 되어 흐르는 도개교 -꼬따 인딴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자카르타 역사 연구팀
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10,176회 작성일 2020-03-19 17:19

본문

 
시간의 강물이 되어 흐르는 도개교 -꼬따 인딴

조인정 (역사연구팀 연구원/ 아트마자야 가톨릭대학교 다르마시스와 장학생)
 
 
프랑스의 도시 아를 (Arles)을 찾은 후기 인상파 화가 빈센트 반 고흐는 형형색색 자연의 팔레트로 색을 입히며 랑그루아 다리의 아름다움을 즐겨 그렸다. 고흐의 도개교가 그가 보았던 끊임없이 변화하는 빛의 상징이었다면, 깔리 버사르 (Kali Besar)강의 도개교 꼬따 인딴 다리(Jembatan Kota Intan)는 끊임없이 변화해왔던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이라는 자카르타 역사의 상징이다.
 
와양 박물관에서 나와 북쪽으로 600미터, 약 7분을 걷다보면 네덜란드 식민지 시절에 지어진 3개의 도개교 중에 유일하게 현존하는 도개교를 만나게 된다.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골든게이트나 영국 런던의 타워브리지의 웅장함에 감탄했던 사람이라면 길이 30미터, 폭 4.43 미터의 도개교의 작은 몸집에 어쩌면 실망할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 작은 몸집에도, 400년이라는 시간의 흐름과 칼리 버사르 물결 안에서 도개교는 자카르타 흥망성쇠의 역사를 묵묵하게 함께 했다. 자카르타에는 1621년 이전에 지은 건물이나 구축물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이 도개교는 역사적인 가치가 상당하다.

▲ 마지막 남은 도개교. Jembatan Kota Intan  원래 자카르타에는 세 개의 도개교가 있었다.
400년의 오래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사진=자카르타역사연구팀)
 
암스테르담과 비슷한 도시 디자인을 구획하고자 했던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Vereenigde Oostindische Compagnie, VOC)는 운하와 더불어 1628년 이 도개교를 건설했다. 바타비아로 향신료를 나르는 작은 배들이 드나들 때 이 다리는 들어 올려졌다. 처음에 건설되었을 때 이 다리는 영국 요새의 근처 동쪽에 지어져 네덜란드 요새까지 연결하는 역할을 했기에 ‘영국 다리 (Engelse Brug, England Bridge)’로 자랑스럽게 소개되었다.(1628) ‘닭 시장다리 (Jembatan Pasar Ayam, 네덜란드어로 De Hoender Pasarbrug)’라고도 불렀는데(1630), 이는 다리가 닭과 채소를 파는 시장과 근접해서였다.
 
4세기 동안 시대의 변화를 겪으며, 다리 또한 몇 번의 붕괴와 재복원을 거쳤고 당시의 상황에 맞게 명칭도 바뀌었다.
 
1628-1629년 사이, 반튼(Banten)과 마따람(Mataram) 왕국은 바타비아 성을 공격했는데 그 때 다리는 붕괴되었다. 1년 후 네덜란드인들은 다리를 다시 재건축했고 새롭게 지어진 다리를 큰 나무를 일컫는 ‘Grote Boom 다리’로 불렀다. 네덜란드 Dirk Teeuwen교수에 따르면, 세관 심사 단속을 위해 바타비아 식민지 관세청 건물 옆에는 크고 육중한 기둥이 칼리 버사르 운하를 가로질러 놓여있었다고 한다. 새롭게 지어진 다리가 ‘큰 나무 다리’로 불리게 된 이유는 그 기둥이 다리 부근에 놓여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그는 설명한다. 참고로 바타비아 식민지 관세청 건물의 이름도 Grote Boom 이었다.

다리는 후에 홍수와 해수부식으로 망가졌고 1655년 보수공사를 거쳤고, 다리는 중앙다리 (Jembatan Pusat, 네덜란드어로 Het Middelpunt Brug)라고 불려졌다. 이는 다리 가까이에 바타비아의 중심인 시청(현 역사박물관)이 위치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후 19세기 말 빌헬미나 여왕 (Wilhelmina Brug)의 재위가 시작되었을 때는 ‘빌헬미나 다리 (Jembatan Wilhelmina, 네덜란드어로 Wilhelmina Brug)’로 불리기도 했다.
 
1938년 4월, 교량의 모습과 건축 양식은 그대로 유지한 채, 배의 동태를 감시하고 홍수로부터 예방을 위해 다리는 도개교로 재건축되었는데, 빌헬미나 여왕의 딸이자 후임자였던 줄리아나 여왕의 이름을 따서 ‘줄리아나 여왕 다리 (Jembatan Ratu Juliana)’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인도네시아 독립 선언 후부터 현재까지 다리는 ‘꼬따 인딴 다리 (Jembatan Kota Intan)’라고 부르는데, 이는 바타비아 성 요새의 명칭에서 유래된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바타비아 성을 ‘다이아몬드 요새’라고 불렀다. 인도네시아어로 ‘intan’은 다이아몬드를 뜻한다.
 
