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인니 문화 연구원 제11회 <인도네시아 이야기> 학생부 최우수상 / 나의 우편배달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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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회 <인도네시아 이야기> 학생부 최우수상 한-인니산림협력센터장상
나의 우편배달부
(Karangan)TukangPosSay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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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승헌(ACS, 7학년)
드디어 중학생이 되었다. 중학생이 된다고 엄청난 힘을 가진 초인이 되거나 공부가 쉬워지는 마법 같은 일이 일어나지는 않는다. ‘미흡하다’는 수식어가 붙는 초등학생에서 벗어났다는 것으로 충분하다. 어떤 친구들은 초등학교와 고등학교의 ‘중간에 낀’ 처지라고 투덜대지만, 나는 교복 넥타이를 맨 내 모습이 꽤 마음에 든다.
인도네시아에서 슬기로운 생활을 한 지 7년차. 아기 띠에 젖먹이 동생을 안은 엄마 손을 잡고 수카르노 하타 공항에 내리던 일곱 살 소년의 눈에는 모든 것이 낯설었다. 텔레비전에서만 보던 야자수가 길거리에 즐비했고 낯선 언어로 말하는 사람들의 입술만 보였다.
무엇보다 하루에 두세 시간씩 자동차를 타며 통학을 하는 게 제일 힘들었다. 한국에서는 집 근처의 유치원에 다니며 풀 방구리에 쥐 드나들 듯 문방구와 제과점, 놀이터를 지나 집으로 왔었는데. 얼핏 보면 한국의 시골 풍경을 닮은 인도네시아는 닮은꼴만큼 다른 꼴도 많은 나라다. 잔디밭을 기어 다니는 송충이와 비가 오면 집으로 스멀스멀 집안을 넘보는 거머리까지. 이상하게도 나는 우중충한 하늘을 보면 낯선 땅에 와 있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사람은 환경에 영향을 받는 동물이라더니, 사춘기라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내 마음의 날씨는 꽤 오락가락했다.
두 번의 이사와 한 번의 전학을 거치며 인도네시아 생활이 익숙해질 때쯤 코로나19 팬데믹이 터졌다. 초등학교 시절 가장 중요하다는 6학년을 온라인 수업을 하며 집에서 보냈다. 답답하고 억울했다. 신기하게도 이런 마음은 졸업과 동시에 사라졌다. 그 이유는 바로 내가 좋아하는 외삼촌네서 여름방학을 보낼 수 있게 되어서다.
“눈치가 보여 한국을 못 온다니? 무슨 걱정이야. 외삼촌이 있는데!”
외삼촌한테서 먼저 연락이 왔다. 코로나19로 올해는 한국에 가지 않으려 했었는데. 유례없는 감염성 질병으로 가족 붕괴가 걱정된다는 신문기사를 본 적이 있다. 외삼촌의 사전에 그런 단어는 없나 보다.
한 달의 일정으로 한국 입국 준비를 서둘렀다. 한국으로 가는 길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인도네시아에서 PCR 테스트 검사지를 들고 인천공항에 입국한 날 아침, 엄마의 체온이 37.3도가 나왔다. 한국에 나오느라 신경을 써서 몸살이 났는데도 엄마는 내색 한 번 하지 않았다. 눈사람처럼 하얀 방호복을 입은 사람들을 따라 공항을 빠져나갔다. 여덟 살짜리 남동생의 손을 잡고 엄마와 함께 목적지를 모르는 버스에 탔다. 한참을 달린 버스는 인천공항 검역소에 도착했다.
“절대 나오지 마세요. 참고로 문은 외부에서만 열립니다.”
창문도 없는 좁은 방에 우리 셋만 남겨졌다.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우리를 안심시키는 엄마의 목소리가 떨렸다.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엄마도 불안한 눈치였다.
두 번째 PCR 검사를 하고 결과를 기다렸다. 결과가 나오기까지의 6시간이 6일처럼 길게 느껴졌다.
밖이 어둑어둑해지고서야 음성 판정을 받았다. 부산행 기차에 탄 우리는 머리를 맞대고 곯아떨어졌다. 한밤중이 되어서야 외삼촌 집에 도착했다. 단조로운 회색의 인테리어와 하얗다 못해 푸른 조명이 켜진 집이 그렇게 따뜻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2주간의 격리가 시작되었다.
