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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인니 문화 연구원 [칼럼6] 얀 피에터스준 코엔(쿤) (Jan Pieterszoon Co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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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카르타 역사 연구팀
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10,670회 작성일 2020-04-09 1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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얀 피에터스준 코엔(쿤) (Jan Pieterszoon Coen)
 
정윤희 (한인니문화연구원 부원장)
 
"인도네시아인들은 네덜란드 식민통치기에 악명 높았던 쿤 총독을 마타람 비밀결사단이 암살하고 그의 머리를 이모기리 왕실 묘지 계단에 묻어놓았다는 전설을 믿는다. 죽은 쿤 제독의 머리라도 밟고 지나가고 싶다는 인도네시아인의 한이 느껴진다. " 


바타비아를 설립한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는 포르투갈과 스페인보다 한발 늦게 인도양에 진출한 만큼 향신료 무역의 확실한 기지를 만들기 위해 더 나은 중앙 본부를 원했다. 쿤은 1610년에 창고를 설립한 자야카르타(Jayakarta/현 자카르타)로 관심을 돌렸다. 그리하여 자야위카르타(Jayawikarta) 왕자와 맺은 협약을 무시하고 1618년에 나무로 만든 네덜란드 창고를 전쟁을 위한 견고한 요새로 개조하면서 자야카르타 정복을 준비를 하였다. 왕자의 궁에 일부러 포탄을 쏘고 대포거리를 시범중이라는 명목을 내세워 되풀이 하는 형식으로 화를 돋구어 자야위카르타 왕자의 선공격을 기다렸다. 시작은 쿤의 계획대로 순조로웠으나 영국이 자야카르타를 도왔고 쿤은 열세에 몰려 네덜란드로 지원군을 요청하러 떠났다. 그 사이 영국이 동인도 회사의 소유권을 잠시 가지게 되었다.
 
중립외교 정책을 펼치는 것을 시기한 반뜬(Banten)술탄국의 라나망갈라(Ranamanggala) 왕자는 결국 자야위카르타 왕자를 죽이고 네덜란드와 손을 잡는 듯 했다. 네덜란드인들은 값나가는 상품들을 라나망갈라에게 제안하여 환심을 사는 듯 했지만, 이미 그들의 요새는 다국적 군대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특히 일본, 독일, 프랑스, 스코틀랜드, 덴마크, 벨기에 군들을 고용했다. 이로써 네덜란드는 영국에 밀렸던 자신들의 입지를 굳히고 활기를 얻는다. 피도 눈물도 없었던 쿤은 천여 명의 군대를 동원하여 1619년 자야카르타를 완전히 무너뜨리고 동인도 회사의 중앙본부이자 식민지배의 수도인 바타비아를 설립한다.
 
<바타비아 지도(좌):구글이미지  /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 로고 VOC(우): 구글이미지 >
 
바타비아(Batavia) 라는 이름은 네덜란드 인들의 조상인 튜턴(Teuton)족, ‘바타비안(Batavian)’을 기리고자 한 것이다. 이후 300년 이상(1619-1942) 자야카르타는 ‘바타비아’로 불리우게 된다. 쿤제독은 사실 바타비아라는 이름 대신에 자신의 고향인 훈(Hoorn)의 이름을 따서 니유 훈(Niew Hoorn)으로 짓고 싶어했다고 한다. 바타비아가 회계사 출신이었 던 쿤에 의해 만들어진 도시라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반다제도 학살
쿤의 포악함과 잔인함은 그가 네덜란드에서 가장 탐냈던 반다제도에서 드러난다. 1614년에서 1618년 사이에 쿤은 말루꾸(Maluku)제도의 반다 섬(Pulau Banda)에서 정향과 육두구 독점을 확보했다. 하지만 반다 주민들은 동인도 회사와의 계약에도 불구하고 향신료를 영국에 판매하여 네덜란드와 마찰을 일으키고는 했지만, 뭔지도 모르는 서류에 서명하고 불이익을 당하는 원주민들로서는 영국인들과 교류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당시 반다제도의 술탄(지역 지도자, 왕을 의미/Sultan)은 쿤이 내민 네덜란드어로 쓰여진 알 수 없는 서류에 서명을 한 일방적인 계약이였다. 또 하나의 비극은 이 서류가 나중에 반다 섬이 네덜란드의 식민지임을 나타나는 증서로도 활용되었다는 것이다.
 