이렇게 명칭이 변경되는 것은 특정 목표나 의도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주변의 랜드 마크가 무엇인지에 따라 명칭을 언급하는 사람들의 습관 때문이다. 허나 바타비아 성 요새는 1624년에 만들기 시작했고, 1800년대 초에 현 모나스 부근으로 옮긴다. 독립 후 바타비아 성의 명칭을 다시 부르는 것은 필자로서는 아이러니다. 오랫동안 ‘꼬따 인딴’으로 불렀기 때문일까.
 
▲ Jembatan Kota Intan 1900-1940 (출처 Wikipedia) 
 
네덜란드인들은 왜 이토록 다리에 집착했던 것일까. 이는 그들의 수도인 암스테르담의 지형학적 특징에 순응하여 다리를 건설했던 것에서 비롯된다. 암스테르담에는 약 90개의 섬이 있었고, 운하의 길이가 100킬로미터가 넘는 것이 많았다. 그들은 이러한 섬과 복잡한 운하망을 연결하기 위해 약 1,500개가 되는 다리를 건설했던 것이다. 특히, 17세기 네덜란드 황금시 (Grachtengordel)로 알려진 도시 주변은 세 개의 주요 운하 Herengracht, Prinsengracht 및 Keizersgracht가 동심원 벨트 형태로 에워싸고 있다. 운하 주변에는 1,550 개의 기념비적인 건물도 있으며, 도시 Prinsengracht, Keizersgracht, Herengracht 및 Jordaan 또한 운하로 둘러싸여져 있다. 암스테르담 운하 구역은 2010년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에 등록되었으며, 암스테르담은 현재까지도 물과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는 고풍스러운 건물들을 선보이며 "북쪽의 베니스"로 세계 여행객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 자카르타 도개교를 배경으로 자카르타 역사 연구팀 (사진=자카르타역사연구팀.2020.3.7)
 
자카르타 주지사 알리 사디낀 (Ali Sadikin)은 1972년 9월 7일, 수많은 이름으로 불렀던 이 다리를 문화유산으로 지정하였다. 이처럼 이 다리는 자카르타 시 소유이고, 역사적 가치가 있기 때문에 쉽게 허물지 않고 원형을 유지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1980년대에는 노면을 아스팔트로 고정하여 도개기능을 중단하여 관광지로 운영하였고, 2000년대 다시 이 다리를 재복원하였다. 2019년 7월에는 약 29억 루피아(한화 2억 정도)를 투자하여 재복원을 하였다.
 
2020년 3월, 바타비아인들의 발자취를 온몸으로 느끼기 위해 방문한 그 곳에서 나는 역사와 현실 사이에서의 괴리감에 빠졌다. 역사는 분명 내게 말했다. 그 곳에서 물결이 흘렀고, 사람과 물자가 흘렀고, 문화가 끊임없이 흘렀다고. 도개교는 유럽과 바타비아 사람과 사람을 연결했으며, 도개교의 올라감은 새로운 유럽과 바타비아의 문화교류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었음을.
 
하지만 2020년 현재, 꼬따 인딴 다리의 존재 가치는 자카르타인들의 삶에서 망각된 듯싶었다. 철근으로 지어진 교량 옆에서, 도개 기능을 상실한 꼬따 인딴 다리는 마치 날개가 묶여 더 이상 비상할 수 없는 새 같았다. 다리 밑 더러운 물과 널브러진 쓰레기들은 썩은 냄새를 풍겼다. 과거 향신료를 나르던 배가 다녔던 그 운하는 이제 환경미화원들이 작은 배를 타고 쓰레기를 수집하는 길목이 되었다. 카메라 렌즈가 향한 다리 밑은 노상방뇨 포착의 순간이었고, 악취와 민망함을 느끼며 나는 역사의 깊은 향기를 느낄 여유 없이 그 곳을 떠나야 했다.
 
떠나는 발걸음도 잠시 꼬따 인딴 다리 옆 하얀 기둥에 적혀 있는 글자 “No 21”이 내 시선을 사로잡았다. 한참 바라보다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검색했다. 바타비아 사람들은 교량 또한 집이나 사옥과 같이 건물 한 채로 여겼기에 고유 번호를 부여했다고 한다. 그랬다, 자카르타 현대인들의 혹독함과 망각에도 꼬따 인딴 다리는 자카르타의 한 공간, 자카르타인들 삶의 한 공간이었던 것이다. 다만 과거와는 다른 공간의 의미로서 재해석 된 채. 시간의 흐름 속 꼬따 인딴 다리는 여전히 그리고 영원히 변화하는 자카르타의 상징으로 기억될 것이다.
 
▲자카르타 도개교 위에 선 필자 뒤로 운하 깔리 브사르가 보인다 (사진=자카르타역사연구팀)
 
 
-주소: Jl. kali besar timur I 에서 kali besar를 가로 지름
-감수: 사공 경
 
*참고자료:
-Azizah Alfi, 「WISATA KOTA TUA: Kenapa Jembatan Intan Bernomor 21」《Newspaper Article》(2016)
-「PEMPROV RESTORASI JEMBATAN KOTA INTAN」 Webpage,《Enjoy Jakarta》(2019)
-사공경, 「올라가지 않는 도개교: 닭 시장 다리」 《자카르타 경제신문》(2013)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Copyright © PT. Inko Sinar Media.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