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인니 문화 연구원 인터넷 문학상 / 인도네시아 건달 (특별상 인도네시아예술가 에드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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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네시아 건달
은보라
덥고 습한 기분 나쁜 공기가 전염병처럼 나에게 훅 달라 든다. 싫다. 왠지 병에 걸릴 것 같은 기분에 숨을 참을 수 있을 만큼 참다가 한번에 큰 숨을 들이마신다. 이상 야릇한 냄새가 섞여 들어온다. 자카르타 공항에 내리자마자 국내선 비행기로 재빨리 갈아타야 하는데 방향 감각은 모르겠고 표지판도 제대로 없다. 어쩔 수 없이 사람들이 가는 방향으로 무작정 따라 걸어갔다. 연두색이 섞인 현란한 무늬가 잔뜩 그려진 셔츠를 입은 한 무더기의 사람들. 바틱에 대해서 문외한 이라 아름답다고 느껴지지 않는다. 멀리서 보면 거대한 덩어리의 생물체처럼 뭉뚱그려져서 엄청 시끄러운 소리로 얘기하고 있는 사람들. 소속감이 얼마나 강하다고 다들 똑 같은 옷을 맞춰 입고 이들은 어디로 가는 걸까? 집으로 돌아가는 중인 걸까?
국제 공항 이라면서 에어컨은 어디에 숨었는지, 아예 설치가 안 되 있는 건지 작동을 안 하는 건지, 얼굴은 벌겋게 달아 오르고 서있기만 했는데도 등에선 땀이 끈적거린다. 한국에서 입고 온 청 남방을 벗어 허리에 감고 반팔 티셔츠 차림이 되니 조금 나은 듯 하다. 다시 기다려야만 하는 나라, 느긋해야 하는 나라로 돌아온 그 순간의 내 기억이다.
특정한 종교를 가지고 있는 건 아니었지만 나중에 죽어서는 나무가 되고 싶었다. 하루하루 먹고 살기 위해 뭔가를 열심히 하기엔 너무 게으른 자신을 알기에 다시 태어나긴 싫지만 꼭 그래야 한다면 나무가 되고 싶었다. 아무것도 안하고 하늘만 보고 있고 싶어서. 그런데 여기 와서 생각이 바뀌었다. 내가 그 동안 멀찍이 떨어져서 나무를 보고 있었던 거다.
인도네시아의 나무들은 부지런하다. 부지런히 뿌리를 뻗어가고 어떤 종류는 가지에서도 땅으로 뻗어간다. 끊임없이 무언가를 휘감고 옆으로 이동하는 나무들도 있다. 뿌리 아래쪽에는 나름 갖가지 종류의 벌레들이 살고 있다. 나무를 의지 삼아 또는 먹이 삼아. 각자 살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는 게 애처롭기도 하고 징그럽기도 하다. 내 발 밑에 우글거리는 벌레들과 같이 산다는 건 생각 하기도 싫다. 다시 태어나야 한다면 하루살이로 태어나길 빈다. 그러면 살면서 죄 지을 일도 없고 먹고 살기 위해 노력할 필요도 없고.
애들도 남편도 나 몰라라 팽개치고 비행기를 탔다. 무조건 떠나고 싶은 마음이 너무 컸다. 인도네시아만 아니면 어디라도 좋았다. 한국에 가기로 결정을 하고 여기서 못해본 것들을 원 없이 하고 오리라 다짐했다. 한 시간도 허투루 보내지 않겠다고 빽빽하게 수첩에 계획을 짰다. 첫날부터 숨가쁘게 볼 일들을 해결하고 동선을 생각해서 다음 스케줄을 짜고 꼭 만나고 싶은 친구들에게 전화를 돌리고 가족들과도 짧은 시간에 두 번의 여행계획을 짰다. 3주 동안의 강행군이 힘들었는지 마지막 주에 감기 몸살이 왔다. 그래도 예정된 일정을 취소하고 싶지 않아서 약국에서 약을 사먹으며 버텼다.
부지런히 사진도 찍고 무엇이건 기웃거렸다. 내 사진기에, 머릿속에, 내 눈에 다 담아가겠다는 과욕이 흘러 넘쳤다. 하루쯤은 여유를 가졌어도 괜찮았을 듯 한데 순간 순간을 치열하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지금 생각하면 다시 못 가는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조급했었나 싶다. 한량이나 건달처럼 시간을 낭비하면 돌아와서 후회할 것 같았다. 잘 살고 못 사는 기준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걸으면서 뛰는걸 생각하고 뛰면서 생각은 벌써 다음 할 일에 가 있었다. 지금 하는 일에 집중을 못하고 다음 다음만 생각하고 있었나 보다. 한국에서 남들처럼 바쁘고 정신 없이 살다가 인도네시아에 와서 느슨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게 불안했다. ‘남들은 다 앞서가고 있는데 나만 머물러 있구나 자동으로 난 뒤로 쳐지겠구나’ 하는 생각에 우울했다. 한국에 살고 있는 친구들 혹은 지인들을 보면 자기계발에, 일년에 한 두 번 외국 여행에, 애들은 온갖 체험 학습을 다니고 다양한 경험들을 하며 삶을 누리고 있는데 나만 이렇게 시골에서 아무것도 안하고 시간을 버리고 있구나 생각하면 괴로웠다. 이번 여행으로 나도 즐겁게 잘 살고 있다고 보여주고 싶었다. 그런데 누구에게? 집에 돌아와 한참 후 정신을 차려보니 이런 생각이 났다. 나 누구에게 보여주고 싶었나? 남들에게 멋지고 행복하게 날마다 즐겁고 긍정적으로 보이게 하느라 정작 나 자신을 피곤하게 하고 있었던 건 아닐까?’ 끊임없이 다른 사람의 삶을 곁눈질 하면서 남들이 나보다 더 멋지고 행복하고 잘 사는 것 같다고 상처받고 우울해 했다. 남는 시간에 핸드폰으로 남의 SNS를 보면서 부럽지만 그렇지 않은 척 하면서. 한편으론 나도 이에 질세라 남들에게 행복한 척, 여유 있는 척 하면서.
