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인니 문화 연구원 제11회 <인도네시아 이야기>일반부 최우수상 /그들의 이름을 기억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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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회 <인도네시아 이야기>일반부 최우수상 재인도네시아한인회한인이주101주년기념 특별상
그들의 이름을 기억하자
Ingatlah Nama Mereka
Ingatlah Nama Mereka
고찬유(한국일보자카르타특파원, 자카르타)
망자의 이름과 발자취를 반년 넘게 쫓았다. 원고지 240매 분량, 4만7,872자의 기록이 쌓였다. 관련 도서 7권을 읽었다. 의문과 질문은 오히려 늘었다. 듣고 싶었다. 묻고 싶었다. 종국엔 달아나고 싶었다. 그 현장을 마주한 뒤에야 망자는 뇌리에서 살아나 말을 걸었다. 혼이 들린 듯 며칠을 앓았다.
2019년 8월 1일, 중부자바 주 암바라와 역사의 현장은 화장실로 변해 있었다. 2,000루피아만 내면 누구든 쓸 수 있었다. 과거와 현재의 선을 매몰차게 긋듯, 함께 일렬로 늘어서 썩어가는 19칸 방과 달리 그곳만 푸른 페인트가 칠해지고 멀쩡한 문이 달렸다. 자초지종을 물어도 주민들은 심드렁했다. 그들은 그곳이 일본군 종군 위안소였다는 사실을 대개 몰랐다.
나머지 19칸의 면면은 참담했다. 폭 2.5m, 길이 3.6m, 높이 3m의 방들은 쓰레기 더미와 함께 문드러져 가고 있었다. 오랜 세월 창고로 쓴 듯했다. 돌침대와 침대 안쪽을 가리는 천을 걸어 물체를 고정했을 것으로 보이는 구멍만 양쪽 벽에 두 개씩 남아있었다. 버려진 짐승 우리와 흡사했다. 자물쇠로 잠긴 방도 많았다.
그나마 보존이 잘 돼 있는 오른쪽 끝에서 다섯 번째 방 돌침대 위에는 녹슨 풍로와 전기밥솥, 먼지 수북한 오토바이 헬멧 등이 버려져 있었다. 세월에 짓이겨 손만 대도 부스러지는 벽엔 나무뿌리가 들러붙었다. 바닥엔 눈물을 쥐어짜듯 이끼가 발걸음을 방해했다. 한숨을 쉴 때마다 습하고 역한 냄새가 목구멍을 깨웠다. 침대를 딛고서야 손이 겨우 닿는 폭 0.5m, 길이 1.5m 거미줄투성이 나무 창살로 쏟아지는 적도의 햇살은 너무 눈부셔 징글징글했다. ‘소녀도 저 하늘을 바라봤겠지…’ 누군가 가지런하게 놓아둔 추모용 꽃들이 침상 위에 희끗희끗하게 말라붙어있었다.
왼쪽 벽에 적힌 정체불명의 낙서를 보고 통탄했다. 누군가 ‘소녀시대’라고 써 놓았다. 그 옆과 위엔 한자(少女時代)와 영어 약자(SNSD)로 역시 소녀시대를 적어 놓았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보통 우리나라 사람이 한글을 표기하는 방법과는 다르다. ‘ㅅ’을 적을 때 나눠 쓰지 않고 한번에 그린 모습이다.
방 입구엔 다윗의 별도 그려져 있다. 다윗의 별은 오랜 역사 동안 유대인의 긍지를 드러내는 문양으로 활용됐지만, 2차 세계대전 때 나치 독일이 모든 유대인들로 하여금 노란색 다윗의 별을 가슴에 달고 다니도록 하는 정책을 시행함으로써 선별과 배제의 상징으로 둔갑시켰다. 홀로코스트 대학살 당시 다윗의 별은 핍박과 고통을 불러오는 낙인이었다. 저 해괴하고 망측한 낙서들을 누가 그렸는지 현재로선 정확히 알 수 없다.
