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2회 문화탐방] 인도네시아 한인사 100년사 기획탐방 3 - 이슬람편 > 한인니 문화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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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인니 문화 연구원 [332회 문화탐방] 인도네시아 한인사 100년사 기획탐방 3 - 이슬람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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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탐방기
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7,172회 작성일 2019-12-09 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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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2회 문화탐방 후기] 인도네시아 한인사 100년의 발자취를 더듬다 기획 탐방 3
 
안선근 박사와 함께하는 인도네시아 이슬람 문화 탐방
 
이영미/한인사 편찬위원회 연구위원
 
- 아잔 소리가 아름답게 들리는 날 이슬람을 이해할 수 있음. 종교의 다양성을 수용하는 중장기 청사진을 그려나가길. 각계각층의 교민이 함께하는 탐방 분위기를 ‘한인 100년사’에 실었으면 하는 바람. / 박재한 한인회장

-쉬다가 기도하고 기도를 하다 보니 깨우치게 되는 ‘종교가 아닌 생활’ 이슬람 / 이강현 삼성전자 인니법인 부사장
 
-사랑이라는 보편적 가치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다른 종교와 다르지 않은 이슬람, 주어진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자연스레 형성된 이슬람 문화는 다름의 가치를 깨닫게 해 줌 / 사공경 한인니문화연구원장
 
 
순종과 평화를 뜻하는 이슬람
 
‘이슬람’은 순종, 또는 평화를 뜻하고 ‘무슬림’은 이슬람 신자를 의미한다. 3대 종교 중 가장 늦은 7세기에 출발했지만 불과 100년 만에 아라비아반도는 물론 중국까지 전파됐다. 이슬람교가 이토록 빠르게 각처로 전파될 수 있었던 이유는 이민족에 대한 관용정책 때문이었다. 이슬람은 종교, 정치, 경제, 사회, 문화를 포괄하는 생활 그 자체다. 또 현세의 삶과 내세를 동일시한다.
 
2019년 11월 10일 일요일 오전 10시, 한인니문화연구원(원장 사공경)에 ‘안선근 박사와 함께하는 인도네시아 이슬람 문화 탐방’을 위해 교민 10여 명과 박재한 한인회장, 이강현 삼성전자 인니법인 부사장, 사공경 한인니문화연구원장, 성혜미 연합뉴스 기자, 조현영 자카르타 경제신문 편집장, 채인숙 한인 100년사 수석 편집장으로 구성된 탐방팀이 모였다. 한국인 이슬람학자 안선근 인도네시아 국립이슬람대학(UIN) 교수는 인도네시아 종교 문화의 변천사를 시작으로 전반적인 이슬람 문화를 요약 설명했으며 강의 후에는 이슬람 문화 탐방에 참석하게 된 계기를 공유했다.
 
안선근 박사(54세)는 인도네시아 대학을 졸업하고 현재는 자카르타 소재 UIN 대학과 UIA 대학에 출강하며 한국과 인도네시아 대학 간 교류와 발전에 관한 자문역을 맡고 있다. 인도네시아 전 국회의장 자문역을 역임하였으며 인도네시아 국회, 기업, 학생단체, 여성 단체의 초청을 받아 강연을 펼치고 있다.
 
 
결혼, 사업, 학업, 종교적 매력으로 이슬람교에 입교한 재인도네시아 한국인 100~200명 추정
 
인도네시아의 초기 이슬람에 대해서는 두 가지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첫째, 지금의 남부 수마트라 팔렘방 지역(예전의 스리위자야 왕국) 내에서 상업무역 거래가 이루어진다, 당시 아랍의 예멘족이 초기 인도네시아 내의 향료무역(후추와 육두구)을 위해 머물며 이슬람을 전파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두 번째 가능성은 유럽 내 화란 인류학자들은 인도네시아에 이슬람이 전래된 시기를 약 11세기경으로 추정하고 있다.
 
초기 이슬람이 들어오기 전에 이미 인도네시아에는 토착 종교화된 힌두교와 불교가 자리하고 있었다. 이후 상업이 발전하며 사회 개혁과 변화의 바람을 타고 새로운 종교를 받아들이는 계기가 되었다. 기존의 종교와 달리 토착 원주민들에게 새로운 경제개혁의 변화와 교육 환경을 급속히 변화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인도네시아에 이슬람이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한편 선의적인 믿음보다 정부의 행정적 규제로 이슬람을 선택한 사람들도 있다. 1965년 공산당 쿠테타 이후 수하르토 정부는 국민 모두에게 1인 1종교의 선택(이슬람, 신교, 구교, 힌두교, 불교 중)을 강요했으며 토속신앙을 믿던 다수는 이슬람을 선택했다. 인도네시아에 터전을 잡고 살아가는 한인들이라면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 종교이자 문화이다.
 