나의 외삼촌은 우체부다. 세상의 모든 길을 알고 있는 사나이. 아침 7시가 되면 밤새 주차되어 이슬을 머금은 우체국 차량에 하루치 일거리를 싣는다. 멀리 떨어져 자주 만나지 못하는 가족이나 지인에게 보내는 마음과 크고 작은 택배가 트럭에 실린다. 요즘은 손 편지보다 택배 물량이 많다. 열에 아홉은 택배를 보내는데, 간혹 편지를 배달하면 풀밭에서 네 잎 클로버를 발견한 것처럼 기쁘다고 한다.
솔직히 말하면 작년까지만 해도 외삼촌의 일에 무심했다. 지금 보니 외삼촌이 얼마나 힘든 일을 하는지 눈에 보인다. 이 위험한 시국에 자칫하면 코로나19에 걸릴 수도 있는데도 계속 사람들을 만나야 한다. 한 번 이런 생각이 들자, 집에 오는 택배 기사님과 음식 배달을 해주시는 분들이 새삼 고맙게 느껴진다. 나도 철이 좀 들려나 보다.
새벽같이 일을 나가는 외삼촌을 위해 외할머니는 더 일찍 일어난다. 혼자 사는 외삼촌을 위해 할머니는 새벽마다 김밥을 싼다. 외할머니의 정성이 깃든 김밥은 20년도 더 된 낡은 자전거에 실려 외삼촌 집까지 배달된다. 매일 다른 사람을 위해 물건과 소식을 배달하는 외삼촌에게는 외할머니가 ‘고마운 배달원’인 셈이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인데 밥도 제대로 못 먹고 다녀서 쓰겠냐? 너 챙겨주는 색시라도 있어야 내가 맘이 놓이는데...”
이른 아침, 이불을 둘둘 말고 자는데 외할머니와 외삼촌의 대화가 들렸다. 외할머니는 끼니를 놓쳐 가며 일하는 외삼촌이 못마땅한 듯 한숨을 지었다. 잔소리를 늘어놓는 엄마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한번은 새벽길을 달려오다 넘어진 외할머니에게 외삼촌이 역정을 냈다.
“어머니, 왜 사서 고생을 하세요? 요즘 널린 게 김밥 전문점인데. 편의점 도시락도 잘 나와서 그거 먹으면 속이 든든해요.”
“세상이 아무리 달라져 봐라! 밖에서 파는 음식과 집 밥이 같은지. 그 뭐냐, 에아이(AI)? 그게 암만 발전한다 해도 이 어미 손맛은 못 따라온다.”
외할머니는 고집을 피우며 보자기에 꽁꽁 싼 도시락을 내밀었다.
“어머니, 왜 사서 고생을 하세요? 요즘 널린 게 김밥 전문점인데. 편의점 도시락도 잘 나와서 그거 먹으면 속이 든든해요.”
“세상이 아무리 달라져 봐라! 밖에서 파는 음식과 집 밥이 같은지. 그 뭐냐, 에아이(AI)? 그게 암만 발전한다 해도 이 어미 손맛은 못 따라온다.”
외할머니는 고집을 피우며 보자기에 꽁꽁 싼 도시락을 내밀었다.
우체국 쇼핑으로 산 수삼 선물세트를 포장했던 보자기에는 ‘우체국 쇼핑’이라는 글씨가 선명하다. 많고 많은 천중에서 할머니는 왜 하필 촌스러운 보자기를 사용할까. 궁금해 하던 때가 있었다. 지금은 안다. 대견한 아들이 우체국에서 일하는 걸 자랑하고 싶어서라는 걸. 초등학교 2학년 때 내가 받은 국제미술대회 상장과 처음 백 점을 맞은 수학 시험지를 간직하고 있는 엄마처럼.
한 가지 의문이 생겼다.
‘이렇게 바쁜데 외삼촌은 어떻게 점심시간을 쪼개 운동까지 하는 걸까?’
외삼촌의 배달 차량에는 아령 한 세트와 악력기가 실려 있다. 외삼촌의 건강을 책임져주는 ‘듬직한 트레이너’들이라나. 방학이 되어 밤늦게까지 게임을 하다 잠이 드는 나는 점심을 후딱 먹고 낮잠을 자기 바쁘다. 이럴 때 보면 외삼촌과 나는 닮은 점이 하나도 없다.
‘그나저나, 외삼촌은 왜 장가를 안 가는 걸까?’
외삼촌은 쌍꺼풀이 짙고 코가 오뚝하다. 석고상으로 유명한 아그리파 장군을 닮았는데 인기가 없을 리 없다. 석고상처럼 콧대가 무척 높으면 모를까.