화장실이 있는 건물 너머엔 폐가 두 동이 더 있다. 9칸, 15칸으로 추정된다. 지붕과 벽이 무너진 자리에 수풀이 우거져 떼를 입힌 무덤 같았다. 방들의 폭이 1.5m밖에 되지 않아 더 답답해 보였다. 질퍽거리는 통로를 오리 몇 마리가 거닐었다. 위안소 앞에 흐드러지게 핀 분홍 꽃들은 슬프도록 아름다웠다.
이곳에 오기 전 수없이 들었던 정서운 할머니의 생전 육성을 다시 수십 번 들었다. 할머니의 담담한 한마디한마디는 여전히 살아있다. 할머니의 증언을 날것 그대로 옮겨 본다.
“나는 이제 자카르타에서 내려가지고 자바섬 스마랑이란 데가 있는 기야. 거기를 13명이, 그래 가지고 갔다 아이가. 그래서 그 때사 여기가 일본 땅이 아니고 먼 나라다 하는 걸 알았지.”
“처음에 인제 저녁에 장교 한 놈 오더라고. 술을 잔뜩 쳐먹고 오는 기라. 그래 뭐 벌벌 떨릴 거 아이가. 열다섯 살, 거기 간 중에서 내가 제일 나이가 어렸어. 그래 갖고 이제 강간을 당한 기지. 자꾸 이제 상대 안 하려고 내가 막 발악을 하고 그러니까 아편을 찔러 넣는 기라. 그래 갖고 이리 돼서 그만 중독이 돼 버린 거라. 숫자도 헤아릴 수 없고, 토요일 일요일에는 말도 못해. 줄을 서 가지고 옷도 안 벗고. 그 말을 어디다 다 할꼬, 아이고.”
“일주일에 한 번씩 검사하러 가거든. 병원이 야전 병원이 부대 안에도 있고, 또 따로 큰 데가 있어요. 거기 나가면 인도네시아 원주민들, 그 사람들을 보면 그리 반갑고 그렇더라고. 얼굴이 새까맣거든. 그래도 반갑고 남자들만 보다가 그 사람들을 보면 눈물이 날 정도로 솟구치는 기라.”
“둘이 죽었다. 고마 개 한 마리 죽으면 갖다 묻어버리듯이 그랬지. 장례식이 어디 있노, 거기서. 금계랍말라리아약으로 먹는 거 그 약을 40알을 내가 구한 기라. 두 개씩, 세 개씩 한국사람이 군의관이기 때문에. 그래 가지고 내가 모아 가지고 그걸 한번에 털어 넣었는데. 그랬는데 그것도 죽는 것도 맘대로 못 죽겠더라. 3일 만에 깨어났다. 같이 있는 사람들이 얘기를. 코로 입으로 귀로 전신에서 피가 쏟아지더래.”
“그리고 나서 우리는 (일제가) 손든(항복한) 줄 몰랐는데, 13명이 가 가지고 3명이 죽었네. 3명 죽고 나머지 10명은 이제 방공호, 그 방공호 하나에 다 들어갈 순 없거든. 몇 명만 데리고 방공호로. 나중에 알고 보니까 거기다 매장을 시켜버린 거라. 10명 중에서 그러니까 4명이던가, 3명이던가 방공호에 먼저 들어간 이들은 죽었다.”
증언이 너무 생생해 현장에 할머니와 함께 있다는 착각에 빠졌다. 할머니는 이렇게 말을 맺었다.
“목숨만 부지하고 살자, 목숨만 살면 내 몸을 빼앗아가도 내 마음만은 안 뺏긴다. 그런 정신으로 내가 살았지. 조국이 힘이 없어 끌려간 것인데, 부끄러우려면 우리를 끌고 간 일본이, 그리고 조국이 부끄러워야지. 나는 부끄러울 것이 없습니다.”