 
순다 끌라빠 이슬람사원 (Masjid Agung Sunda Kelapa)
 
탐방팀이 처음으로 찾아간 곳은 중부 자카르타 멘뗑의 순다 끌라빠 이슬람사원이었다. 1960년대에 구스타프 압바스 (Gustaf Abbas) 박사가 주도하여 지어진 순다 끌라빠 이슬람사원 (Masjid Agung Sunda Kelapa)은 일반적인 모스크 건축 양식을 따르지 않고 창의적으로 디자인되었다. 이를 증명하듯 순다 끌라빠 이슬람사원에는 돔, 드럼, 별, 달 등 모스크에서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일련의 상징이 없다. 무슬림을 나타내는 상징적 의미를 담고 있는 보트 모양 건물은 손을 잡고 앉아서 알라의 자비와 사랑을 구하는 기도를 드리는 것을 연상케 한다. 이곳에서 초창기 한국인 무슬림들의 입교식이 이루어졌다.
 
* 순다 끌라빠 이슬람사원은 9,920m² 면적에 4,424명의 신자들을 수용 할 수 있다. 주 예배실, Sakinah Hall 및 Jayakarta Porch로 구성되어 있다. 5 층짜리 사무실 공간을 갖춘 이 사원은 매일 열려 (08.00-20.00 WIB) 있으며 봉사할 준비가 되었다. 후원 단체 Dompet Dhuafa Republika와 함께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경제 활동과 무료 건강 서비스를 수행하는 Baitul Mal Wattamwil이 있다. 이 사원은 사회적으로도 중요한 역할을 하며 영적 강화를 위해서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절인가, 사원인가? 중국인들의 이슬람 선교사업을 위해 시작된 Lautze Mosque
 
돔이나 탑이 없이 빨간색과 노란색으로 장식된 이 사원은 중국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거리의 4층짜리 상점을 1991년 모스크로 변경했다. 무슬림 지적 협회 회장으로 취임한 전 대통령 B. J. Habibie가 중국인들을 인도네시아에 제대로 정착시키기 위해 적극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사원의 벽에는 중국어로 Quran의 내용이 적혀 있다. 2018년 기준 최소 114명이 이 사원에서 이슬람으로 개종했다.
 
 
 
동남아시아 최대의 모스크 이스띠끄랄 이슬람사원(The Mesjid Istiqlal)
 
탐방팀의 두 번째 방문지는 동남아시아 최대의 모스크, 이스띠그랄 이슬람사원이었다. 마침 주일 예배가 진행 중이라 탐방팀은 경내에 모여 예배를 드리는 무슬림들의 신실한 종교의식을 지켜보았다. 남녀가 구분된 참배 영역으로 어머니 대신 아버지 손에 이끌려 예배를 드리는 어린 무슬림의 눈에는 신에 대한 경배보다는 탐방팀에 대한 호기심이 담겨 있었다. 이와 대조적으로 차가운 바닥에 이마를 맞대며 경배를 올리는 안선근 박사의 몸짓에서 무슬림들이 믿는 유일신 알라에 대한 경외와 믿음을 읽을 수 있었다. 이슬람교는 중재자나 대속자 없이 신과 신자의 직접 대화나 교통을 가르친다.
 
1955년 이스띠끄랄 이슬람사원 건축위원회가 형성되었을 때, 수카르노 대통령이 전국적으로 디자인을 공모하여 채택된 안을 바탕으로 1961년 8월에 착공하였다. 만 6년에 걸친 작업 끝에 1967년 9월부터 기도처로 사용되다 1978년 2월 22일에 공식적인 개관을 하였으니 17년 만에 완공된 셈이다. 9.5헥타르의 부지에 세워진 엄청난 규모의 사원은 남녀를 구분해 5개의 영역으로 나눠진다. 이슬람의 성지인 메카 방향으로 세워진 이스띠끄랄 사원은 중요한 종교 축제를 위해 오는 수천 명의 참배자를 모두 수용할 수 있으며 차량 800대를 동시에 주차할 수 있는 주차장이 확보되어 있다. 테라스까지 포함하면 모두 십만 명의 무슬림이 동시에 참배할 수 있다는 이력을 지녔다.
 
사원의 서쪽 벽에 “알라만이 유일한 신이다.”, “알라의 이름은 동정과 자비로”, “알라를 찾기 위해 기도하자”는 세 개의 문구가 씌어 있다. ‘독립’을 의미하는 이스띠끄랄 사원이 120여년 된 가톨릭 대성당과 마주해 건설된 이유는 다른 종교에 대한 포용성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기 위해서이다.
 
 
인도네시아인과 결혼하여 자카르타에 이주한 한국 여성 이민전(76)
 
이후 탐방팀은 늦은 점심을 해결하기 위해 Dapur Babah Elite Restoran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곳에서 인도네시아 속의 한국인 무슬림을 대표하는 이민전 씨와 그의 아들 한인 씨를 만났다.
 