 
 <반다제도 섬>
 
지도에서 너무 작아 확대 하고 또 해야 보이는 아주 작은 반다 섬은 육두구(넛맥)의 원산지이라는 이유만으로 많은 아픔을 겪어야 했다. 결국 네덜란드는 반다 섬과 영국과의 지속적인 교역에 위협을 느끼고 네덜란드 본토의 주요 결정자들인 17인 위원회가 1621년 암보니아(Amboyna/지금의 암본섬/Pulau Ambon) 포함한 반다제도의 정복을 지시한다.
 
쿤 총독이 지휘한 이 정복 작전은 19척의 함대와 1,600여 명의 군인 그리고 300여 명의 아시아와 일본 용병들이 일으킨 학살로 ‘반다 대학살’ 또는 ‘암보니아 대학살이라고 불린다. 당시 수세에 몰린 오랑까야 왕족(Orang kaya)은 개인의 자유와 이슬람 종교의 자율성 권리를 지켜주는 조건으로 쿤과 평화 합의를 하였다.
 
그러나 쿤은 약속을 지키지 않고 800여 명의 왕족들에게 음모를 씌워 체포하고 항복을 강요하고 바타비아로 보내어 노예로 만들었으며 군대를 동원해 섬을 휩쓸고 마을을 파괴했다. 황폐화 된 마을 원주민들에게 동인도 회사를 위해 일하도록 강압하였다. 그와중에도 몇 달 동안 원주민들은 최선을 다해 대항하였고 굶주림으로 죽거나 항복하기보다는 절벽에서 뛰어 내리는 것을 선택한 사람도 많았다.
 
<반다 대학살 일본 용병삽화: 구글 이미지>
 
쿤의 발표에 따르면 약 2,500명의 원주민이 사망했다고 전해지고, 다른 자료에서는 15,000명의 주민 중 살아남은 사람은 약 1,000명에 불과하다고 전해지기도 한다. 현대 학자들은 반다제도 원주민 인구의 90퍼센트가 살해되거나 노예가 되었을것이라고 추정한다. 한 유투브 영상에서 네덜란드인이 역사를 찾아 반다 섬을 방문한 장면을 보았다. 억울한 침략을 당한 그들은 추모비를 세우고 묘비에 새겨 그날의 참옥함을 기억하고 있었다.
 
학살의 결과로 반다 제도는 인구가 지나치게 감소되었다. 동인도 회사는 섬을 생산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섬에 사람들을 보냈는데 주로 인도네시아, 인도, 중국 연안에서 데려온 노예들이었다. 노예에 대한 대우가 참혹하여 다시 인구가 줄어들어 이를 보충하기 위해 매년 200명의 노예를 충원했다고 한다.
 
이 학살 과정에서 네덜란드인과 영국인과의 마찰도 있었으나 쿤은 무자비한 그의 성격대로 고문을 하며 거짓 진실을 받아내어 물리친다. 쿤은 자바 남쪽 바다까지 동인도 회사의 소유임을 정의함으로써 영국외 다른 국가가 자바 영토에 대한 관할권을 주장하는 것을 전혀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수많은 원주민들이 살해되고 마을과 배가 불탄 이후 살아남은 원주민들은 다시 한번 알 수 없는 종이에 서명했다. 그 내용은 이제 말루꾸 제도의 섬들은 네덜란드의 영토이고 그들은 영원히 네덜란드의 지배를 받게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영국 및 다른 국가들이 넘 볼수 없는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바타비아를 이은 두번째 영토가 탄생했다.
 
쿤의 죽음에 얽힌 이야기
<와양 박물관 1층에 있는 쿤 총독 묘비(좌) / 이모기리 왕묘로 가는 계단: 구글 이미지(우)>
 
두번째 총독 재임기였던 1629년 9월 21일, 쿤 총독은 마타람 술탄국의 2차 공격을 받은 후 급작스러운 사망을 맞는다. 공식적으로 콜레라로 사망했다고 기록하지만 후에 파타힐라의 쿤의 묘 이장식에서 쿤의 시신을 보지 못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모기리(Imogiri)는 인도네시아 중부 자바 족자카르타(Yogyakarta)의 왕실 묘지이다. 이 곳에서는 쿤에 관련된 이야기가 서민들 사이에 굳게 믿어지고 있다. 마타람 전쟁시 사망한, 정확히 말하면  마타람 비밀결사단에 의해 처단한 쿤의 머리를 가져와 술탄 아궁의 무덤으로 가는 계단에 묻어 놓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네덜란드 출처는 쿤의 시신은 바타비아 (Batavia)시청 파타힐라광장(Fathaillah Park)에 묻힌 다음 인팬트리 박물관(Infantry Museum)으로 옮겨졌다고 기록되었다.
 