망자의 발자취는 더 있다. 위안소에서 10여 분 거리부터 암바라와 의거 현장이 펼쳐진다. 조선인 포로감시원이던 고려독립청년당 민영학 손양섭 노병한 3의사가 갑작스런 전속 명령에 불만을 품고 1945년 1월 4~6일 사흘간 일본군 십여 명을 죽인 뒤 모두 자결한 항일 의거다.
그들의 행적은 의거 현장에서 18㎞가량 떨어진 수모워노 보병훈련장에서 시작됐다. 이들은 1944년 12월 29일 밤 11시쯤 훈련장 취사장에서 결성된 고려독립청년당의 당원이 됐다. 고려독립청년당은 ‘아세아의 강도 제국주의 일본에 항거하는 폭탄아가 되라’ 등 세 가지 강령을 발표했다.
75년이 흐른 2019년 8월 고려독립청년당원들이 혈서를 쓰고 당가를 불렀던 취사장엔 학생들과 가방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훈련장은 청소년 야영장으로 변했다. 오랫동안 네덜란드 국기가, 한동안 일장기가 걸렸을 연병장 깃대에 인도네시아 국기가 휘날리고 있었다. 포로감시원들이 묵었을 막사는 학생들의 숙소로, 매점으로 변해 있었다. 매점 주인도, 학생들도 옛 네덜란드 훈련장인 건 알았지만 일본군이 썼다는 사실은 모르고 있었다. 하물며 자신들이 누운 자리의 의미를 알리 없다.
1945년 1월 4일 오후 3시쯤 일본군이 자바포로수용소 스마랑분소 제2분견소로 쓰던 암바라와의성요셉성당에서 트럭 한 대가 출발했다. 전날 싱가포르(당시 말레이반도) 전속 명령을 받은 조선인 포로감시원 6명과 일본인 인솔 하사관 등이 타고 있었다. 포로감시원들은 갑작스런 명령에 비분강개했다. 3의사는 성당으로부터 8~9㎞ 지점에서 운전병에게 총을 겨누고 차를 멈추게 한 뒤 성당 옆 무기고에서 경기관총과 소총 등 무기를 탈취했다. 무기고는 현재 학교 주차장으로 쓰이고 있다.
이어 3의사는 분견소장(대위) 관사를 습격하고 밤늦게까지 암바라와 시내를 돌며 일본군 군납업자와 의사(위생병), 형무소장 등을 사살했다. 일본군의 추격을 당해 민영학 의사는 5일 총상을 입은 수수밭에서, 나머지 두 사람은 6일 위생자재창고에서 잇따라 자결했다. 당시 일본군 공식 행정 문서에 3의사의 사망 사실이 적혀 있다. 위생자재창고는 공용 주차장으로 바뀌어 있다. 암바라와 의거는 그렇게 서서히 잊혀졌다.
고려독립청년당은 당 선언에서 ‘희생 없이 광명은 획득할 수 없다’고 선포했다. 후대인 우리는 광명을 획득했는가, 희생까지는 아니더라도 노력을 했는가. 이정표 하나 남기지 못한 암바라와 의거 현장에서 잠시 길을 잃었다.
자카르타로 돌아온 뒤 6개월이나 미뤄둔 숙제를 풀었다. 1920년 9월 20일 이 땅에 ‘정착’해 인도네시아 한인 이주 100년의 역사를 시작한 장윤원 선생의 자취를 따라가는 일이었다. 선생은 해외 망명 독립운동가들에게 자금을 지원하다 일본 경찰에 쫓겨 이 땅에 망명했다. 1942년 3월 인도네시아를 점령한 일본군에 의해 고문과 투옥을 당했다. 1945년 8월 종전 후 해방 조국으로 돌아가려고 했으나 고문후유증을 이기지 못한 채 1947년 11월 23일 자카르타 자택에서 통한의 27년 망명생활을 죽음으로 마쳤다.