“1960년대 중반 호기심에 찾아간 이슬람교 성원(서울 남영동 소재, 후일 이태원 소재 이슬람 사원이 됨) 주말 예배에서 그를 만났어요. 인도네시아 대사관 직원이던 아미르 파타는 군인 출신답지 않게 자상했어요. 5년쯤 만난 후 1971년에 결혼, 2년 뒤 첫아들 ‘한인(한국·인도네시아 상징 차용)’을 낳고 다시 2년 뒤 딸 ‘코리나(코리아·인도네시아 상징 차용)’를 낳았어요. 1983년 두 아이를 데리고 먼저 자카르타에 이주했어요. 몇 년 뒤 뒤따라온 남편과 함께 행복한 가정을 꾸렸으나 남편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혼자 두 아이를 키웠어요. 한국어와 인도네시아어 통역 일을 하며 경제적으로 어렵지 않았으나, 남편의 빈 자리는 컸어요.”
 
“그와 함께 거닐던 한국의 명소들을 나열하면 끝이 없을 거예요. 언젠가 그를 추억하는 한국 여행을 하고 싶다가도 한편으로는 가고 싶지 않아요. 우리의 젊은 날이 가슴 떨리게 다가올 것 같은 두려움이죠. 그가 세상을 떠난 뒤 30년 동안 하루도 그 사람을 떠올리지 않은 날이 없답니다.”
 
2017년 갑작스레 찾아온 뇌졸중으로 대화와 거동이 불편한 이민전 씨를 대신해 그의 아들 한인이 어머니의 살아온 날을 전했다. 국립인도네시아대(UI) 세무행정학과를 졸업한 한인 씨는 현재 LG이노텍 인도네시아 법인에서 일하고 있다.
 
탐방 팀은 아들이 미는 휠체어에 앉아 등장한 이민전 씨의 쇠약한 몸이 아니라 총명하게 빛나는 그녀의 눈동자를 기억할 것이다.
 
‘한인사 100년 기획 탐방-이슬람편’을 기획진행한 사공경 한인니문화연구원장은 “국적이 다른 남녀가 인생의 동반자가 되도록 매듭을 지어준 곳에 ”평화롭고, 사랑스럽고, 빛이 나는“ 종교 이슬람이 있었다. 하지만 인도네시아인 남편을 이야기하며 빛나던 이민전 씨의 눈동자에서 종교보다는 사랑을 보았다.”고 전했다.
 
 
인간 존엄의 의미와 다름의 가치를 깨닫게 하는 이슬람 문화탐방
 
이날 탐방팀을 격려하기 위해 이슬람 문화탐방에 참석한 박재한 한인회장은 “한정된 만남이 잦은 인생사에 이런 만남이 잦아졌으면 한다. 각계각층의 한인이 함께 참여한 이슬람 문화 탐방의 분위기가 한인 100년사에 고스란히 녹아들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슬람 문화의 교육과 안내를 맡은 안선근 박사에게 크나큰 박수를 보낸다.”는 의사를 밝혔다.
 
1994년 이슬람교에 입교한 이강현 삼성전자 인니법인 부사장은 “이슬람 신자로서 형제로 받아들인 인도네시아에 고마움을 느낀다. 무더운 날씨에 그늘진 곳을 찾는 곳이 마스지드, 쉬다가 기도하고 기도를 하다 보니 깨우치게 되는 ‘종교가 아닌 생활’로 이슬람을 생각해주길 바란다.”고 강조했다.
 
참석자들은 이슬람 경전을 읽지 못해도 이슬람 문화를 이해할 수 있는 혜안을 깨우친 것 같다는 소감을 나누었다.
 
한국인들에게 아직 생소한 종교 이슬람. 사랑이라는 보편적 가치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여타 종교와 다르지 않은 이슬람은 인도네시아에서 사는 한인들에게는 낯설지 않은 종교이다. 이슬람의 어원은 평화이며 신학적으로는 복종을 의미한다. 즉, 유일신인 알라에게 절대복종해 내면의 평화를 얻는다는 사상을 지녔다. ‘사랑’을 중시하는 기독교와 ‘자비’를 강조하는 불교, ‘인(仁)’을 추구하는 유교와 비슷한 맥락이다. 일부가 자행하는 테러와 폭력으로 얼룩진 이슬람에 대한 인식이 변하기 위해서는 무슬림들과 비무슬림들의 변화와 이해가 필요하지 않을까.
 
‘존재하다’라는 뜻의 영어 exist는 ‘밖에 서 있다’라는 라틴어 existo에서 나온 말이다. 두 발을 디디고 있는 곳을 떠나 새로운 곳 혹은 낯선 곳에 다가갈 때 우리는 비로소 존재한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사랑의 또 다른 표현인 이슬람을 찾아 나선 이슬람 문화탐방은 우리에게 인간 존엄의 의미와 다름의 가치를 깨닫게 하는 소중한 하루였다.
 
* 참고자료: 한인니문화연구원 332회 문탐 이슬람 탐방 소책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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