인도네시아로 오기 얼마 전의 일이다. 그러니까 내가 일곱 살 때 유치원에 외삼촌이 온 적이 있다. 부모님들이 돌아가면서 직업을 소개해주는 시간이었다. 재무 담당인 아빠가 바빠서 대신 외삼촌이 온 거였다. 잔뜩 심술이 난 나는 얼굴을 찡그리고 있었다. 그러다 앞문으로 들어서는 외삼촌을 보고 깜짝 놀랐다. 기뻐서 눈물이 난 건지 콧구멍이 매웠다. 그날 외삼촌은 예전에 우체부가 메고 다니던 빨간 우편물 가방을 가져와 아이들에게 보여주었다. 우체국과 우체부의 일도 자세히 알려주었다. 내 어깨를 잔뜩 올려놓은 외삼촌은 별일 아니라는 듯 씩 웃어주었다.
인도네시아의 우체국 시스템도 상당히 발달되어 있다. 약 4,000여 개의 우체국이 인도네시아 전역에 산재해 있다. 우편물을 보내면 보통 2~3일 안에 우편물을 받아볼 수 있다. 우편물 배송 시스템을 통해 우편물이 배송되는 경로도 추적이 가능하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물량이 늘어 2021년 6월부터 인도네시아 우체국은 토요일과 일요일까지 문을 연다.
2학년 때 인도네시아의 우체국에 가 본 적이 있다. 다른 나라의 친구에게 종이 편지를 보내는 프로젝트를 위해서 우리 반은 담임선생님을 따라 현지 우체국을 방문했다. 구멍가게처럼 아담한 인도네시아의 우체국을 본 나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외삼촌이 일하는 우체국은 운동장처럼 넓었는데.
허름해 보이는 유리문을 열고 들어가자, 사복을 입은 아저씨와 아줌마가 앉아 계셨다. 유니폼이라도 제대로 갖춰 입었더라면 조금 신뢰가 갔으려나. 책상에는 달랑 컴퓨터 두 대뿐이었다. 과연 내가 보낸 편지가 한국에 제대로 배송이 될 수 있을까, 의심스러웠다.
그 뒤 잊고 지냈는데 한 달 뒤 한국에서 온 우편물을 받았다. 전 세계의 우편배달 시스템은 디지털 코드처럼 잘 연결되어 있었던 것이다. 나는 한동안 유치원 때 단짝이 꾹꾹 눌러쓴 손 편지와 그림을 가방에 넣고 다녔다. 오랜만에 받는 손 편지도 그렇지만 친구와 연락이 닿아 무척 기뻤다. 종잇장처럼 얇은 편지 한 통이 주는 ‘치유의 힘’이란 절대 얇지 않다.
2주 격리는 생각보다 금방 지나갔다. 한 달의 짧은 일정 중 반을 격리로 보냈기 때문에 격리가 풀리자마자 병원 투어부터 했다. 외갓집과 친가 고모 댁을 차례로 방문했다.
그 사이 인도네시아에 코로나19가 심각해지고 인도네시아에 거주하는 한인들의 확진자 수도 백 명을 넘어섰다. 인도네시아의 1일 확진자 수가 3만 명을 넘어 5만 명으로 가파르게 치솟았다. 인도네시아 정부는 코로나19를 통제하고자 외국인들의 입국 금지 조치를 내렸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외삼촌 집에 더 머물게 되었다. 개학을 걱정하는 엄마와 달리 나와 동생은 한국에 더 머물게 되어 기뻤다.
그동안은 한국에 오면 돌아다니기 바빴다. 외삼촌도 늘 바빠서 잠시 얼굴을 마주치는 게 전부였다. 대부분의 시간을 집에서 보내게 되니 자연히 외삼촌과 함께 있는 시간도 늘었다. 밥도 같이 먹고 게임도 하면서 외삼촌과 자주 이야기를 나누었다. 특히 엄마한테 혼날 때 외삼촌이 내 편을 들어줄 때가 좋았다. 하지만 삼촌은 엄마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엄마 편을 들었다.한 날은 외삼촌이 진지하게 말했다.
“승헌아, 너는 인도네시아로 돌아가지 말고 외삼촌하고 같이 살자. 엄마랑 승우만 보내자.”