여정은 아트마자야가톨릭대 교정에서 시작했다. 본관 복도를 중심으로 학생들이 앉은 의자 구석 너머 건물 벽에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는 석판이 하나 붙어있다. ‘GEDUNG IR. J. P. CHO 1927-1995’. 장윤원 선생의 차남 장순일을 기리는 건물명이다. J는 주니치(Junichi), P는 영세명 바울(Paul)이고, 초(Cho)는 장씨 성의 일본어 음독을 영어식으로 표기한 것이다.
이역만리에서 독립을 위해 애쓰다 고문과 투옥을 당하고 그로 인해 숨진 선생의 못다한 유지를 실천한 후손을 기리는 석판에 어떤 이유로 일본식 이름이 붙었는지 현재로선 확인할 길이 없다. 장윤원 선생이 투옥됐던 형무소 등은 민간 출입이 허락되지 않아 먼발치에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장윤원 선생의 자취를 쫓는 일은 그의 무덤에서 마무리했다. 선생은 남부 자카르타 타나쿠시르 공동묘지 정문에서 왼쪽으로 꺾어 들어가 100여m 떨어진 곳에 부인, 차녀와 합장돼 있다. 묘비의 ‘장윤원(張潤遠)’ 한자 이름 밑에도 일본어 음독이 표기돼 있다. 그나마 출생지를 ‘SEOUL’이라고 새긴 묘비가 반갑고 서글펐다. 그날 적도의 바람이 울었다.
기실 이 기나긴 여정, 앞으로도 이어질 여정의 단초는 양칠성이었다. 그의 파란만장한 삶과 현지 역사단체가 양칠성 도로를 만든다는 소식에 관심을 기울인 덕분에 수많은 망자들과 인연을 맺은 그 먼 길을 뚜벅뚜벅 걸어올 수 있었다.
양칠성은 세 개의 이름, 두 가지의 죽음을 가진 인물이다. 생몰(1919~1949년)과 역사로 추정컨대, 전북 완주에서 태어나 20년은 한국이름 양칠성(梁七星)으로, 6년은 일본이름 야나가와시치세이(梁川七星)로, 4년은 인도네시아 이름 코마루딘(Komarudin)으로 각각 살았다. 코마루딘은 ‘인도네시아를 비추는 달’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그는 1942년 포로감시원으로 인도네시아에 왔다가 일제가 패망하자 인도네시아독립전쟁에 뛰어들었다. 반둥과 족자카르타를 잇는 철도와 도로를 공격하고, 다량의 무기를 탈취했다. 네덜란드 군의 포위를 저지하기 위해 치마눅 다리를 파괴했을 정도로 폭파 전문가였다는 얘기도 있다. 1948년 11월 네덜란드군에게 붙잡혔다.
이듬해 8월 10일(5월 말이라는 설도 있다) 양칠성은 일본인 동료 두 명(아오키, 하세가와)과 함께 가루트시장에 끌려 나왔다. 공개 총살 직전 최후의 순간은 두 개의 버전이 존재한다. 하나는 씻을 수 없는 오점으로, 하나는 과장돼 보이는 신화로 기억된다.
#아오키의 선창으로 기미가요를 제창한 뒤 만세를 삼창했다. “덴노헤이카반자이(천황 폐하 만세)!” 현장을 목격한 일부는 그냥 “만세”라고도 했다.
#“메르데카(자유 또는 독립), 메르데카!” “나는 죽어서도 인도네시아의 독립을 바란다.”
1975년 다후란, 스코토 등 옛 동료들이 인도네시아 정부에 공식 청원하면서 양칠성은 처형 26년 만에 ‘외국인 독립영웅’으로 추서된다. 우리나라 광복 50주년인 1995년에는 한국 시민단체 등의 노력으로 묘비명이 ‘KOMARUDIN, YANG CHIL-SUNG, 양칠성 대한민국’으로 바뀐다. 죽음의 순간에 대한 엇갈린 증언 탓에 평가도 양극단으로 갈리지만 그가 인도네시아와 한국의 가교 역할을 한 건 확실하다.