1939년까지, 3세기 동안 죽은 코엔의 무덤을 발굴했지만 아무것도 발견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 어떤자료도 확실히 알 수는 없다.
언론인 알위 샤하브(Alwi Shahab)의 브따위 고전이야기(Betawi Tempo Doeloe/2001년) 책의 내용과 여러 사람의 진술에 따르면 선대부터 내려오는 이야기로 마타람 왕실 정보기관에 의해 전해오며 임무는 쿤의 살해였다고 한다.
<니마스우따라:구글이미지> 
 
1628년 마타람의 첫번째 공격 1년 전부터 계획을 세웠고 왕족의 딸인 니마스 우따리(Nyimas Utari)와 지휘관 마하무딘(Mahmuddin)이 사업가 부부로 위장해 쿤, 그리고 그의 가족들과 가까이 지내도록 계획하였고 쿤과 비즈니스 파트너로 지내면서 기회를 엿보다가 두번 째 마타람 공격 3일째 되는 날, 쿤에게 독술을 마시게 하고 참수하여 성공적인 임무의 증거로 쿤의 머리를 가지고 돌아왔다고 한다. 술탄 왕의 지시로 자바 왕들의 왕묘로 가는 716번째 계단에 머리를 묻었다고 전해온다. 임무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포탄에 사망했다는 우따리 공주의 묘는 아체(Aceh)에 있다.
 
<무르장꿍(=쿤) 와양박물관에서: 사공 경 / 와양극의 무르 장꿍 맨 왼쪽 : Picuki/@abdilahyusuf>
 
또 하나 쿤과 얽힌 이야기는 결론부터 말하자면 300여년 이상의 식민지 시대는 정복자에 의한것이 아닌 원래의 인도네시아인이 통치한 것이라는 것을 말하고 싶어한다.
 
인도네시아 전통 와양 인형극에 등장하는 ‘무르 장꿍’(Mur Jangkung)이라는 인물은 쿤을 의미 한다. 무르 장꿍의 어머니는 순다왕국의 자야카르타 왕실에서 쫒겨난 공주가 낳은 타누라가(Tanuraga)이다. 그녀의 아름다움과 넘치는 매력에 끌린 마타람 왕과 찌르본 왕이 쟁취하려 했지만 실패하고 스페인 배를 타고 나타난 수꾸물(Sukmul)이란 자와 결혼하여 무르 장꿍을 낳았고 그는 유능한 투사로 성장해 고향인 순다(현 보고르)에서 지내다 자야위카르타 왕자의 미움을 사서 순다를 떠나 자야카르타(현 자카르타)에 터를 잡고 자야카르타 왕자와의 전쟁에서 승리한다는 내용이다.
 
쿤은 통치기간 중 비정상적으로 잔인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네덜란드 식민정부는 당시 바타비아 주민들에게 수입의 75%를 세금으로 낼 것을 요구했으며 이를 거역하는 사람은 무자비하게 처형하거나 투옥시켰다. 주로 세금을 내지 못하는 사람들이 투옥됐지만 온갖 잡범, 성추행범, 절도범, 사기꾼, 심지어 미친 사람까지 함께 수감시켜 이곳 수감자는 한때 300명을 넘었다고 한다.
 
일본에서 인도까지 뻗어있는 광대한 해상 제국에 대한 그의 꿈은 결실을 맺지 못했지만, 그의 강력한 행정부는 인도네시아에서 네덜란드 통치를 수립하여 4세기 동안 머물렀다.
 
*감수:최수진
*참고문헌 :  Adolf Heuken SJ 『Historical Sites of Jakarta』(2007)
                 사공경 『자카르타 박물관 노트』(2005)
*참고사이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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