엄마한테 미안한 말이지만, 진짜로 잠깐 고민했다. 그만큼 외삼촌이 좋다. 그래도 나는 가족과 함께 하고 싶다. 이제 엄마 키를 훌쩍 넘어선 내가 엄마와 남동생을 지켜줄 차례다.
두 달 반이 지나갈 때쯤 입국 금지가 풀렸다. 인도네시아로 돌아가던 날 외삼촌이 공항까지 데려다준다고 말하며 짐을 날랐다. 그동안 삼촌 집에서 몇 번 지내는 동안 이런 말을 한 번도 하지 않았는데. 엄마와 나는 외삼촌을 빤히 쳐다보았다.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외삼촌이 말했다.
“입국 금지로 조카들 고생하는 거 보니 내가 마음이 짠해서 그래. 승헌아, 지금 시간을 낭비하면 나중에 남들 천천히 산책하며 걸을 때 땀나게 뛰어야 해. 중학생 되면 더 열심히 해라.”
그 뒤 침묵이 이어졌다. 그러다 삼촌이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한 달이 금방 가네.”
우리는 외삼촌 집에 세 달이나 있었는데. 세 달을 한 달로 느낄 만큼 외삼촌도 우리와 함께한 시간이 그리 나쁘지 않았나 보다. 기분이 좋아진 나는 말간 얼굴로 되받아쳤다.
“무슨 소리야? 나는 외삼촌 집에 일주일밖에 안 있었는데!”
마음이 통했나 보다. 백미러로 흘끗 뒤를 돌아보는 외삼촌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입국장에서 손을 흔드는 외삼촌을 보는 엄마의 눈가가 빨개졌다. 엄마는 외삼촌이 계속 혼자 살았으면 좋겠다지만 나는 반대다. 내년에는 외삼촌 옆에 웃는 모습이 꼭 닮은 외숙모가 있었으면 좋겠다. 외삼촌이 장가를 간다면 더 이상 한국에 나와서 외삼촌 집에 머물지는 못하겠지만 상관없다. 내 사전에도 가족에 대한 서운함은 없으니까. 혼자가 아닌 둘이 된 외삼촌은 진짜 슈퍼맨이 될지도 모른다.
유리창을 통해 바라본 하늘에는 비행기들이 별처럼 뜨고 진다. 하늘의 길을 더듬으며 세상 어딘가로 향하는 사람들과 소식들. 마음먹었던 것들을 할 수 없어 답답한 지금의 시간은 어쩌면 걸어온 길을 돌아보며 잠시 한숨을 돌릴 기회인지도 모른다. 졸업 후에 새로운 시작이 있듯이 곧 지금의 힘든 시간도 떠나보내게 되리라 믿는다.
<수상소감 / 박승헌(ACS, 7학년)>
행운을 배달해 드립니다
안녕하세요. 2021년 <인도네시아 이야기> 문학상에서 최우수상을 받은 박승헌입니다.
일곱 살까지의 마냥 행복한 기억을 갖게 해 준 한국과 열네 살까지의 힘들지만 추억할 수 있는 기억을 갖게 해 준 인도네시아. 두 나라 모두 저에게는 소중합니다.
책읽기가 중요하다고 강조하시는 어머니 덕에 저희 집 책장은 한글책이 빼곡히 꽂아져 있습니다. 역사만화책과 추리물을 특히 좋아하는 저는 한국에 갈 때마다 여행가방 하나를 책으로 가득 채워 옵니다. 중학생이 되며 아쉽게도 올해부터는 ‘만화책 금지령’이 떨어졌습니다. 시간이 날 때마다 글쓰기를 배웠지만 쉽게 늘지 않는 실력이 속이 상하기도 합니다. 중학생이 되면서 학교에서 ‘국어’ 과목을 정식으로 배우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큰 상까지 받게되어 무척 기쁩니다.
남들은 책을 읽으라는 잔소리를 하지만 저희 어머니는 조금 다릅니다.
“책 좀 그만 읽고 네 할 일을 해!”
학교 공부나 숙제보다 책 읽는것을 좋아하는 저는 늘 이런 잔소리를 듣습니다.
이번 수상을 계기로 제 할일을 다 하고 책을 읽는 버릇을 들이겠습니다. 그리고, 소중한 가족들에게 마음을 표현하는 습관을 들여보려 합니다. 이 스토리의 모델이 되어주신 삼촌에게 감사하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뒤돌아 후회하는 일이 없도록 더욱 노력하는 사람이 되겠습니다. 다시 한 번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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