인도네시아 한인 사회는 지난해 이주 100주년을 맞았다. 수많은 이들이 이 땅에서 꿈을 꾸고 꿈을 이뤘다. 누군가는 사업에 성공했고, 누군가는 아이들을 잘 길러냈다. 그러나 이주 초창기 우리 선조들의 꿈은 역사의 혼돈과 삶의 고초 속에 파묻혔다. 역사의 현장은 세월의 더께에 방치되거나 흔적마저 사라진 채 제각각 다른 모습으로 변했다. 기록조차 후세가 속 시원할 만큼 풍부하지 않다.
장윤원 선생 비석과 그 아들을 기리는 석판에 일본어 음독으로 새겨진 이름을 바꾸고, 암바라와 의거 현장과 위안소에 푯돌을 세우는 일이 이 땅에 살고 있는 산 자의 바람이다. 혹자는 흐지부지됐다고 넘겨짚지만 2019년 한국일보 보도 이후 지금도 여전히 차근차근 그 일에 매진하는 누군가의 정성이 결실을 맺으리라 믿는다.
푯돌처럼 눈에 보이지 않더라도 귀한 일은 얼마든지 할 수 있다. 무엇보다 그들의 이름이나마 부르고 기억하는 일은 어쩌면 이 땅을 살아가는 우리의 의무일지 모른다. 이 땅의 우리만은 그 이름들을 잊지 말길 소망한다. 하여 그들의 이름을 남긴다.
장윤원(인도네시아 이주 100년 역사의 시작), 정서운(일본군 성노예로 고초), 민영학 손양섭 노병한 이억관 김현재 임헌근 이상문 조규홍 문학선 백문기 박창원 오은석 신경철 지주성 박승욱 변봉혁 한맹순 금인석 송병기 김춘식 김민수 김규환 김선기 신재관 김인규 안승갑(이상 고려독립청년당) 그리고 양칠성(인도네시아 외국인 독립영웅).
인도네시아와 한국엔 비슷한 명언이 전한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단재 신채호 선생), “역사를 잊으면 나라가 변질된다”(인도네시아 국부 수카르노). 기억은 응당 우리의 몫이다.
<수상소감/고찬유(한국일보자카르타특파원)>
누구 말처럼 “타임머신이 있으면 찾아가 직접 묻고 싶었습니다”. 역사의 잃어버린 고리를 연결하는 일은 고역이었습니다. 6개월 가까이 자료를 뒤지고 사람을 만나고 현장을 찾았지만 도리어 갈급했습니다. 노트북에 쌓인 5만 자 가까이 되는 활자를 두고도 망설였습니다. 사실과 추정 사이에서 깊이 고민했습니다.
기록의 부재 탓입니다. 그런 점에서 한인 사회가 지난해 발간한 ‘인도네시아 한인 100년사’는 후대를 위한 보물입니다. 제 알량한 성과물에 기대 100년사 발간 전 집필자들과 교류할 수 있게 돼 영광입니다.
어려운 환경에서도 푯돌 설치 등 다양한 후속 조치를 이어가는 한인회를 응원합니다. 덕분에 전진할 동력을 얻었습니다. ‘경청하고 발로 뛰자’는 첫 마음도 다시 살아납니다. “양칠성이 누구야”에서 시작했던 기나긴 여정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보완하고 추가할 현장이 있다면 어디든 달려가겠습니다.
다음 이름들도 간직하고 기억하겠습니다. 김문환 김소웅 류완수 박재한 배동선 사공경 신성철 엄은희 이순형 이영미 이태복 조연숙 채인숙 최경희 홍윤경(직함 생략, 가나다순) 그리고 머릿속에 맴돌지만 미처 이름을 적지 못한 인도네시아의 한인 여러분. 제 글에 등장하는 이름들이 과거라면 이들은 인도네시아의 현재 그리고 미래입니다.
인연의 실타래가 이어지지 않았다면 오늘의 수상도 없습니다. 아내 김진연과 아들 건우의 응원도 늘 귀한 선물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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