다시 일상으로 돌아와서 난 이렇게 마음 먹었다. 한량이나 건달처럼 살아보자. 운이 좋아 번잡하고 바쁘게 살아야 하는 한국에서 잠깐 비켜 설 수 있는 시간을 가졌으니 그 시간을 최대한 누려보자고. 천천히 어슬렁거리며 심심한 순간들을 깊이 있게 보내자고.
녹색 창 에서 한량과 건달 이라는 단어를 찾아보았다. 돈 없으면 건달, 돈 있으면 한량 이라는 속담이 있단다. 재미있네. 돈이 없어서 그런가? 한량 보다는 건달이 더 끌리는데? 빈둥빈둥 하는 일 없이 놀기나 하는 사람을 건달이라고 한다. 불교의 ‘건달바’가 어원이다. 건달바는 수미 산 남쪽의 금강 굴에 살면서 제석천의 음악을 맡아보는 신 이었다. 인도에서는 음악을 전문으로 하는 악사나 배우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그러나 우리 나라에서는 옛날에 악사나 배우를 천하게 여겨 할일 없이 먹고 노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부정적인 말이 된 것이다. 게다가 폭력을 휘두르며 남을 괴롭힌다는 뜻까지 갖게 되면서 깡패와 비슷한 뜻으로 쓰이게 된 거다. 그러나 건달은 깡패와 다르다. 나는 건달은 그리 나쁘게 느껴지지 않는다. 건달은 일단, 재미있는 일만 한다. 진짜 깡패나 양아치들은 뭔가 목적을 위해 물불을 안 가리고 달려들지만 건달은 건들건들 재미를 찾고 재미를 느끼는 일만 한다. 게다가 열심히 하지 않으니 별로 지치지도 않는다. 한번 해보고 재미 없으면 다른 거 또 찾으면 그만이라고 쿨 하게 넘긴다. 또 건달은 꼭 일등을 하려고 고집하지 않는다. 주인공이 되어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싶은 생각이 없기 때문이다. 일등을 하려는 생각이 없으니 자신에게나 타인에게나 너그러워질 수 있다. 건달이 건들 건들하며 걷는 모습이 그려진다. 허리가 길어 키가 큰 순박한 사람이 저녁 해 지기 전 천천히 급한 일도 목적지도 없이 골목을 산책하고 집으로 돌아온다. 정갈하게 차려진 밥을 먹고 책을 읽다가 잠자리에 드는 거다.
번잡하고 바쁜 삶에 피곤해 하고 있던 나 자신에게 여유를 주자. 누구랑 경쟁하는 것도 아닌데 일등 할 필요도 없고 누구를 제쳐야 하는 것도 아니고. 그냥 천천히 휴식을 취하거나 골목을 어슬렁거리면서 심심한 순간을 보내자. 키가 큰 편은 아니지만 건달이 되어보자.
집으로 돌아오는 밤, 마중 나온 아들 둘이 한적한 공항에서 “엄마 귀국을 환영 합니다” 라고 핸드폰에 써서 흔들고 있는 모습은 살면서 영원히 잊지 못할 순간들 중 하나이다. 누군가의 말처럼 삶은 목걸이를 하나 만들어 놓고 여기에 진주를 하나씩 꿰는 과정이란다. 인도네시아에서 소중한 추억들로 목걸이를 채워 나가리라. 순간 순간 살고 있는 지금에 충실하자 다시 마음 먹는다. 쉽게 바뀌지는 않겠지만. 스스로에게 예민하게 구느라 그리고 본인이 일 순위인 이기적인 엄마라 신경 써주지 못해도 각자 알아서 크고 있는 아들들, 나중에 놓치고 나서 후회하지 말고 지금에 집중해야 한다는 큰 깨달음을 얻고 돌아온 철없는 엄마를 기다려줘서 고마워.
수상소감
인생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다. 잘못된 방향으로 전속력으로 달려 가는 건 의미 없다. 나에게 맞는 방향을 찾고 나만의 속도로 차분히 전진하고 싶다. 일상의 작은 일들을 허투루 넘기지 않고 귀한 진주로 내 삶이라는 목걸이에 꿰고 싶다.
이번 수상도 내겐 귀한 진주 한 알이 되었다. 아침마다 나를 위해 기도를 해준다고 약속한 분을 따라 나도 아침마다 짧은 기도를 한다. 특정 종교의 그 분이 아닌 인간 세상을 살펴 주시는 그분에게 나의 가족들의 건강과 일상의 안녕을, 그리고 나를 알고 있는 사람들의 건강과 행복을 빈다. 어울리지 않게 시골에서 고생하는 남편과 수다스러워 딸 같은 두 아들들 고맙고 사랑한다.
심사하시느라 고생하신 관계자분들 부족한 글을 읽어 주시고 당선작으로 뽑아주셔서 감사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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